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 - 개정판
이은기 지음 / 시공아트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2016년도에 읽었던 책인데 표지를 바꿔 재간행된 책이라 처음에는 몰라 봤다.

표지 디자인은 강렬하고 잘 만든 것 같다.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싸게 느껴질 정도로 도판의 질이 좋고 본문에 나온 작품들이 99% 실려 있다.

미술사 관련 책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노력은 들여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제작연도와 소장처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저자와 출판사의 성실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처음 읽었을 때 썼던 리뷰를 보니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라 시시하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는 아마도 책을 대충 읽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군주들이 예술을 선전 도구로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세기 이후 순수미술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회화와 조각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승격했지만, 그 전 시대만 해도 오늘날의 미디어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 경쟁적으로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평처럼, 이런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어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 낸 많은 천재 화가들의 업적이 경이롭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위대함 때문에 오늘날에도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리라.

르네상스 시대상과 미술의 역할에 대한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125p

이러한 소식망에 의해 이사벨라의 관심의 방향이 정해졌으리라. 이사벨라는 르네상스의 여걸이며 옛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였으나 작은 도시의 안주인으로 고대의 원작을 갖기에는 재력과 권력이 부족했다. 그는 만토바라는 주변 도시에서 로마와 피렌체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고 있었으니 독자적인 수집 성향을 가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수집한 다양한 모조품들은 고대 조각이 갖춘 건강하고 균형 잡힌, 또는 격동적이고 숭고한 맛은 사라지고 궁정 취향의 공예품 수준으로 전락한 셈이다. 고대 조각의 수집은 고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기보다 상류층의 유행이어서 로마와 피렌체의 중심 문화권 취향을 모방하는 고급 키치로 변모한 것이다.

134p

18세기 말과 16세기 당시의 진열에도 큰 차이가 있으니 바로 보석과 메달들이 없어지고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 조각을 주로 한 순수미술과 공예품이 주를 이루는 응용미술을 구분하던 19세기에 더욱 본격화되어 오늘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16세기 말 메디치 가에 의해 수집된 고대 조각은 자연과 예술의 알레고리를 드러내기 위한 많은 수집품 중 일부였으며 이들은 군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집은 더욱 유행하고 진품을 갖기 위한 발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대 조각이 수집가의 목적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조각상들의 기능은 변모되었다. 고대 조각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이후 아름다움의 전형, 또는 사실 묘사의 연습 대상이 되어 21세기 초의 한국에서도 이 상들의 석고를 데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과정에서의 고대 조각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 전달력을 지닌 시각 매체였다. 르네상스 시대 고대 조각은 첨단의 사조였던 고대 문화를 연상케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첨단 취향이 되어 수집의 대상이 되자, 고대 조각이기 때문에 숭상하기보다는 상들이 환기시키는 부과 이익, 즉 지적인 모습으로 포장된 부와 권력의 과시가 수집의 더 큰 목적이 된 것이다. 로마의 품위 있는 조각 정원, 이사벨라의 서재, 메디치 가의 트리부나는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문화적인 공간이지만 수집의 원동력은 과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에 신전에 모셔져 신을 대신했던 신상과 로마 시대의 황제 초상은 르네상스 때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수집되더니 순수미술을 숭상하는 19세기 이후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역사 속에서 고대 조각은 제작 당시의 목적을 넘어서 조각상 자체가 문화적인 전달력을 지닌 이미지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한 은행가 집안이 지속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서 행했을 수많은 권모술수는 가려지고 교회와 자선 단체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하고 훌륭한 건축 공사를 함으로써 돈을 건강하게 쓰는 모습만 보인 것이다.

157p

로렌초 마니피코는 피렌체를 주무르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직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막후에서 조정하는 실권자였으나 "겉으로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한 것처럼 보여야 했고 또 자유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시뇨리아가 된 적이 없었다. 21세에 집안의 長이 된 그는 젊지만, 집안의 지위를 보았을 때 시뇨리아 이하의 직책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뇨리아는 45세 이상이어야 했으니 21세부터 43세에 죽기까지 22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던 그의 권한은 비공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뇨리아는 되지 못했지만 정계와 제계의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시뇨리아를 손에 넣은 대부가 된 것이다.

172p

공화정 치하의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건전한 취향으로 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했으나 공국 형태의 16세기 후반에는 권위를 강조할수록 체제 유지에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피렌체와 베네치아, 시에나 등의 공화제 국가들이 독자적인 예술의 발전을 이루었음은 우연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191p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던 이탈리아 옆면 초상과 플랑드르 미술의 특징인 세밀함, 그리고 원경의 배경을 절충시킴으로써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차별화된 초상화를 그려냈다. 세부 묘사를 충실히 함으로써 실제 인물의 현존성을 전달했으며, 또한 완벽한 측면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의 순간을 초월한 영원함과 기념비적인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세부 묘사와 모뉴멘탈함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업적은 미술사 연구의 초기부터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화가가 왜 이러한 방식을 창안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술이 순수예술로 취급되기 이전인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언제나 주문에 의해 제작됨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초상화 주인공의 주문 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뒷면에 그려진 승리의 비유는 이를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220p

미술작품을 순수한 애호나 문화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면 미술의 주문과 수집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닌 활동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은 어디까지나 이미지를 통한 전달의 매체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해석의 중요성이 커진다.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행위는 엘리트 지식층이 누리는 인문주의의 향유와 희귀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하였으며,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함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나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와 견줄 수 있는 가문임을 뜻했다. 이사벨라는 정치와 외교에 뛰어난 현실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0대에 제작된 자신의 초상에서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후작부인이기를 바랐다. 미술품의 주문과 수집은 애호를 넘어선 이미지 정책이었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25p

페루지노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단지 자기 그림이 걸릴 자리 옆에 이미 있는 만테냐 그림의 인물들 크기를 물었다. 함께 걸릴 때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이사벨라의 실제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사벨라에게는 페루지노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화가였음이 중요했으며, 그의 화풍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29p

희귀한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일은 원하는 것을 당대의 화가에게 주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더구나 이탈리아 동북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만토바는 로마와 같은 유적지도 없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와 같은 재력도 없었다. 

259p

이교의 신이 주관하는 시의 세계는 의인화가 내건 표어에서 보듯이 바로 '신성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다. 곰브리치가 간파한 대로 이 방에 그려진 '인간의 지적' 활동은 이교의 신이 하는 일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63p

16세기의 지식인 화가 바사리에게는 이교의 학문을 연구하는 인문주의와 신학이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벽화의 도상들은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 주고 있다. 

277p

교황과 수도원장은 공통점이 많은 파트너였으니 둘은 모두 "추상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인 가능성을 절충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강한 스태미너와 낙관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279p

이러한 전통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반대하였던 다신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기서의 플라톤은 신약을 준비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플리토니즘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학의 체계에 흡수되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283p

그들은 고대 학문을 부흥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고대와 현대, 신학과 인문학을 조화롭게 절충시킨 긍정적 세계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줄리오 2세의 설교자였으며, 모두 교황의 황금시대를 노래한 낙관론자였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신학과 인문주의, 교황의 암시적인 목적을 아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였다. 그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고대를 상상케 하였고, 중앙 집중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하나인 신으로 귀결케 하였다. 

284p

로마 교회가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함으로써 로마는 문학과 예술의 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에 유럽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청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좋은 역할을 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인문주의 수사학으로 정교히 짜놓은 희망찬 미래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최악의 현실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이미지와 개념을 미화시킴으로써 유지하려 했던 그들의 정책은 정치가와 그 주변 인물들이 빚어낸 일종의 망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망상은 1527년 소위 '로마 약탈'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교회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미화가 아니라 개혁이었을 것이다.

291p

초상화가 오늘날과 같이 다른 작품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걸려 있는 회화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원래의 위치인 귀족의 저택이나 궁정에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초상화는 예술품이기보다 가족과 친구,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0p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행운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지도자들이 있다. 그중 가장 탁월한 사람은 모세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모델 중 으뜸으로 모세를 삼은 것인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기 국가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훌륭한 지도자는 항상 위기의 상황에서 나오며, 위기는 바로 군주에게는 기회이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모세는 코지모에게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 된 셈이다. 

 모세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듯이 피렌체의 악조건은 바로 메디치 가에게는 호조건이니 기회를 잡으라는 정치 이론가의 권고다.

332p

프로그램이 정해지고, 이를 총괄하는 미술가가 있으며, 화가는 이를 그림으로 실행시키는 코지모 1세의 조직화된 미술 주문 양상은 당시 미술가들의 세계와 미술의 성격도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인 전시 효과의 프로그램들은 전승 기념이나 결혼식 등의 행사 위주여서 규모는 거대하지만 기간은 촉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대한 규모를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총책임자가 있고, 조직이 필요하며, 화가나 조각가가 일하는 공방에서는 필요에 따라 적합한 화가를 공급해야 했다. 이제 화가는 화가로서의 능력만으로는 유능한 작가가 될 수 없고, 어느 상황에나 자신을 잘 맞추는 미술가여야 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러한 요구를 탁월하게 수행한 미술 행정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적응하는 화가는 궁정적인 생활을 하는 명예 있는 화가가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화가는 개인의 사회 부적응을 심리적으로 해소하는 매너리스트가 되었다.

344p

18세기 중엽까지 우피치는 미술관이라기보다 귀중한 것, 희귀한 것의 수집관이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미술품은 독립된 미적인 영역이기보다는 과학과의 연관성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350p

현대의 미술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희귀한 것들의 모음이 박물관 역사의 시원이었다. 예술적인 가치보다 '특이한 것', '희귀한 것', '호기심 있는 것'을 모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으로부터 평가 절하되어 왔으나 이는 20세기 눈으로 인식한 잘못된 평가다. 르네상스인에게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가장 큰 배움의 동기였으며 이의 수집과 전시는 필요 불가결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집 행위는 소우주에서 대우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의 실천 과정이었으며, 전시는 대우주를 소우주에 질서화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360p

차마부에의 <옥좌의 성모자>를 다음과 같이 감상하라고 권하고 있다.

"프리미티브한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그림의 미숙함에 당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패널화를 멀리서 바라보면 그런 일종의 미숙함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이 패널화가 원래 자리인 산타 트리니타의 제단에 있었을 때는 비례와 형태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거리도 없었고, 교회 자체가 너무 넓어서 이런 것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에서 조형성을 중요시하던 20세기 전반의 순수미술 경향은 그 기준을 근대 이전의 종교 회화에도 적용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데 충분한 거리와 적당한 아늑함으로 요구한 것이다. 20세기 중엽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박물관들은 관람객의 감상 조건을 최대한 고려했다.

377p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에도 이를 충족시킨 미술가가 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제약이 어떤 화가에게는 장애가 되었지만 어떤 화가에게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는 기회가 되었다. 미켈란젤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티치아노 등 세기의 걸출한 작가의 경우, 현대가 아무리 천재를 부정하는 시대라 해도 그들의 탁월한 해결 방법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심을 용해시키고 요구를 뛰어넘는 작품을 생산해 내었다.

 서양의 변혁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이 역사의 주역이 되면서 미술 또한 대중의 것이 되었다. 왕궁은 박물관으로 변하고 귀족 소유의 미술품들이 공공의 소유로 이전되었다. 새로운 사회라 해도 미술이 부의 곁을 떠난 적은 없지만 그러나 그 양상은 획기적으로 변하였다. 새 시대의 자본가들은 아무리 권세가 크다 해도 개인의 목적에 따라 미술품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19세기에는 계몽의 이름으로, 20세기에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미술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도시마다 공공미술관들이 들어섰으며, 후원자는 이름을 남기되 미술의 향유자는 다름 아닌 대중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는 재벌의 거대한 자본으로 세워진 쾌적한 미술관이 무수히 많고 서민은 단지 몇 천 원으로 작품을 향수하고 있다. 현대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 이래 자기 소유의 미술품이 아니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오류>

127p

아들 프란체스코 1세로 이어진 수집의 역사는 1589년 코시모 1세의 손자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에 맞추어 일단 완료되었다.

->프란체스코 1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1세는 코시모 1세의 손자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다.

132p

이탈리아에 와 본 일이 없는 영국의 샬롯 여왕(Charlotte d'Inghiltera)은 영국 화자 조파니에게 <트리부나>를 그려오도록 주문하였다.

->샬롯은 여왕이 아니라 조지 3세의 부인이므로 샬롯 왕비라 번역해야 하고, Inghiltera의 스펠링도 Inghiterra가 맞다. 또 요한 조파니는 영국에서 활동했으나 독일 출신의 화가다.

160p

1515년 로렌초의 큰아들인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메디치 가의 권력은 다시 정상에 올랐다.

->조반니는 1475년생으로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다. 큰 아들은 로렌초의 뒤를 이어 집안의 수장이 된 피에로 2세로 1471년생이다.

210p

페데리코 는 결혼한지 11년 동안 여덟 명의 딸을 두었고 1472년 1월에 귀한 후계자 아들을 얻었다.

-> 위키에 의하면 페데리코는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211p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통치자가 된 지 17년 만에야 정통성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도 9년을 기다려서야 아들 구이도발도를 낳았다.

-> 페데리코는 1444년 통치자가 되었고 1461년에 교황의 승인을 받아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1472년 아들을 낳았으니 9년이 아니라 11년을 기다렸다.

294p

코시모 1세는 외교적으로 아들 프란체스코 1세를 황제 카를로 5세의 사촌 조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 조반나는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이고, 카를로 5세는 사촌이 아니라 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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