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 - 중세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3
박용진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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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사회와 정치 구조에 대한 가벼운 고찰.

앞서 읽은 절대왕정의 기원은 작은 분량에 불구하고 무척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번 주제는 피상적인 느낌이라 아쉽다.

중세 천 년을 120 페이지로 담기는 무리였나 보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 더 이상 영주들이 농민들을 인신 구속할 수 없어 임대료를 받고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는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는 내용은 익히 알려져 있어 새롭지 않았다.

백 년 전쟁을 치루는 동안 국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왕은 신민에게 자원을 징발하고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이 때 삼부회가 이를 추인하는 역할을 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왕의 권한이 커지고 조세는 항구화 되어 절대 왕정이 성립되는 과정은 앞의 책에서도 본 바다.



<인상깊은 구절>

65p

도시민들 대부분이 가까운 농촌 지역 출신이며,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많은 수가 이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뿌리 뽑힌 자들"이 교환하는 물품의 양보다 주변 농촌의 농민들이 거래하는 상품의 양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상인이란 뿌리 뽑힌 자들이나 편력 상인보다는 주변 농촌 출신으로서 상업에 재능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도시가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원래부터 거주하던 토박이들이 도시의 유력자들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상인들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94p

노동력은 부족해져서 임금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는 임금 노동자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경영하던 토지를 운영하기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토지조차도 농민에게 임대해 주게 되었다. 대신 영주는 농민들로부터 농산물로 받아 오던 토지 임대료를 화폐로 내도록 하였고, 이 화폐 수입으로 시장에서 농산물을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영주는 굳이 농민들을 속박시켜 놓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영주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농민들을 각종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게 되었다. 이제 영주는 농민에 대해 경제적 권리인 임대료만을 받게 되었고, 과거처럼 농민을 신체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영주는 소작농들로부터 임대료를 받는 단순한 지주로 변화하게 되었다. 

97p

시행정관은 상층 시민들이 독점했으며 이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강하게 결속했다. 이들의 목표는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그 이전 시기에도 농촌의 토지를 구입함으로써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분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14세기에 들어서 귀족이 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는데, 그것은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많은 관료가 필요해졌는데, 이러한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 있었다. 

100p

기존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기존 교회를 배척하고 개인적인 경건성을 추구하거나 이단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지방에서는 신도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널리 퍼졌다. 

120p

중세 말 국왕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성직자, 봉건 영주, 그리고 시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여 과세에 대한 국민의 협찬을 얻어 재정 수입을 확보했다. 이러한 제도가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영국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1304년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세 신분으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삼부회였다. 프랑스의 삼부회는 백 년 전쟁 내내 전비 마련을 위해서 소집되었고, 국왕의 재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삼부회는 15세기 말이 되어 왕권이 강해지자 소집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소집된다고 하더라도 세금을 인정해 주는 거수기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절대 왕정의 한 요소로서 상비군과 관료제를 떠받치는 조세 제도의 확립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백 년 전쟁은 큰 기여를 했다. 14세기 이전까지 프랑스에서는 신민 전체에 항구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국왕은 왕국을 방어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모든 신민이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민의 기여, 즉 세금은 전쟁과 같이 '명백한 필요'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어서, 처음 세금이 징수되었을 대에는 그 기간을 일 년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않자 세금은 연장되었고, 빈번한 세금의 연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국왕이 "그 자신의 뜻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동안" 그의 신민에게 과세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백 년 전쟁은 과세의 확립과 더불어 관료제의 확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금은 세 신분의 대표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삼부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삼부회는 과세를 인정해 주는 대신 세금의 징수를 국왕 관료에서 맡기지 않고 삼부회에서 선출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조세가 항구화의 길로 접어들었던 14세기 말부터 징세원은 일종의 관료가 되었고 실제로 국왕에 의해 임명되곤 했다. 이리하여 백 년 전쟁이 끝난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강력한 국민국가로의 첫걸음을 내디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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