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열전 - 영웅부터 경계인까지 인물로 읽는 고려사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려 인물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다.

저자가 전공자라 기대를 했는데 다소 맥빠지는 가벼운 구성이긴 하다.

다만 고려 역시 사대관계로 원나라를 섬겼고 그것은 당시 국제질서에 맞는 보편적인 유교이념이었다는 평가가 인상적이다.

고려의 사대외교를 비난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20세기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 때 득세한 환관 등 하층민 출신의 권력자들이 과연 역사에 신분철폐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같다.

무신 정권기에 고려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인상깊은 구절>

144p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한 시기에 고려 출신 환관들이 원나라에서 크게 득세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의 주요 정책은 물론이고 국왕의 즉위와 폐위까지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제가를 받게 하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 방식이 환관 득세의 원인을 제공했다. 고려 국왕은 국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인 출신 환관을 통해 황제와 원나라 고위 관료에 접근했다. 원나라 황실에 요청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황실 사정을 잘 아는 고려 출신 환관을 통해 접근했다.

162p

<춘추좌전>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이소사대를 유교의 예의질서로 규정했다. 즉,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이익을 주고받는 호혜적인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유교이념에 충실한 당시 지식인들은 사대관계에 대해 유교의 예의질서가 국가 간의 관계로 확대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대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본 신채호의 생각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두한 20세기 초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김부식은 동아시아의 보편 이념인 유교이념으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려 했다. ... 이과 같은 형제맹약은 보주를 고려의 영토로 확정하기 위해 고려가 취한 실리적인 사대외교이지 굴종적인 사대외교가 아니었다. 김부식은 형제맹약을 결정한 인종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금나라와의 사대를 직접 견문한 김부식의 시각은 오늘의 우리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자주와 사대의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70p

고려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문명의식은, 고려는 중국과 문화 수준이 대등한 나라라는 뜻의 소중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참고로 소중화는 조선시대에 더 많이 사용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으로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문명의 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며 소중화임을 자처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소중화 개념은 중국 한족을 중화문명의 중심으로,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즉, 천자국 중국의 문명을 동경하고 그것을 제후국 조선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소중화 의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고려의 문화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뜻의 소중화 개념과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176p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창조적이고 자존감 넘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크게는 고려 중기 이후 문물과 예악이 풍성하고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전성기 고려의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인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춘 몽골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179p

13세기 전반 몽골 항쟁기를 거친 고려는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천하 중심'이라는 다원적 천하관과 '고려는 중국과 문명 수준이 대등하다'는 소중화 의식은 변절을 강요당한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그 분기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규보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고려 중기 지식인의 문명의식 자체가 크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194p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연구자들은 그동안 이 점에만 주목했다. 한편,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원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시작된 원종과 충렬왕의 역사를 강조했다. 특히 충렬왕 대에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고려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이승휴가 원나라의 고려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적대적인 서술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단군조선을 강조한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일까? 이승휴가 다원적인 역사인식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군조선과 원나라를 함께 강조한 그의 역사서술은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

 이승휴의 다원적인 역사인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지만, 두차례 원나라 사행이 그의 세계관과 역사인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분명하다. <제왕운기> 속에는 단군을 강조하는 자주의 측면과 원나라를 상국으로 인식하는 일종의 사대적 측면의 역사서술과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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