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월지 - 중앙아시아의 수수께끼 민족을 찾아서
오다니 나카오 지음, 민혜홍 옮김 / 아이필드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월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오늘날의 민족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고대 세계에서만 존재하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흉노도 실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아득한 고대의 종족인데 그보다 더 먼저 중국 서쪽에 진출했던 월지는 너무나 모호하다.

이 책에 따르면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살던 월지인들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 가 감숙성 일대에 정착하고 교역을 펼치다가, 새로운 세력은 흉노에 밀려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갔고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먼저 살던 원주민과 합해져 북인도로 내려가 쿠샨 왕조를 건설했다고 한다.

월지는 기마민족으로 호전적이었고, 간다라 미술을 만들고 상업 활동을 한 이들은 박트리아에 원래 살던 이들이라고 본다.

동쪽에 살던 월지가 흉노에게 밀려 서쪽으로 가 쿠샨 왕조를 만든 게 아니라, 원래 그 땅에 살던 월지가 중국에 진출했다고 다시 되돌아 와 쿠샨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월지의 언어가 곧 박트리아어, 쿠샨어라고 본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박트리아라는 그리스 식민도시를 멸망시킨 것은 스키타이인이라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는 월지라고 되어 있고, 반고가 쓴 <한서>에는 새족이라 나온다.

저자는 스키타이가 곧 월지라고 생각한다.

스키타이가 새족, 혹은 색족을 가르킨다는 말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과연 스키타이와 월지는 동일 종족일까?

혹은 스키타이인이 월지는 아닐지라도 서방측 기록에서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종족은 월지가 맞다고 본다.

흥미로운 주장이고 다른 책도 참조해 봐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17p

현재까지 연구된 바로는 흉노어는 고대 투르크어에 속하며 흉노는 투르크계 민족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26p

연대의식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보호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줄도 모른다. 그들은 휘장, 의복, 승마, 무술 등으로 남들을 속이면 그럴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방에 있는 부녀자들보다 더 겁쟁이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요구해도 그들은 물리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자기를 뒷받침해줄 보다 용감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많은 수의 가신과 추종자들을 고용한다. 

38p

월지의 주요 세력은 파미르 고원의 서쪽, 즉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감숙의 서부에는 소수의 월지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를 '대월지', 감숙 서부의 월지를 '소월지'라고 부른다. 한 무제가 원교근공의 동맹 상대로 선택한 것은 대월지였다.

44p

서방측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중엽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도시가 시르다리야 강 건너편에서 침입해온 유목민족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리스인에게서 박트리아를 빼앗은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인이며, 페르시아식 표현으로는 '사카'라고 불렀다. 어쩌면 장건은 그 유목민족의 흔적을 좇아 아무다리야 유역, 즉 박트리아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박트리아를 빼앗은 스키타이인이 바로 대월지인가?)

72p

서방 사료에는 박트리아 왕국이 그 후 약 1백 년 동안 번영을 누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 북방에서 침입한 스키타이(사카)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것이 한문 사료에 나오는 대월지의 서천 및 대하의 정복에 대응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93p

나는 스트라본이 말한 동방의 스키타이(사카)인이 기원전 160년경 흉노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하를 정복한 대월지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대월지와 '塞'를 스트라본이 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킨 4부족의 하나로 동정하려고 시도했지만 확실성이 없었다. 새족의 존재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지만, 만일 실재했다고 해도 사료에 나타난 것은 대하의 정복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 '대월지-=스키타이(사카)'라고 하면 동서의 역사기록은 잘 맞아떨어진다. 아이하눔 유적의 발굴결과에서 시사하는 '그리스인 도시의 멸망=기원전 145년경'의 시기도 스트라본이 기록한 박트리아 왕국의 멸망과 <사기>, <한서>에 나오는 '대월지의 대하 정복' 기사와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 기원전 129년경 장건이 아무다리야 남쪽의 대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대월지는 그곳을 정복했으며,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한 후였다. 그곳의 토착민인 대하인은 집과 도시를 만들어 정착하고 도시마다 소군장을 세워 통치하고 있었다. 대하의 인구는 100만에 달했고, 전쟁보다는 상업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112p

분명히 박트리아어는 박트리아 정착민의 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언어를 가진 유목민도 존재한다면 혹시 그 유목민이 쿠샨인이 아닐까? 만약 쿠샨인의 원래 고향이 아무다리야 유역이라고 한다면 월지와의 관계는 어찌될까? 월지의 이동은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민족 이동이 아니라, 본래 중앙아시아에 본거지를 둔 월지가 동방에 진출해 있다가 철수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흡후(야구브)가 유목민 고유의 지배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라면, 귀상(쿠샨) 흡후는 결코 정착민인인 대하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쿠샨인은 대월지, 또는 적어도 그 일부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혹시 쿠샨인은 유목민으로서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대하인과 함께 중국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동방으로 진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9p

동아시아 유목세계에 이러한 새로운 동물 디자인이 도래한 것에 대해 번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 박트리아 주변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밀려났던 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기마민족이었다, 그 가운데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고 지배한 세력이 월지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기사 전수를 보급시키고 동물 의장 벨트 등을 가지고 들어갔다. 

211p

귀상 흡후가 다른 흡후를 병합하고, 간다라와 인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기마민족의 무력과 기동성이 필요하다. 이는 '장사에는 재주가 있지만 무용이 없다'는 대하의 정착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쿠샨 왕조의 주체는 유목민 월지일 것이다. 그러나 간다라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쿠샨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서 중국 서북 변경의 유목민이었다는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아무다리야 유역(박트리아)의 주민일 가능성이 크다. (박트리아어을 사용했다는 점, 죽은 사람의 입속에 화폐를 넣는 습속이나 복장 등에서 그렇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월지와 쿠샨 왕조 모두 아무다리야 유역을 본거지로 한 동일한 유목민 집단이었다. 그들의 일부분은 기원전 3, 4세기경 유목민족으로서 중국의 서부 변경에 진출하여 유목보다도 상업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던 중 흥세력 흉노에게 패해 기원전 2세기 중반, 원래 거주지인 아무다리야 유역으로 세력을 옮겼다. 그 후 남방으로 눈을 돌려 박트리아, 그리스인의 흔적을 쫓아서 인도와 관계를 맺었고, 인도를 통해 지중해의 로마 세계와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상이 내가 본 쿠샨 왕조의 발흥 배경이다. 쿠샨 왕조는 로마와 인도, 중국을 잇는 국제무역 중개업으로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동서 문화를 융합하는 간다라 불교미술이 탄생한 것도 그런 쿠샨 제국이 처해 있던 국제적 환경 때문이었다. 따라서 월지와 쿠샨인은 실크로드를 빛나게 했던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지방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쫓겨가 그들 가운데 일부가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게 되는데 흔히 그들을 월지민족으로 본다. 비록 알렉산더에 의해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과 기사 전술을 보급시키고 지배력을 강화해나간다. 그리고 훗날 그 동쪽에서 굴기한 흉노와 이 지역의 패견을 놓고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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