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여성들의 삶 한국사연구총서 98
박주 지음 / 국학자료원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래도 일반 여성들에 비하면 역사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왕실 여성들의 삶에 대한 학술적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소현세자빈이나 정순왕후, 순원왕후 등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데 비해 은언군의 처 송마리아의 순교 내용이나 영조의 딸 화순왕조, 화완옹주 편은 새로운 내용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를 표창까지 하면서 숭상했으면서도 막상 자기 딸이 순절하자 인간적인 고통에 괴로워 하는 영조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들 상계군이 역모 모의에 휩싸여 죽임을 당하고 폐족이 된 후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천주교에 의지하게 된 두 왕실 여성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 고부간의 사연도 애닯다.

인간적 우수를 잊기 위해 천주교에 입문했다고 진술했음에도 전혀 상관도 없는 역적 모의죄를 뒤집어 씌워 남편 은언군까지 죽여 버린 정순왕후의 처사도 너무나 잔인하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들을 얼마나 옭죄었은지, 왜 남인과 여성들이 천주교인이 되어 죽어갔는지 당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인상깊은 구절>

29p

강빈은 뛰어난 경영능력으로 국제무역과 농장 경영을 통하여 큰 재물을 모았고, 이 자금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시켜 농장 일꾼으로 고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경제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경영능력 뿐만 아니라 당시 역관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7p

요컨대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 강씨는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는 동안에 국내의 극도의 반청적 정치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귀국 후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결국 의문의 죽음과 사사를 당하였다. 넓게 보자면 소현세자빈 강씨는 병자호란 패전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비운의 세자빈이었다.

51p

요컨대 정조대에는 왕대비로서 정조의 대를 이을 왕위계승 문제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언교를 하교하며 정치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조와 끊임없이 대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수렴청정을 할 때면 정치적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서라도 친정 집안이 예외없이 득세했다. 남성중심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후계자 임명권과 수렴청정의 권한을 여성에게 주었던 것은 왕위찬탈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언문은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의 의사소통 도구였다. 대비나 중전은 한자를 알고 있을지라도 항상 언문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교서나 교지는 꼭 언문으로 작성하였다.

64p

정순왕후는 친자식이 없는 가운데 계비로서의 지위를 누리기 위하여 자신의 친정 가문의 소속 당파인 노론 벽파를 이용하여 지위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계비로서 단순히 왕을 보필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노론 벽파 등 정치세력을 유지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정순왕후는 영조 정조 연간 정치권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신임의리와 임오의리 문제를 선왕(영조)의 유지라는 명분을 가지고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하였다. 선왕의 유지를 따르는 것은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에게 정치적 명분으로 중요하였다. 그 결과 정조대에 측근으로 활동하였떤 인물들은 의리를 어겼다는 죄목으로 제거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의 인물들이 의리를 지킨 사람으로 다시 등용되어 정국을 주도하며 정국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순왕후는 총명하고 논리적이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정치 감각이 있었고 늘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정조대에는 미약하였으나, 순조대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이 일반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에 발휘되었다면 후세 그녀에 대한 평가가 좀 더 긍정적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리더십은 궁궐안의 정치권력에 한정된 리더십이었다는 것에 큰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78p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여성의 정절과 순종은 더욱 강화되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 가문의식으로 열녀 이념이 더욱 규범화, 경직화 되었던 것이다. 같은 열녀라도 순절은 수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는 순절(자결)의 유형으로 목매어 죽는 경우, 굶어 죽는 경우, 물에 빠져 죽는 경우, 독약을 마시고 죽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서 목매어 죽는 유형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이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영조의 딸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병사하자 너무 슬퍼하여 단식하여 남편을 따라 죽어 합장되었다. 왕실에서는 처음 있는 烈行이었다. 따라서 영조의 슬픔은 그만큼 매우 컸던 것이다.

"내가 왕세제로 책봉되어 세제가 되어 대궐에 들어갈 때에 효장과 네가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 겨울을 견디며 이후로 믿고 의지할 사람은 단지 나뿐이었다. 효장이 먼저 가고 너는 다시 형제가 없는 외로운 몸이 되었다. 임자년에 혼례를 하여 월성위를 사위로 맞이하게 되었고 이 뒤로 내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낙태가 원인이 되어 기운이 더욱 떨어져서 지금까지 온 것만도 의외였다. 월성위가 죽은 뒤에 늘 몸이 약한 네가 지나치게 애통해 하면서 초상을 치룸이 매우 걱정되어 근심이 깊었었다. 어찌 지난 날의 쇠약한 몸으로 도리어 강단지게 칠일동안 먹지않을 것을 생각이나 하겠는가? 자기 생각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가서 음식을 권하기는 하였으나 성의가 모자라서 너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였다. 어느덧 열흘이 지나 장문의 편지로 다시 타일렀다. 내 생각에는 이 정도면 네 마음을 감동시키리라 여겼는데 전혀 동요되지 않고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아! 슬프다. 백발의 늘그막에 네가 절개를 세운 것을 보고 열녀가 있다고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아! 네가 월성위의 유지를 받아 그를 따르려는 뜻이 있다고 해도 백발의 네 아비가 의지하려는 뜻을 생각하고 또한 네 아비가 직접 네 집에 갔던 때를 생각했다면 어찌 한결같은 절개를 지켜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겠는가! 아! 슬프다. 이것인 모두 내가 자애롭지 못한 때문이고, 내가 자애롭지 못하여 초래한 것이니 어찌 너에게 유감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 슬프다. 끝내 어찌 돌아보지 않는가! 아! 멀리 떠나는 길에 후회를 할 수 있겠는가? 후회를 해도 후회가 어찌 미치겠는가? 적막한 야차에서 백발을 돌아보며 그 아비는 반드시 눈물을 삼킬 것이다. 한밤중에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 슬프다. 내게 열녀의 딸이 있으니 어찌 유감이 남아있겠는가? 멀리서 바라보니 눈물이 쏟아진다. 제문을 내가 부르고 쓰게 하여 초상을 주관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반우 뒤에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겠다. 화순옹주여, 화순옹주여, 나의 뜻에 감응하여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고 나의 이 잔을 흠향하기를 바란다. 아! 슬프다. 아! 슬프다."

 위의 제문에서 "아! 슬프다"는 문장이 여섯 차례나 반복되어 나옴으로써 영조는 한달사이에 딸 화순옹주와 사위 김한신의 죽음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슬픔의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기 이전부터 평소에 몸이 병약했음도 알 수 있다.

(아버지 영조의 슬픔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제문이라 가슴이 먹먹하다. 높은 절개와 같은 대의명분은 애닯은 육친의 정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것 같다.)

85p

정조는 고모 화순옹주의 집 마을 어귀에 정문을 세우고 "열녀문"이라 명명하라고 한 후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사람이 제 몸을 버리는 것은 모두 어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그리했을 때는 충신이 되고 자식이 그리했을 때는 효자가 되고 부녀자가 그리했을 때는 열녀가 되는 것이다.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여염의 일반 백성들도 어렵게 여기는데 더구나 제왕의 가문이겠는가? ... 아! 참으로 매섭도다. 옛날 중국 제왕의 가문에도 없었던 일이 우리 가문에서만 있었으니, 동방에 곧은 정조와 믿음이 있는 여인이 있다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요컨대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자 왕녀의 신분으로서 유일하게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을 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자란 슬픔, 오라버니 효장세자의 죽음, 無子, 자신의 병약 등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화순옹주는 사랑하는 남편마저 갑자기 병사하자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다가 끝내 순절하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삶이다. 겨우 두살 때 생모를 잃고 9세 때 하나 뿐인 동기간인 효장세자가 죽었고 자식도 없고 본인은 몸도 약해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남편 뿐이었을텐데 허망하게 가고 나니 세상 천지가 다 막힌 절박함이 들었을 것 같다. 아버지인 영조 입장에서는 어미 없는 첫 딸이 저리 허망하게 죽고 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차마 열녀문을 세워 위로할 수 없었을 것 같고, 한 다리 건너는 조카 정조 입장에서는 여염에서도 하기 힘든 기개높은 헌신적인 행실을 왕가에서 이루었으니 자랑스러워 표창했을 것 같다.)

92p

일찍이 김한신은 화순옹주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자산이 부귀하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옹주는 절대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거처하는 집과 쓰는 물건이 나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왕가의 후예로서 향곡에 몰락한 자로 충의군과 같은 부류는 거술러 올라가면 본래 한 뿌리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뜻이 가슴속에 늘 있은 뒤에야 덕을 쌓는 도가 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152p

신유박해 때 많은 여성들이 참수되거나 유배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예속적 지위에 대한 현실적 불만과 사후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교회 설립 초기부터 많이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163p

송씨와 신씨는 "인간의 우수를 잊지 위해" 입교하였다고 한다. 즉 나인 강경복의 취조에서 송씨와 신씨가 천주교를 믿게 된 동기는 아들과 남편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있을 때, 이를 잊고 영혼을 구원받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추국을 맡은 관리들은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은언군 이인이 그 음모의 주동자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은언군은 실제 천주교를 믿지 않았는데도 그 상소로 인하여 사사되었다.

180p

순원왕후는 헌종대에 또 다른 외척인 풍양 조씨와 협력을 이루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안동 김씨와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인사와 정책으로 정국에 대립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는 순조가 헌종의 보도를 풍양 조씨 조인영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순원왕후는 선왕의 유지에 따라 선대부터 이어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두 가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89p

새로 즉위한 철종은 촌동이나 다름없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자신도 아는 것이 없어 나라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위태롭기 그지 없으니, 재종동생 김흥근이 친동생 김좌근과 함께 힘을 합쳐 나랏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한편 순원왕후는 혜경궁 홍씨의 삼촌 홍인한의 죄명을 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순원왕후는 홍인한이 억울하게 죄를 입었으며 정조도 생전에 홍인한을 단죄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 강조하고 있다. 

(시할머니 혜경궁 홍씨 친정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남편의 사후에도 노력하는 순원왕후의 성품이 인상깊다. 한중록을 읽고 감격한 것인가!)

194p

순원왕후는 김정희가 헌종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중하지 않고 분수에 넘게 행동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성품이 조급하고 재주가 덕보다 뛰어난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순원왕후에게 진종 조천의 문제는 단순히 진종의 위패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한편 순원왕후는 집안에 혼인, 회갑, 과거급제 등의 경사나 상사, 병고, 유배 등의 흉사가 있을 때 가족들에게 편지로 축하를 하거나 위로를 하였다. '육가 육종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를 맞이한 순원왕후는 집안 조카들의 대과 급제라는 경사를 맞이한 기쁨과 더불어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강조하였다.

(개인적으로 보면 순원왕후의 성품은 자상하고 다정다감하며 분수를 잘 지키는 조신한 스타일이었을 것 같다. 원치 않게 남편과, 아들, 손자를 다 앞세우고 정치적 전면에 나서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권력을 휘두르기 보다는 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느낌이다.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말이다)

221p

천주교는 당시 남녀관계와 부부관계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동정녀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스스로 동정을 택했다. 그들은 동정을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머리에 쪽을 올리고 자신을 과부라고 하던가 또는 허가 또는 오가의 아내라고 거짓으로 칭해야 했다. 그리고 남녀가 반드시 혼인하여 자녀를 낳고 기르는데 힘쓰며 효를 행해야만 한다는 성리학적 가족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이들 여성들은 집에서 가출하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여성들끼리만 함께 생활하고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했다. 유교사회에서 동정녀들이 결혼을 거부함은 당시의 가부장적 유교 질서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었다. 천주교도들의 집회가 열리면 신자들간에 남녀유별이나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나란히 앉아 강론을 듣고 첨례나 송경에 참예하였던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기고 남녀가 뒤섞여 집회를 갖거나 내방에 외간 남자를 들이는 것은 당시 유교적인 사회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졌다. 

 조선 후기 동정녀들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와 윤리도덕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지배층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으로부터도 심한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비록 스스로 원하여 자발적으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갔지만 이로 인하여 그들이 기존에 누리고 있던 신분적 특권이나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포기하였던 것이다.

224p

이순이는 천주교를 믿게 된 후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당시 유교적인 관념으로서는 사대부가문의 처녀로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집안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사회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유중철 요한은 향반계급에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도 높은 사대부 가문이었던 이순이와의 결혼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문모 신부의 주선에 대해 과부였던 이순이의 어머니 권씨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곧 동의하였으나 친척들은 유중철의 집안의 격이 너무 낮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자기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부잣집 사위를 얻는 것이 이롭다는 구실을 내세워 친척들을 설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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