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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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책, <산척, 조선의 사냥꾼>과 많이 겹친다

백정에 관한 책을 먼저 내고 그 후에 따로 사냥꾼 편만 모아서 다시 출간한 모양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조선 포수들의 장렬한 전사 장면은 다시 읽어도 감동스럽다.

이런 애국적이고 장렬한 최후가 우리 민족의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동을 받은 적국 군인들의 기록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백정은 후삼국 시대 이래로 거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에 정착한 거란의 후예들과, 원 간섭기 때 정착한 몽골인이 시초라고 한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 유랑 생활을 하는 이들 수렵인들을 농토에 정주시키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사회 최하층민인 백정이라는 별개의 집단으로 남게 된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들 사이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던 걸 보면 신분제가 매우 공고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렵인의 전통을 살려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이나, 도축업자, 갖바치, 유기장, 유랑 재인 등을 하면서 삶을 영위해 갔다.

동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자기들끼리 혼인도 못하게 하고 유랑을 막기 위해 옆 고을로 이동할 때는 관에서 여행허가증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 조금 완화되어 3일 내의 여행은 이장에게 보고만 하면 가능했다는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던 서양 중세 농노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고려가 불교가 국교였던 터라 식육을 금기시 했던 반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에서는 죄책감 없이 쇠고기를 먹게 되자 농사에 쓸 소가 부족해 도살을 금하게 된다.

그런데 고기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고 가죽 제품의 수요도 늘어 밀도살이 성행한다.

저자가 한탄한 바대로 수요가 늘면 소를 많이 키우는 방법을 연구할 일이지, 금령을 강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심지어 나중에는 소를 죽이면 사형당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수요는 더욱 늘고 금령으로 값이 크게 뛰자 관리들까지 끼어들어 밀도살과 판매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재수없이 걸리면 백정은 사형당하지만 그것을 주도한 양반들은 유야무야 넘어갔으니 제대로 정책이 실행됐을 리 없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조선시대 근엄한 성리학자들과는 조금 다르겠으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도 비슷한 맥락 같다.

조선시대의 소 도축 금지는 미국의 금주법을 보는 느낌이다.


<인상깊은 구절>

57p

본래 양인 신분이었던 자가 고려 말 사회적 혼란기에 압량, 투속 등의 방법으로 천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361년 홍건적의 개경 점령 때 호적이 없어지면서 이들의 본래 신분을 판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왕국은 양천 신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양인 신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시켰다. 출신은 양인이면서 특수한 일, 나아가 일반인들이 꺼리는 천한 일을 하는 사람, 즉 신량역천인은 그로 인해 다수가 생겨 나고 있었다. 이들 신량역천인은 일반인들이 천하게 여기던 일을 하고 있어서 천인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113p

농업을 보호해서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조정이 나서서 소 부족사태를 예방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사육을 장려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농상만이 하늘이 부여한 직업, 즉 천직이라 여긴 위정자들에게 요즘 말로 축산업 활성화대책은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해결책은 하나였다. 수요야 어찌되었든 소 도살을 금지하면 그만인 것이다.

147p

무분별한 백정의 동원이 계속되자 끝내 조정 대신들의 비판마저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상소를 올려 이름만 군사훈련일 뿐이며, 그 실상은 사냥놀이판이 되어 버린 실정을 개탄했다. 왕국의 신민에게 귀감이 되어야 할 지존 및 왕족들이 경비마저 지출하지 않으면서 사냥놀이판을 벌였으니 그 수하들이라고 별 다를 게 있었을까?

218p

수요가 있으면 소 사육을 장려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하면 된다. 사육된 소가 늘어나면 굳이 '牛 금령'을 내릴 필요가 없게 되니 범죄도 줄게 된다. 위정자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던 교화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도축 관련 산업도 크게 성장할 수 있으니 신민의 생활여건도 한층 나아질 수 있다. 가령 고기 공급이 늘어나 식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 이러면 저들이 그토록 외친 민본주의도 실현된다. 

 오직 농상만이 천직이라 여긴 위정자들은 소 사육을 장려해서 이런 식의 해법을 모색할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常人들의 가죽신과 긴요하지 않은 피물은 마땅히 금해야 합니다"는 우의정 맹사성의 견해가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정책 입안자들은 잔꾀를 부려 평민의 가죽신 금지령 등 온갖 금지령만 양산하려 했다. 이러니 범죄를 줄이지도 못했고 민생도 개선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본주의는 커녕 교화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가죽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도축업은 성장하고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백정의 도축행위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249p

임꺽정과 그 무리가 장기간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그들을 의적으로 여겨 정보와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백성들이 이들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명종실록>에 따르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의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65p

조선조 500년이 엄격한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이어져 온 일방적 '차별과 멸시'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분이 양반 계급에 속하지 못했던 상민이나 그 아래의 천민들은 좀체 자신의 자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오로지 나라가 뒤집어지고, 조정이 존망을 다투는 화급한 위기에 놓이는 그런 전쟁의 시기만이 유일했다. 신분으로써 모든 것을 강제하려는 조정과 양반계급에게 목숨을 바치는 이른바 '혈세'를 바침으로써 그 바라던 신분상승의 효과를 거두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비, 나아가 그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의 백정에게는 전쟁이 가문을 일으키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270p

"이미 등과한 뒤에 한품서용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전시에 이와 같이 한다면 이들이 싸움에 임하여 누가 힘을 다해 싸우려 하겠는가."

이렇게 한품서용을 둘러싼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법령상, 그리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결론은 선조의 교시가 그 길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선조는 사실상 모든 관직을 허용하며, 만약 한품서용을 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할 자가 없을 것이라 강변했다.

272p

샌즈는 자신의 책에서 두 차례의 양요 때 백정 출신 사냥꾼의 영웅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사냥꾼은 비록 권력자 앞에서 비굴하게 굴었지만 비겁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토록 불충분한 화승총을 들고 팔이 닿을 만큼 호랑이에게 접근하여 쏴 죽이거나 쇠몽둥이로 때려잡는 그들이 비겁자라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호랑이를 때려잡은 직후 그 사람은 권위 앞에 비굴하게 굽실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군은 화승총과 후강포를 가지고 미국 해군과 대적했으며 미군이 총을 쏘아 그들의 옷을 뚫어도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죽었다."

심지어 조선군에게 패배한 프랑스 수병들조차도 조선군을 비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그저 서툰 전사였고 무기가 구식이었을 뿐이었다.

282p

"왜 이 나라가 이토록 황폐한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설명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능한 한 외국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연안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내륙에는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숲을 불살랐고 언덕은 그 정상에 있는 토양이 씻겨내려 오래도록 헐벗겨 있었다."

호랑이로 인한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러 숲에 불을 질렀고, 이런 극약처방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을 정도로,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95p

너무 쉽게 많은 승리로 정신력이 해이해진 프랑스군은 대포도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호랑이 사냥꾼들, 즉 산행포수들의 매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조선의 군인을 우습게보았던 탓도 있었으리라.

299p

강원도 각 고을에 차출된 관포수를 비롯한 지방군의 향포수는 양헌수의 증언대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규율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나아감과 물러섬의 진퇴에 관한 신호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병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로는 뚜렷했다. 비록 기본적인 군율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열에 합류해 싸움에 나섰지만 이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무기를 휴대하고 멀리서 강화로 옮겨 와 서울을 넘보던 '오랑캐'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붓는 데 성공했다. 조선을 정복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었던 프랑스군은 호량이 사냥꾼들에게 일격을 당한 후 강화도에서 서둘러 철수했다.

306p

"광성보를 함락함에 있어서 미군에겐 힘겨운 것이었다. 이곳은 강화의 여러 진 가운데 가장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수비병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더군다가 이 성 안에는 범 사냥꾼이 있었는데, 만약 이들이 적이 두려워서 도망간다면 조선 백성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미국 침략군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였고, 수십 명은 탄화에 맞아 강물 속으로 뒹굴었다. 부상자의 대부분은 해협으로 빠져 익사했다. 그동안 조선 진지로부터 '침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임전태세는 대단히 용감한 것처럼 보였고, 조선 수비병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흉장 위로 상체를 노출시킨 채 항전하고 있었다."

수륙양면의 무자비한 폭격 속에서도 호랑이 사냥꾼을 비롯한 조선 수비대는 제 위치를 사수하려고 처절하게 버텼다. 총을 재차 발사할 기회가 없어 미군 상륙부대와 육탄전으로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할 수밖에 없었다. 틸톤은 그의 아내에게 마지막까지 제 위치를 지키며 죽어 간 조선 수비병의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314p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광성보 전투에서만 조선군 350명이 희생당했다. 미군 전사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랑이 사냥꾼을 포함한 무명의 용사들이 치른 목숨의 대가로, 미군 역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원정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오류>

71p

이후 947년에 태종이 후진을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요로 고쳤으며, 4대 왕인 성종이 982년 즉위와 동시에 나라 이름을 거란으로 바꾸었다.

-> 성종은 6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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