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지음, 안유정 옮김, 홍용진 감수 / 필요한책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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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인데 너무너무 힘들게 읽었다.

예쁜 책표지만 보고 가벼운 중세 전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무려 19세기에 출간된 책이었다.

저자가 1860년생인데 1885년에 이 책이 나왔다고 하니 겨우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쓴 책이고, 옥스퍼드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찾아 보니 1920년에 같은 주제로 좀더 자세하게 쓴 책이 나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중세 전쟁의 개요인 셈이다.

의외로 많은 리뷰가 쓰여 있고 다들 흥미로운 책이라고 한데 비해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됐다.

중세는 특히 내가 약한 시대이기도 하고, 전쟁사는 거의 처음 읽는 분야라 더 그런 듯 하다.

얼마 전에 읽은 <백년전쟁 1337-1453>도 어렵게 읽었는데 다시 재독을 해봐야겠다.

감수자가 전공 학자라 정말 꼼꼼하게 세세하게 주를 달아줘 중세 서양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출판사의 성의가 넘치는 책이다.

그에 비해 번역체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전쟁을 단순히 국가 간 폭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략과 전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봉건제 하에서 중세 전투가 근대 국가의 총력전과 어떻게 다른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병과 기병의 전투 대형 변화, 쇠뇌와 미늘창, 장궁, 파이크라는 장창 등 무기의 변천사 등도 흥미롭게 읽었다.

스위스라고 하면 막연히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에서 양치고 살 것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인데 어떻게 그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의 용맹한 용병이 되었는지, 장창부대의 놀라운 전투력과 정신력에 감탄했다.

수많은 중요 전투들이 예시로 등장하는데 거의 다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라 일일이 찾아 보느라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중세라는 사회 구조에 대해 감을 좀 잡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구절>

25p

고트족은 그들의 튼튼한 창과 좋은 말 덕분에 자신들이 밀집한 로마 군단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트족은 전쟁의 지배자가 되었고, 중세 시대 모든 기사들의 직계 조상이 되었으며, 앞으로 천년 동안 계속될 전장에서의 기병이 가지는 지배적 우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게르만족 지도자들은 단순히 로마 제국에서 주는 직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에 4만 명의 고트족, 그리고 다른 게르만족 기병대가 지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 안에서 군사력을 제공했다. 

(대규모 전쟁의 승리 이후에 게르만족이 보인 이러한 경향은 의아할 수도 있으나 당시 로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 하나였고 전쟁에서 졌어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아직 제대로 된 통일 국가로서 성립하지 못한 게르만족의 한계 또한 작용했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로마를 향한 열망과 인식은 전쟁 후 포이데라티의 형태로 나타난다.)

34p

유스티니아누스 형제의 군대와 그들의 성취는 모든 면에서 진정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거둔 승리들은 스스로 얻은 것이며, 패배들은 대부분 황제의 참담한 정책기인했다. 황제는 지휘권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기를 고집했고 이로 인해 군사적인 복종은 지킬 수 있었지만 군사적 효율성을 잃고 말았다. 게르만의 코미타투스 (종사제) 체제, 그리고 개개의 병사들과 개인적으로 엮인 지도자가 이끄는 전쟁 공동체 체제는 제국의 군대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6세기의 군주들은 직속 사령관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너무 높아져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커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황제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과 불화가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많은 경우 매우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49p

이러한 승리들을 가져다 주고 유럽 대륙을 야만과 북쪽과 동쪽의 이교 문화에 다시 빠져들지 않도록 막아준 힘은 갑옷 입은 기병대였다. 만약 동시대인과 후계자가 이들을 평범한 전사로만 추켜세웠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군사적 효율성에 대한 소구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400년 동안 봉건 기사도가 지속된 역사는 이들이 중세 시대 말까지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들 덕분이었다.

76p

7세기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을 때, 그들이 거둔 승리는 무기가 월등해서도, 조직력의 탁월함 덕분도 아니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광신적인 투지는 무장과 훈련 면에서 더 우월한 군대와도 맞설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새로운 영토에 자리 잡으면서 과거의 폭발적인 투지는 사라졌지만. 이전에 자신들이 무찔렀던 적들에게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는 이 칼리파 군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레온 황제가 저술하기를, 그들은 무장과 전술 면에서 '대부분 로마의 관습을 따랐다.' 그들은 제국의 장군들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창병에 주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83p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기사의 전문성에 기반한 자부심이 풍부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기사도 자체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승리를 거두기 위한 전사의 조건에 용기가 포함되기는 하지만 유일하거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다루지 않았다. 레온은 대규모 전투 없이 진행된 군사 전술을 가장 낭비가 적고 만족스러운 전쟁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는 남자들이 싸움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호전적인 열정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멍청한 야만족의 특성이자 전투 지휘를 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책략과 매복, 그리고 후퇴하는 척하는 방법을 매우 선호했다. 가능한 우위를 접할 수 있는 요소를 우선적으로 확보하지 않은 지휘관은 레온의 가장 큰 멸시 대상이었다. 이와 더불어 오직 상대편 군대의 숫자와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방책으로 軍使 에게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지시를 내리는 일을 지적인 자부심으로 삼았다. 10세기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해했던 것처럼 '전쟁의 기술'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학문적 가치를 지닌 책략이었고 16세기까지 이에 맞설 만한 상대가 없었다.

101p

군사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적인 요령은 비잔티움 군대가 다른 호전적인 이웃들에게 발휘한 지배력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한 우월함의 원천은 이들이 지닌 과학과 규율, 전략과 전술, 전문적이면서도 국가에 속한 군대, 그리고 군사 교육을 받은 상위 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귀족이 단순히 왕에게 아첨하는 역할만 할 때, 외국의 용병들이 이사우리아인 궁병과 아나톨리아인 기병을 대체했을 때, 전통적인 로마의 조직이 단순한 중앙집권화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 아무리 전투 기계를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십자군전쟁이 시작하면서 드러난 서유럽 기사들의 용맹은 무슬림 제국과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달성하지 못한 과업(비잔틴 제국 정복)을 성취하도록 했다.

108p

지휘 체계의 기반은 전문적인 경험보다는 사회적 지위였기에 가장 큰 분견대를 끌고 왔거나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한 자는 본인이야말로 총사령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련한 군인들은 전장에서 겨우 몇 개의 창만을 쥘 뿐, 상관의 지휘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용맹함이 기술과 경험보다 앞설 때, 전술과 전략은 모두 사라진다.

114p

심지어 두 세력이 실제로 근접해 있더라도 전투를 시작하려면 때때로 사령관이 가진 능력보다 더 높은 능력이 필요햇다. 그들이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 모라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적군을 마주하고 강을 건너는 것은 13세기의 사령관에게는 능력치를 아득히 벗어나는 임무였다.

118p

황제의 엄격하고 위엄있는 카리스마로도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보다 약한 통치자들에게는 이러한 과제가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다수의 군주들은 다른 종류의 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사기 면에서 제국의 군대보다는 열등했지만 규율 면에서는 더 다루기 쉬웠다. 바로 12세기 중반 이후부터 용병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고귀한 목표와 용기 같은 가치를 몰랐고 종교와 이웃의 적이었으며 유럽 내에서는 미움 받아 마땅했지만, 군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전쟁이 단순한 변경 침입에 그치지 않고 봉건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긴 시간 지속되는 양상이 되지 그저 봉건 군대에만 기대는 게 불가능해져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병대에게 지급할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의 문제는 늘 명확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각 기사들의 복무 대신 징수한 병역면제세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소작인들 또한 각 기사의 병역면제세를 채워줌으로써 자신은 징병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호전적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수의 용병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전제정은 군주가 거느리는 강력한 세력이 국가에 대한 열망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당시 유럽의 폭군은 고용한 외국인 병사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133p

스위스인은 초기 로마인처럼 강한 애국심을 지니면서도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전투 계획 면에서는 어설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나라 모두 (군사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두 나라 군대 모두 꺾일 줄 모르는 용맹과 고귀한 자기희생의 열정, 그리고 극심한 흉포함, 냉정함, 상대에 대한 무자비함이 뒤섞여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맛본 승리 덕분에 호전적인 자부심을 지녔고, 정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적들에게 이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한 존재였다. 그런데 국가적 이익이 아니라 그저 싸우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에는 살육을 일삼는 그런 잔악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마련이다. 피에 굶주린 로마인들이 전장에서 보인 역겨운 행태는 16세기의 수많은 전장들에서 스위스 용병이 보인 불필요한 잔혹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스위스 연방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정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의 영광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든다고 믿으며 두 번 다시 출정하지 못할 것처럼 싸웠다. 그들은 모두 동족 또는 이웃 사람들로, 각자의 고향 마을이나 출생지를 상징하는 깃발 아래 굳건히 서 있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결집력을 높이기 위한 피곤한 동원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 스위스 사령관들은 모두 동등한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 한 사령관이 다른 사령관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계급보다는 인간적인 힘이 우위에 있어야만 했다.

"자비는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오스트리아군 보병대는 가장 용감한 기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고 스위스 연방군의 잔혹함에 질려버렸다. 이들은 스위스연방군의 무시무시한 무기에 맞아 죽으니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167p

아마 어떤 지휘관이라도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수치스럽게 도망치리라고 처음부터 예상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 그래도 강력한 적을 상대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음에도 극히 정교한 움직임이 필요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샤를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후방으로 빠지는 전략적인 움직임'은 병사들이 정말로 퇴각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병사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한 최대한 피해야 한다. 

 스위스군에게는 거시적인 전략이 전무했다. 일단 적군에 맞서 팔랑크스 대형을 만들어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돌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86p

스위스 군대는 자신들이 군사적 규율에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민주적 집단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스스로를 무적이라 생각하며 헛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명령은 무시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면 상관에 대한 표면적인 복종까지 집어던졌다. 비코카 전투에 앞서 이들은 "지휘관, 연금 수령자, 두 배의 급료를 받는 자들이여 어디에 있는가? 이리 나와서 한 번이라도 돈을 정당하게 벌어보라고 하자. 그자들은 오늘 맨 앞에서 전투를 치러봐야 하리라."라고 외쳤다. 그 오만한 요구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요구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지휘관과 대들은 앞으로 나와서 종대의 맨 앞줄을 구성했다. 이들은 전투 중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선봉대를 지휘했던 운터발덴의 빈켈리트는 창에 맞아 가장 먼저 전사한 지휘관이 되었다. 짐승 같은 괴력과 눈먼 투지만이 유일한 장점인 스위스군은 이제 전쟁의 새로운 흐름을 공부한 과학적인 지휘관들이 이끄는 군대와 맞서야 했다. 한때 유럽에서 숭배되었던 파이크 전술은 이제 너무나 전형화되는 바람에 한물 가버렸고 스위스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병대라는 자랑스러운 지위를 잃게 되었다.

217p

잔 다르크의 공적은 새로운 전술적인 시스템의 도입이 아니라 민중의 열망을 일깨워 잉글랜드가 더 이상 프랑스 영토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음에 있다. 작은 국가가 큰 국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점령당한 국가의 국민이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장악하기가 어렵다. 만약 점령당한 큰 나라의 국민이 나태함을 털고 일어난다면 -상대방의 군사력이 더 우월하다 하더라도- 점령은 불가능해진다. 

 비록 프랑스 영토에서의 잉글랜드군 축출은 군사 전략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게 보이지만, 15세기의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228p

워릭 백작의 전체 업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훌륭한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데 뛰어난 정치적 인물, '그의 시대의 가장 교묘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250p

세르비아와 헝가리군에는 페르시아나 맘루크 군대와 같은 믿음직한 보병대가 없었다. 규율이 잘 잡힌 예니체리군 앞에서 이들은 어설프게 무장한 혼란스러운 무리에 불과했다. 전투가 아무리 예측할 수 없이 흘러도 예니체리는 말뚝 뒤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과연 쓰러지기나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 못한 몇몇 전투에서는 적어도 자신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부대의 명예를 지켰다. 처절했던 앙카라 전투에서는 튀르크군이 도망가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도 버티면서 죽음을 택했다. 이들보다 더 굳건한 부대는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류>

101p

1세기에 유명했던 비네아(vinea)와 투석기 발리스타(balista)는 10세기에도 여전히 명성을 자랑했다.

->발리스타의 철자는 ballista 이다.

112p

시몽 드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나 어머니가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이었던 어머니 쪽 가문을 승계하였으며

-> 역주에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가 아니라 그 아버지 대 시몽 드 몽포르이다.

대 시몽 드 몽포르의 어머니가 3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몬트의 딸 알미시아였고 아들인 대 몽포르가 5대 레스터 백작위를 계승했으며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는 그 아들로, 6대 레스터 백작이다.

234p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전쟁으로 잉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교전 중 전사했으나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이다. 잉글랜드 왕은 헨리 8세였다.

235p

1492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브리타니 공이 전쟁을 벌이자 브리타니 공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적이 있다.

-> 브르타니 공, 즉 프랑수와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1485-88) 중 1488년에 사망했고 딸인 안 드 브르타뉴가 뒤를 이었으나 1491년 샤를 7세가 쳐들어와 강제로 혼인했다. 브르타뉴를 지키기 위해 헨리 7세가 군대를 파병해 1492년에 에타플 조약이 체결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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