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개정판
김봉렬 글, 관조스님 사진 / 안그라픽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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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좋고 글고 간결하고 읽기 편안하다.

보통 저자가 직접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아 이런 종류의 기행문은 사진이 아쉬운데 이 책은 전문 사진 작가에게 따로 의뢰해서인지 절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아주 시원하고 좋다.

다만 큰 사진은 한두 장이고 나머지는 도판들이 작아 아쉽다.

책이 200 페이지 정도로 적은 분량이라 사진을 좀더 큼직하게 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저자가 불교 신자인 듯 한데, 절을 단순히 기행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불교라는 종교적 관점과 사찰을 함께 생각해 글마다 애정이 있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같이 전달하고 있어 유익했다.

특히 불교와 조형예술이라는 마지막 해설이 참 좋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유교는 형이상학적 관념성, 추상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적 조형주의를 추구하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미감을 갖고 있었듯 하다.

화려한 고려 청자가 담박한 조선 백자로 변하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앞서 읽은 "조선왕실 원의 석물"에서도 느낀 바지만 확실히 조선은 조각 측면에서는 수요가 적어서인지 기술적인 면에서 많이 퇴보한 것 같다.

석굴암과 능에 서 있는 석물을 비교해해 보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형미술이 발달한 것도 기독교가 숭배의 대상을 눈으로 보여주는 종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103p

일본의 사찰들에도 내부에 토착적인 신사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초심자들은 불교의 종교적 정체성이 무엇인가 의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만큼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토착 신앙들을 흡수할 수 있었고, 국제적 거대 종교로 성장하면서도 기존 사회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지역의 주도적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도적 종교로 성장한 것은 그 종교가 보편성이 있고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토착화 문제는 포교에 도움이 되나 교리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톨릭이 처음에는 제사 문제와 충돌하지 않고 중국에 선교 사업을 진행했으나 후에 우상숭배로 여겨져 박해를 받았던 것과 비슷한 예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통치 이념을 삼았던 조선시대가 되면, 한국 불교는 극심한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고려시대의 불교적 전통만을 고수한다면, 교단은 물론 개개 사찰마저 사라져 버릴 환경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불교의 포용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서산대사는 선교 합일은 물론, 유불선 삼교의 통합 이론까지 제창했다. 이미 세속의 사상과 풍속이 유교화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유교를 포용하려는 노력을 불교의 변질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는 대승적 목표를 생각한다면 사회와 유리된 불교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서산대사의 삼교합일 노력은 불교 자체의 생존 전략일 뿐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중생 구제라는 불교의 존재 목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107p

흔히 조선 후기는 불교의 쇠락기로 여기기 쉽고, 따라서 이 시기의 불교 건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보잘 것 없다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현존 불교 건축의 95% 이상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후기를 불교 건축의 또 다른 융성기였다. 물론 불교시대인 고려조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계에서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많은 가람과 불전들을 재건했었다. 흔히 조선 후기의 불교는 종파도 교단도 없고, 계통적인 법맥도 찾기 어려운 통불교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만큼 불교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들이 극한적으로 어려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찰 내에는 대중적인 모든 신앙들이 수용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몇 안 되는 인근 신도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사찰의 면모를 지킬 수 있었다. ... 이러한 수탈 속에서 사찰이 살아남는 방법은 조직화된 수도 생활뿐이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가급적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건물들을 방어적으로 지울 수밖에 없었다.

117p

이 지적인 보살은 원래 귀족적 풍모가 강했다. 조선시대에 오면, 불교의 주 신도층을 구성했던 농민들은 지식적인 문수보살보다 대중적인 관세음보살에게 더 큰 의지를 했고, 관세음을 위한 원통전이나 관음전은 지어졌지만, 문수전은 극히 드물었다.

175p

이전의 사찰들에서는 (불국사가 대표적으로) 가람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이제 그 상징화의 범위가 법당 내부로 축소되었다. 그만큼 불교세가 위축되었음을, 그러나 정토에 대한 희구는 본질적인 소망임을 보여준다.

196p

선암사의 승방들이 보존된 것은 스님들의 생활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암사 스님들의 노력과 수행 생활이 없다면 선암사의 그 아름다운 승방들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승방 건축은 왜 아름다운가? 거기에는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과 체계적인 생활과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204p

이 사회적 사상은 불교의 자비 정신으로 승화되었고, 고대 인도의 재편기에 사회적 실세였던 거상들과 부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사회적 이상으로 수용되었다. 이 자비와 평등의 사상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치면서 '대중구원, 사회구원'의 대승불교로 심화되어 소수 지식층의 종교가 아닌 대중 종교로 확대되었다.

207p

사찰의 건축 구성이 복잡하고, 건물의 장식이 화려한 까닭은 조형적 감동을 통해서 종교적 신심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물질과 관념을 엄격히 구분했던 유교적 세계와는 달리, 불교도에게 물질은 곧 관념이고 관념이 곧 물질이다. 존재와 무 사이의 차별이나 물질과 관념 사이의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인식론은, 감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조형 예술을 발전시킨 근원적인 이유가 되었다. 

223p

조선 사찰은 외래 종교 건축으로서의 이국성을 탈피하여, 한국 고유의 성격을 획득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시기의 한국 건축계는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가장 폐쇄적인 시기였다. 그러한 폐쇄성은 역설적으로 한국적 고유성을 형성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그 폐쇄된 세계 안에서 한국 불교의 신앙과 건축은 자생적인 변화를 겪어 하나의 유형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형의 건축적 완성도와 보편적 가치는 별개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류>

89p

지리산 화엄사는 544년 (신라 진흥왕5)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었으나 1979년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발문에 연기가 황룡사 출신의 승려이며 경덕왕인 8세기 무렵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됐다. 그러므로 진흥왕 5년에 연기가 창건했다는 기록은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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