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세의 재발견 - 현대를 비추어 보는 사상과 문화의 거울
박승찬 지음 / 길(도서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어려운 제목과는 달리 분량도 250 페이지 정도로 작고, 중세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평이한 서술로 풀어 써서 쉽게 잘 읽었다.
신학을 전공한 저자의 약력 탓인지 서양 중세 사상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중세는 절대 암흑기가 아니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신학과 철학이 합일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듯 하다.
책 설명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혹시 신문 같은 곳에 연재했던 칼럼 모음은 아닌가 싶다.
전체적인 한 권의 완결성 보다는 한 챕터마다 교훈적인 이야기와 현재의 정치적 이슈를 무리하게 연결짓는 시도를 반복하여 읽기 불편했다.
역사적 평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당대의 시사 문제를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설명하려고 하니 결국은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만다.
이래서 학자와 평론가는 달라야 하는 모양이다.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한 오컴이 사실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계시만으로 신학을 설명하려는 것이었고 그 후에 루터의 종교개혁, 오직 신앙만으로!가 나왔다는 발전 과정이 흥미롭다.
가톨릭은 부패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저자가 가톨릭대 교수라 그런지, 중세 가톨릭 사상사를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설명하는 점이 매우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21세기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폐해가 훨씬 큰 시대이다 보니 신앙와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가톨릭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보다 진보적인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20p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자유인이든 종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남자든 여자든 간에 관계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가르침은 억압받던 많은 이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자신이 선포하던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이 보여준 의연함은 점차 로마 상류층의 여성들을 감화시켰고, 그녀들의 영향을 받은 귀족 남성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가 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핵심층에까지 파고들자, 로마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막아내기 위해서 이론적으로 반박하지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 문명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켈수스는 '그리스도가 사기꾼이고 마술가'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신화는 사도들이 단지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더욱이 사회적으로 가난한 하층민들을 신자로 포섭하는 그리스도교를 경멸했다.
"이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자만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들은 바보와 무식쟁이, 노예와 여자와 어린이들만을 유혹한다."
더욱이 켈수스는 몇몇 그리스도교인들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롱했다.
"몇 사람은 그들이 믿는 것에 관해 해명하려고도 않고 해명을 요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42p
어릴 때부터 주체의식이 강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부정적 체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자신의 학습을 주도해야 하는 주체"라고 인정했다.
212p
이러한 일반적인 도덕의 원리가 구체적인 경우들에 적용될 때 양심이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양심을 통해 개인의 의지가 객관적인 자연법과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이 모든 기준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행동할 수가 없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언제든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습관, 즉 '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덕 있는 습성은 선량한 행위들로써 형성되고 같은 목적을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한다. ... 더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제로 윤리적 판단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 다양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그럴 경우에는 "가장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도 윤리적인 행위라고 위로했다.
223p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사유를 일정한 사고체계의 틀에 담으려 하지 않고, 특정한 종교적 전통과 의식을 뛰어넘어 절대자 신에게 도달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다원론 시대에 더욱 많이 연구되어야 할 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신과 일치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삶과 지식의 일치를 강조했던 동양의 다양한 전통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251p
현대인들은 인간 이성이 중심을 이루었던 근대정신의 강력한 영향 때문에 신앙이란 개인적인 정감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란 인간 이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또는 관계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이런 발상은 사이비 종교들의 범람, 기성 종교 안에서도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만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중세, 특히 스콜라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건 바 있다. ...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오컴은 신앙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어설픈 이성적 논변의 개입을 거부했다. 이것은 루터의 '오직 신앙만으로'라는 주장으로 이어짐으로써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근본적인 신학관의 차이로 남아 있다. 많은 철학자는 오컴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근대를 촉발한 것으로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