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지음 / 이숲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역사적 관점이 나와 무척 일치해서인지 읽는 책마다 너무 공감하고 재밌다.

친일파 논란이 거센 요즘 윤치호라는 인물에 대한 평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전공이 서양사인만큼 저자는 비시 정부 치하의 나치 협력자들과 조선의 대일 협력자를 비교해서 설명한다.

4년과 36년은 너무나 큰 시간차이고 2차 대전 승리에 큰 기여를 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조선의 해방은 연합군에 의해서 가능했고 그 결과 분단이 됐으니 이른바 친일파 처결이니 역사 바로 세우기니 하는 논란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레지스탕스 신화 해체와 주변부의 협력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유럽 학계와는 달리, 여전히 한국은 민족주의 사관에 매몰되어 나아가지 못하는 듯 하다.

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자신을 보기에는 아직도 우리의 내적 역량이 부족한 탓일까 생각해 본다.

윤치호의 일기에도 너무나 리얼하게 나오지만, 자주 독립과 근대화에 성공하기에는 최고 지도자였던 고종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고, 한술 더떠 망국에 일조한 민비를 일제에 맞서 싸운 국모로 추앙하여 뮤지컬로 떠받들여졌으나 요즘은 다시 냉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현실론자였던 윤치호는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느낌이 들 정도니, 20세기 초 조선사회에서는 얼마나 독특한 인물이었을까 싶다.

전통주의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왕조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듯 하다.

당시 시대 분석과 한 인물의 평전이 잘 어울어진, 무엇보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체의 아주 재밌는 책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징병제를 지지했던 행동은 친일파로써 비난받아 마땅할 듯 하다.

그는 호전적 정신을 조선 젊은이들이 징병을 통해 배우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하는데 매우 잘못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던 듯 하다.

망해가는 일본 제국이라는 배에 타고 있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게 아닌가.

만세 운동이나 임시 정부 등이 명분론적 입장에서는 조선 민중의 저항적 의지를 보여 줬을지 몰라도 실제로 독립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 국제 성세를 잘 이용하자는 그의 현실적인 주장에는 많이 공감하지만, 영제국이 인도의 은인이라던가, 징병을 통해 젊은이들이 호전 정신을 길러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 등은 동의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훌륭한 제국 안에 있더라도 결국 차별받는 2등 신민에 불과하고 더군다나 일본은 2차 대전의 전승국인 영국이나 미국도 아니고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인상깊은 구절>

11p

현대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태도를 이른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상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한 결과,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18p

주민의 다수는 현실과 타협해야 했으며,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조선의 경우에도 일제가 이식한 경제질서와 사회적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대중의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일제에 협조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쩔 수 없기에 점령자-지배자들과 거래하였고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리하였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유형을 "중립적 협력자"로 정의하고 그들을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 저항만이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협력은 자립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아예 포기한 행동이었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양측 모두 자립을 목표로 했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저항자는 지배세력을 즉각적으로 제거하거나 파괴하려 했지만, 협력자는 강제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그것을 길들이거나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협력자도 자유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의 '비용'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25p

쿤 데 괴스테르는 한국사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장파 사학자나 구세대 사학자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접근법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며 윤치호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32p

윤치호를 다른 조선인들과 구분하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였다. 동시대 조선의 지식인들도 서구 자유주의에 감명 받았지만 그들 사고의 틀은 여전히 유교적 전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점에서 윤치호는 다른 지식인들과 달랐다. 철저하게 유교적 틀에서 벗어났던 그는 개인을 중시하였으며 자유와 독립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그처럼 유교를 혐오하고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도 자유주의적 가치 때문이었다. 한데 그에게 자유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35p

윤치호는 일본이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국제정세가 제공하는 기회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누구보다도 국제관계의 작동방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조선인들이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보았고, 단순히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혹은 망명정부를 수립한다고 해서, 혹은 변경지역에서 사소한 무력투쟁을 벌인다고 해서 조선에 독립이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윤치호는 현실주의자였다. 유영렬은 현실과 타협했다는 이유로 윤치호를 비난하지만, 현실주의자라는 이유가 비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43p

식민지 지배자로서는 협력자들이 너무 강력해지거나 너무 불만에 차면 이들에 대한 후원을 철회해 다른 집단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로빈슨은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유럽인들의 정복에 더 쉽게 노출된 것은 그 사회의 내적 허약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인들이 식민지 사회를 '분열해서 지배'하려 했다는 주장은 잘못이며, 정확하게 말한다면 종속민들이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통일되지 못했기에 제국적 지배가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p

그것은 카뮈가 협력자들보다 사형을 더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카뮈는 이 세상을 "선과 악, 신도와 이단,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이데올로기적 세력"에 반대하였고, "어떤 이데올로기건 그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인정하고 정당화하고 그것에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협력자에 대한 많은 재판이 1945년 5월 독일의 완전 패망과 더불어 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종의 전쟁 행위였음을 말해 준다. 

'4천만의 저항한 프랑스'라는 신화를 전복시키는 작업은 네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프랑스의 해방에 기여한 저항운동의 역할을 축소하고 연합군의 노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들의 수가 극히 미미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대부분 프랑스인이 뚜렷한 대의를 믿지 않고 단지 승자 편에 섰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프랑스인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것은 대체로 날조된 이야기이며 특히 드골이 그러한 신화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사실 이러한 비판 가운데 어느 것도 새로운 것은 없고 모두 그전에 제기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25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그러한 폭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82p

조선의 해방은 유럽의 해방과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연합군의 상륙에서 전쟁이 종결되기까지 1년의 시일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레지스탕스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조선의 경우,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은 크게 기여한 바가 없었다. 윤치호는 그 상황을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지사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란 점"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한동안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승전군의 통치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대일 협력이 일신상의 영화를 누리겠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 1937년 이후 시기에는 일제에 마지못해 따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으며, 일제는 전쟁 명분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공연한 동조를 강요하였다. 육체적 고통을 당하거나 지하로 잠적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협력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일제치하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식민지배의 현실에 분노를 느꼈지만, 그런 단순한 분노가 자동적으로 모든 조선사람을 민족주의적 애국자로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외국의 지배는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지만, 사회 하층민들에게 그것은 "억압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104p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일생 견지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처럼 절망적이기게 신에게 의지하였다. 윤치호는 내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험한 현세를 살아가기 위하여" 신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우리는 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토로한다. 윤치호는 강한 자가 약자보다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하기에 강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기억할 것은 힘이라고 할 때 윤치호가 상정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진정 중요시한 것은 '호전적 정신'이었다. 윤치호는 개인이나 민족이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호전적이어야 하며, ... 그가 망국에 비애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은 고종 통치기의 극도의 실정에 대한 비판의식에 근거하였다. 1880년대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미국 공사의 통역관이라는 자리에서 왕을 가까이 하였던 윤치호가 조선왕조에 내린 평가는 엄정하였다. ... 러일전쟁 중에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니는데 "존경할 만한 황제"는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궁궐의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이나 하느라고 바쁘다는 것이었다. ...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 왜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나라에 살면서 그렇게 형편없는 진흙으로 된 초가집을 짓고 사는가? 그것은 조선에 온 외국인들도 종종 품은 의문이었다. ... 조선왕조의 교육이 쓸데없는 철학과 도덕에 몰두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으며 당장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실용적인 교육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 아카데믹한 이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죽었을 때 윤치호는 그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지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학술적 이상을 비현실적인 결론으로 이끌기 위하여" 위대한 국가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비극이었다고 한탄한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142p

조선 사람들에게 저주가 된 것은 아무도 정치 외에는 나라에 봉사할 수 없다고 믿는 관습이다. 교회를 메우는 젊은이들은 설교에 정치적 발언이 없으면 들으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너도나도 종교에 정치를 섞는다.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의 기독교인 가운데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조선 사람들에게 정치적 독립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비효율성을 없애고 도덕적 개선을 이루는 일인데도 말이다. ...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 데 있었다. ... 윤치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상태,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 실력양셩론을 비판하며 무력투쟁을 주장한 사람들에 의하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제는 조선이 독립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니 무력을 통하여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윤치호가 볼 때 군사적으로 그처럼 강력한 일제에 맞서는 것은 더욱 허망한 일이었다. ... 민원식이 양근환에게 암살당했을 때, 윤치호는 그와 동의하지 않으면 그뿐이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다며 양근환의 행동을 비판한다. 그에게는 양근환처럼 교육받고 뚝심 있고 용감한 젊은이가 암살자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한탄할 일이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독립이 암살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결코 확보될 수 없다고 믿었다. 윤치호는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그들을 "선동가"라고 부르고 그들이 "산적"같이 행동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모두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면서 막상 독립국가를 감당할 준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윤치호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다스릴 국민도 없으면서 정부 간판을 내건 채" 끊임없이 국내에 있는 조선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비난받을 짓이라고 생각했다. ... 한마디로 이들 "애국자"는 "질 나쁜 강도"들이라는 것이 윤치호의 결론이었다. 해방 후에 쓴 글에서도 윤치호는 소위 "애국지사"들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해방이 된 듯 자만하는 태도에 일침을 놓았다. ... 많은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윤치호는 증오를 통하여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므로 증오는 나쁜 것이라고 훈시하였다. 

162p

윤치호는 소위 '친일파'와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이완용을 멀리하였는데, 훗날 자신이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친일파의 거두로 비난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무덤에서도 놀랄 것이다. ... 윤치호는 민족 정체성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 윤치호는 일본이 모든 것을 일본화하고 획일화하려는 데 반대하였다. 일본이 위대한 제국이 되려면 많은 인종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들을 모든 면에서 똑같이 만들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어리석은 정책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일본제국은 영제국이 아니었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 윤치호의 한계가 있었다.

170p

창씨개명에 동조한 것도 "내 아들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는 일본 지배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처신했지만, 식민시기 내내 일본 당국은 윤치호를 감시하였다. ... 윤치호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 윤치호는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든가 아니면 유럽이나 미국이나 천당으로 옮겨 가든가" 결심해야 한다고 한탄하였다.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184p

윤치호는 영국이 다른 어떤 나라나 마찬가지로 사악하다는 사실에 경악하였으며 인간 본성이 어디서나 똑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 그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우선, 조선에서 그처럼 위세를 부리는 청나라가 서양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전사적 기질의 찬양에서 보듯 그에게는 원래 파시즘에 쏠릴 수 있는 성향이 있었다. ... 그러나 윤치호 자신에게도 일본 민족은 이해하기 대단히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는 그처럼 꽃을 사랑하고 예술적인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205p

이제 서양에서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 강제력에 대한 협조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협력은 복잡한 이슈이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도 당연시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저항하지 않으면 다 협력자"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은 서양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 비록 저항은 점령자를 몰아내는 수단으로서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협력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이 저항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구나 짧은 군사 점령기가 아닌 장기적 식민지기에는 적응과 타협이 더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 윤치호에게 중요한 실체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이었다. 그는 조선 인민이 조금이라도 대접받고 조금이라도 더 잘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려고 평생 고민하였다. 그는 그 방법을 정치적 저항운동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고 육영사업과 YMCA 활동을 통하여 대중의 지적 수준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윤치호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대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윤치호의 현실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안목은 그로 하여름 민족 저항 운동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하였다. ... 그러나 윤치호의 문제점은 일본제국은 영제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가 1930년대 말에 도달한 결론과 달리, 제국주의는 '다 마찬가지'가 아니었다. 윤치호 자신도 인정했듯이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에서나 살아남고 위대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간디가 일본 지배하에 태어났더라면 싹부터 잘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그에게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외에는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210p

그런 식의 비판이 내포한 오류는 민족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윤치호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에게 민족과 국가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고 설사 국가가 사라진다 해도 민족은 보존될 수 있는 개체였다. 윤치호에게도 국가와 분리된 조선 민족의 실체는 분명하였다. 비록 윤치호가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였지만, 그는 분리된 조선 민족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민족이 일본제국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두 민족의 통합에는 반대하였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윤치호에게 국가는 중요성에서 개인을 앞서는 개념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는 개인에게 최상의 충성심을 요구하는 이념이며, 거기서는 어떠한 개인도 민족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당연시하듯이 개인이 민족에 함몰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포악한 정부라도 동족의 정부면 좋다는 절대적인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윤치호에게는 개인의 복리가 국가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였으며 그는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에 거부감을 느꼈다. 윤치호에게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차라리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윤치호는 후일 그런 관대한 통치를 하였다고 믿었던 영제국조차도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제의 통치는 더군다나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한다는 윤치호의 신념은 개인이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 개념에 함몰된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되새길 가치가 있는 식견이었다. ... 그가 좀 더 담대하고 자신에 찬 지도자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히 조선 민족의 불행이었다. 그 자신은 현실주의자로 자처했지만,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자질에 대한 그의 판단은 이상적의적 관점에서 나온,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역사 발전에 대한 그의 믿음은 영국과 같이 점진적 진보를 경험한 선진사회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기에 격동의 시기를 거쳐야 했던 조선 사회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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