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 석학인문강좌 64
김한규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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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인문강좌>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한 분야의 석학들이 평생 연구 주제를 압축하여 대중들에게 높은 수준의 강의를 들려주는 정말 유익한 기획이다.

광고를 좀더 많이 하고 편집 디자인을 산뜻하게 했다면 이런 훌륭한 시리즈가 훨씬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텐데 정말 아쉽다.

저자는 중국사 전공자답게 전통 시대의 한반도를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바라본다.

국수주의나 자국 위주 역사관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눈으로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이 점한 위치와 중국과의 관계를 조망해 보는 매우 의미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했지만 한 권을 읽다 보니 중국사 전체를 심도있게 훑은 느낌이다.

특히 요동사에 대한 고찰이 인상깊다.

저자는 당시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중국이 주변 민족들과 조공-책봉 체제를 통해 호혜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중국의 번국이 됐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집단 안보 체제에 들어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최상층의 문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원 국가와는 기꺼이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자 했고 요동에서 일어난 요, 금, 원, 청 등의 이족 국가와는 관계를 거부하여 침략을 당했다.

요동 국가들은 한족과의 호혜적 관계와는 달리 신속과 많은 세폐를 강제하는 약탈적 관계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민족이 중원을 차지하면 침략을 받았다.

저자는 한국의 강한 문화적 정체성이 중국과는 다른 역사적 공동체를 이루어 오늘날의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은 심지어 자국 내에서는 칭제건원하는 자주성까지 보여준다.

만약 중국식으로 세계화가 됐다면 보편 문명을 뒤쫓던 조선 역시 서양처럼 근대화에 성공해 주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중국도 서세동점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통국가의 멸망으로 19세기를 마치고 말았으니 결국 오랫동안 독립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반도는 20세기에 들어서 줄을 잘못 선 셈이다.

그나마 해방 이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자본주의 노선을 붙잡은 게 다행이라고 할까.


<인상깊은 구절>

113p

조선인들이 '동방예의지국'이라 스스로 자랑한 것은 바로 기자에 의해 중국화한 나라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기자가 조선인에게 가르쳤다는 '예와 의'란 곧 중국의 고유한 전통적 가치와 문화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한국인은 "예의" 즉 중국의 가치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 노력했다. 한국인이 백의를 숭상하는 기풍은 흰옷 착용이 기자 이래의 습속이라는 믿음이 일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 오늘날 한국인들이 서구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아 기자 조선을 자국의 역사 체계에서 철저하게 배제하려 하는 상황에서는 기자 조선의 의미와 위상이 재평가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하겠다.

137p

周人은 商人과 마찬가지로 제사와 점복을 통해 天과 교감했고, 천은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처럼 주인의 생활에 직접 개입하여 일일이 간여했다. 특히 정치에 대한 천의 간섭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상,주혁명'에 대한 개입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주인은 군주인 상왕 주를 죽인 것을 천명으로 이해했다. ... 공자에게도 천과 천명은 여전히 존재하는 실체였다. 그러나 공자는 천이나 신과 같은 비합리적인 존재를 자신의 합리적 논의에세 배제할 것을 선언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인간과 신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위대한 인문학의 전통이 전개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공자의 인문학은 상주 시대의 전통적 문화, 즉 예를 체계화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연구 자료는 그 이전에 존재해 온 고문헌들, 예컨대 <시>와 <서>. <예> <악> <역>과 같은 것이었다. 공자는 이러한 고문헌을 정리하여 체계화하고 그 결과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의 교육 목적은 이상적 '군자'를 양성하는 것, 즉 '내성외왕'이란 이상적 인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맹의 사상이 긴 생명을 잃지 않은 것은 그들이 설파한 가치가 곧 동아시아인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47p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해 온 이웃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중국은 이미 선진 시대부터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나 탈신분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상앙의 변법이 수행한 역할은 가히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5p

진시황이 마지막 순수의 과정에서 당한 객사는 제국의 모든 권력을 직접 장악하여 행사하려 한 과로의 결과였고 제국의 급속한 부오기와 전면적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6p

'위만=조선인'설의 한 가지 논거는 위만이 요동을 경유하여 왔는데, 당시 요동은 조선인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위만이 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요동은 이미 연국에 의해 점유된 지 2백여 년이 지난 뒤여서, 그가 연(지금의 북영 일원)에서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위만인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 <사기> 등 사서의 도처에서 이때 연, 제, 조 등 중국 동북의 거주민 수만 명이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 방면으로 '유망'했음을 기술하고 있으니, 위만은 이들 유망민을 대표할 뿐, 그가 중국인인지 조선인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오직 '민족' 개념을 우선시하는 현대 한국인의 관점일 뿐이다.

187p

특히 선거제의 확장을 통해 문학지사들이 대거 관료 조직의 상층부로 진입하는 상황에서 임협지사의 개절은 자연스러운 추세를 이루어,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관료 제도에서 문관 위주의 특징적인 측면을 형성했다.

190p

그러나 무제 치세기의 대부분 기간에 지속된 흉노에 대한 군사적 공세는 흉노의 항복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재정적 소모와 국력의 낭비를 가져와서 한 국가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다. ... 부호들의 호응이 부족하자 고민령을 발포하여 재산의 신고를 의무화하고 감춘 재산을 고발하는 자에게 포상하여 수많은 부호를 파산하게 했다. ... 실제로 무제 시대에 모색된 제국 체제의 확립을 위한 각 방면의 정책들은 대부분 유가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법가적이었으니, 무제 시기의 '견지법' 실행은 이 시기의 중국이 법가적 분위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실 한 고조 유방이 관중에 들어가서 '약업삼장' 했다고 선전되었지만, 실제로 한 제국이 '삼장으로 축약한 법'에 의해 통치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국가는 언제나 전국 시대부터 축적되어 온 방대한 규모의 율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근래에 선진 시대 진국의 어느 법리의 무덤에서 발견된 운몽진간은 중국의 법률 체계가 이미 선진 시대부터 얼마나 고도한 수준으로 발달되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다만 한대의 중국인들은 법치의 진 제국이 단명으로 끝나는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에 유술로써 법치를 적절하게 포장하여 융통성 있는 제 3의 이념 체계를 창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을 뿐이다.

214p

왕망 시대의 중국인들이 고대 중국인의 꿈이었던 정전제의 실현을 선언하고 중국과 이적의 수직적 관계를 선포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도발이었다. 왕망은 아마도 심리역사학적 접근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연구 과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극단적인 이상주의적 사고와 행태는 복고적 제도의 제정에 대한 집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18p

장제 시기에 반초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하여 아무런 국가적 지원과 명령 없이 홀로 남로와 북로의 서역 제국을 모두 제압하고 흉노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여, 한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서역과의 제도적 관계를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서역과 한의 관계가 변화무쌍했던 것은 서역의 존재의미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흉노 등 북방 유목민과 장성 이남의 남방 농경민 사이의 역학적 관계에 의해 이용되었기 때문이니, 이러한 서역의 존재의미는 전통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222p

요동의 변군은 형식만 군현의 형식을 취했을 뿐, 실제로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城의 형태로 존재하는 군진과 다름없었다.

225p

환관은 주로 극빈한 소농민의 자제 출신이 많아, 교육을 받지 못해 탐욕의 인간적 본성을 절제하거나 포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한대에는 황제의 직접, 개별적 인민 지배를 위해 집단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에, 黨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 일 자체가 배척되고 규탄되어야 할 범법 행위로 간주되었다.

237p

인간과 인간 관계를 다루는 사회학이라 할 유학의 종사자들이 초자연적 세계를 광범하게 논의하고,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결했다는 사실은 전한 말 후한 초라는 특수한 시기에 유학이라는 학문이 유교라는 종교로 이행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46p

청담을 집대성한 유송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현학에 대한 고담준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인물에 관한 평가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청담'이 문자 그대로 세속을 초탈한 깨끗한 담론이라기보다는 향품을 정하는 자료를 제공하여 명사를 만들어 내고 청의를 형성하여 여론을 장악하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흔히 청담과 관련하여 이른바 '죽림칠현'을 거론하지만, 죽림칠현으로 지목된 완적 등 일곱 명의 인사는 모두 당대 최고급 청류 출신의 명사로서 7인 모두 <진서> 열전에 입전될 정도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따로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청담이란 '깨끗한 담론'이라기보다는 '청류의 담론'이었다. 청담에서 흔히 논의된 현학의 명리승부와 인물 평가는 모두 명사를 배출하여 청류의 家格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251p

북위의 부병제는 원래 전투와 생활이 일치되었던 선비의 부락 조직에 기원을 둔 제도였으나, 이후 농업사회에 정착하면서 점차 병농일치의 중국적 제도로 발전하여, 균전을 지급받은 정남이 그 반대급부로 일정한 기간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272p

하안이나 왕필 등 현학으로 이름난 명사들, 심지어는 완적 등 청담으로 유명한 죽림칠현과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저명한 청담가들조차도 모두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다만 이들은 한대 유학의 형식주의적, 신비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형이상학에 논리적으로 접근한 <도덕경>이나 <장자> 등을 연구하여 유학을 보완하려 했을 뿐, 유교가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리로서 작동되어야 함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유교의 경전은 여전히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는 성전으로 간주되었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국가와 사회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다. 청류의 담론인 청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전히 유교적 예절이었고, 청의에 의해 배척되거나 비난받은 행위는 주로 유교적 예절에 어긋난 행위였다.

286p

수와 당이 이토록 집요하게 국운을 걸고 고우려를 여러 차례 침공한 까닭은 하국의 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국제 사회를 구성하여 중국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 한국사에서는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그 수도인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퇴각한 것처럼 서술되었다. 그러나 실제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퇴각한 가장 큰 이유는 토욕혼을 사이에 두고 토번과 당이 벌인 대비천 전쟁에 안동도호부를 지키던 당군이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 사실상 도호부의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안동도호부는 유명무실 그 자체였으니, 안동도호부의 명목상 관할 지역 안에 신라와 발해라는 독립 국가들이 엄연히 존속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 두 인적국을 패망시킨 뒤에 신라는 그 고지를 당과 무력으로 다투었지만, 발해가 중국의 산동과 요서를 침공했을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대가로 732년에 당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공인했다. 이 사건에는 신라가 당과 국경선으로 구별되는 독립 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을 뿐만 아니라 삼한의 고지를 모두 정치적으로 통일했음을 확인한 획기적 의미가 있다. 한국은 이때부터 비로소 하나의 국가에 의해 통일적으로 통치되는 역사공동체가 되었으며, 통일 한국은 이후 고려와 조선 등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전근대 시대 내내 중국 국가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가장 중요한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307p

다만 정치적 자립도나 자주성에 있어서는 베트남이 한국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갔으니, 베트남은 한국과 달리 자국에서는 제국을 자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송과 명, 몽원, 프랑스,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등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들이 침략할 때마다 완강하게 저항하여 물리쳤다. 베트남인의 높은 자긍심의 바탕이 되는 이처럼 독특한 역사적 경험은 10세기 베트남의 독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311p

책봉-조공 관계란 운명을 함께하는 국제 사회의 중심 국가인 중국과 주변 국가인 四國이 서로의 국제적 위상을 승인하는 호혜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부터 중국을 지배한 통합 국가들은 주변 국가들에게 책봉-조공 관계를 강제하여 책봉을 신속의 수단으로 삼고 조공을 약탈의 방법으로 이용했으니, 쌍방적이고 호혜적인 책봉-조공 관계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관계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314p

그러나 고려는 번번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니, 거란의 침략을 비롯해서 여진의 침략이 잇따랐고, 그 뒤에는 몽골의 내침까지 당해야 했다. 이처럼 고려가 잦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까닭은 요동에서 일어난 통합 국가의 본성 때문이다. 거란과 여진은 요동을 통일하고 중국으로 진출하기 전에 먼저 한국을 침략했는데, 그 까닭은 중국과 한국의 밀접한 정치, 군사적 관계를 소멸시켜 '후고의 화', 즉 뒤돌아봐야 하는 걱정거리를 예방하려는 조처였다. 이는 뒤에 몽골의 고려 침략과 만주의 조선 침입에서도 되풀이되었다. 

318p

명조를 세운 주원장은 빈농 출신으로 처음에는 홍건 농민 반란군에 참여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토호, 지주 집단의 무장 병력과 민병 조직을 지휘했고, 1368년에 남경에서 명조를 건립한 뒤에는 지주 계급을 대거 포섭했다. 또한 그는 농민 반란군의 지도 이념인 백련교와 결별하고 정통적 체제 이념인 유교를 수용하고 儒士를 대거 등용하여 士庶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농민이 피지배층으로서의 분수를 알고 지킬 것을 강요했다.

321p

요, 금, 원 등은 조선 등 외국에 대해 책봉-조공 관계의 형식을 빌려 '신속'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조공의 형식으로 물자를 약탈했지만, 명은 조선 등을 기미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호혜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 事大字小 관계를 실현하려 했다. ... 임진왜란 때 명군이 '항왜원조'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에 출병한 명분은 바로 사대-자소에 있었다. 조선이 그동안 예로써 명을 섬겼기 때문에, 이제 대국인 명이 약소국인 조선을 왜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71p

티베트는 국제연합에 호소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국을 자극할 수 없었던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이를 외면했다. 고립무원의 티베트는 결국 인민해방군의 라싸 진군을 저지할 수 없었고, 14세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379p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축출되면서 대륙의 최고급 문화재를 대량으로 가져가서 대북의 고궁 박물관에 쌓아 두었는데, 이제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재조차 닥치는 대로 파괴되었으니, 역사에 대한 이처럼 잔혹한 테러 행위를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티베트인의 불행은 단순히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했다는 데 있지 않고, 티베트가 중국과는 정치 체제와 사회질서, 문화 양식이 전혀 다른 별개의 역사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의 동화를 강요받았다는 데 있었다. 정교일치의 오랜 전통이 강제 폐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유물론에 의해 티베트인의 신앙이 치명적으로 탄압되었다. 그 단적인 증거가 바로 문화 대혁명이다. 문화 대혁명은 중국의 권력 투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티베트가 중국의 일개 자치구로 편입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불똥이 티베트 고원에까지 튀어서 8쳔여 불교 사찰이 대부분 파괴되고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는 등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386p

오랫동안 독자적인 역사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과의 일체감은 매우 희소했다. 국민당 정권도 정복자와 같은 자세로 타이완인을 대했으니, 이는 타이완인들이 저항한다고 해서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2만여 명이나 학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 지향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형성하여, 그 역사공동체를 지켜나가는 데 근원적 힘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전통시대를 마감하게 된 서세동점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한국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국가를 상실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은 36년간의 세월은 한국인의 삶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변화를 강제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해방'과 '독립'이라는 선물을 받은 직후에 만난 '한국 전쟁'이 한국인에게 안겨 준 충격에 비한다면 '한일합방'은 아주 약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잃은 인명과 재산도 적지 않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잃은 2백여만 명의 인명과 전 국토의 초토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류>

188p

무제는 자신의 능묘인 두릉을 지키게 함으로써~

->무제의 능은 무릉이고, 두릉은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의 능이다.

209p

왕망의 고모 왕태후는 성제의 부인으로

->왕태후는 원제의 부인으로 성제의 어머니다. 성제의 부인은 유명한 조비연이다.

313p

남송을 세운 고종과 그 측근은 정치적 이유로 휘종과 고종의 송환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원치 않았다.

387p

한국이 기원전 3세기에 중국 한의 침략을 받아 군현이 설치됨으로써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으니 기원전 3세기가 아니라 2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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