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의 집 - 천재 작곡가 20인, 그들의 삶 속으로 떠나는 여행 이상의 도서관 50
양기승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제목도 명료하면서도 인상적이라 마음에 드는데, 내용도 알차다.

스무 명의 작곡가들 생가를 찾아가는 내용의 칼럼 연재물이라 수박 겉핥기 식의 지루한 나열일까 봐 걱정했다.

저자가 작곡을 전공한 분이라 그런지 내용이 깊이 있고 문장에 위트가 있어서 에세이 읽는 즐거움이 있다.

한 작곡가의 생애를 짧은 분량에 잘 녹여내고 특징적인 부분들을 어필해서 머리에 확 들어온다.

다소 미화적인 느낌도 없지는 않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천재 예술가들이었으니 경외하는 마음은 당연히 들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다.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멘델스존처럼 부유한 음악가도 있었지만, 드보르작이나 베르디처럼 소위 말하는 하층민 계층의 입지전적인 음악가도 있다.

(전에 읽었던 베르디 평전에 따르면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베르디의 집안은 중농 정도는 됐다고 한다)

모차르트나 리스트처럼 아버지가 극성스럽게 아들을 닦달하면서 교육시킨 경우는 그나마 복있는 케이스 같다.

스무 명의 작곡가들의 일생이 나같은 이름없는 대중과는 다른 위대한 예술가라 그런지 특별히 극적인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상 깊은 구절>

18p

시종으로서의 음악가. 모차르트만 해도 그것이 싫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하이든은 그럴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하이든은 수많은 시민의 요구 대신 한 명의 영주만 만족시키면 그만이었고, 나머지는 그의 자유였다.

26p

나이 든 스승의 장기 여행에 대해 모차르트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다음 해, 오히려 하이든은 여행 도중 자신을 염려하던 젊은 모차르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38p

작곡가 베버의 사촌이기도 했던 콘스탄체는 노래와 피아노에 능숙했고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초연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가계와 병약한 천재를 함께 돌보느라 지쳐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안정된 직업을 가진 덴마크 외교관과 재혼해 장수를 누린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시샘할 수 없을 것이다. ... 콘스탄체는 성공적인 재혼을 했고 모차르트의 두 아들 토마스와 볼프강 역시 니센의 도움에 힘입어 훌륭하게 교육하고 성장시켰다. 부유한 말년을 보냈고 언니 알로이지아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여 여생을 함께 했다. 그리고 레오폴트를 비롯한 모차르트 가족의 묘역을 이렇게 단아하게 마련하는 게 크게 기여했다.

40p

아버지 레오폴트는 후임 후작 주교 콜로레도에게 서유럽 연주여행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23세 아들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 복직시켜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결국 부자가 해임과 파면을 당했던 그 영욕의 세월을 성당 앞의 성모상은 알고 계시는지 궁금했다.

43p

모차르트의 평생 매니저였던 아버지가 온 유럽의 후원자들에게 밤마다 연주회 청탁 편지를 작성했던 곳에는 그의 안타까운 부정이 구석마다 서려 있었다. 그 방들을 거닐다보니 천재와 아버지를 잇는 고리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49p

제일 먼저 거론된 살해 혐의자는 살리에리였다. 한때는 언론까지 합세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당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경쟁이 되지 않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대작곡가였다.

64p

그에게 좋은 환경이란 외향적 모습만이 아닌 자신의 절대자유가 보장된 그러한 공간이었다. 인류의 온 세기를 초월해 대악성이 될 베토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상적인 작업실 하나 마련할 돈도, 기회도 마지막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79p

테레제의 가족 역시 슈베르트에게 호감을 지닌 터여서 사실상 경제적 여건만 갖춰진다면 언제고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발전되었다. 그러나 평생 슈베르트를 따라다닌 가난이 이들의 앞날을 막았다. 5년여 뒤 슈베르트가 헝가리 백작의 가정교사 자리를 수락하며 테레제에게 청혼을 결심할 무렵, 슈베르트는 그녀로부터 청첩장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피로연 연회장 피아노에 앉아 그의 <피아노소나타 a단조>D537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105p

요약해서 말하면 멘델스존은 부유한 가정의 천재로 세상에 태어난 셈이었다. 물론 작곡가로서 자신과 벌이는 투쟁, 즉 타고난 재능과의 갈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수많은 예술가가 겪어야 했고 넘어야 할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의식주에 관한 고통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일평생 서로만을 사랑했던 여자를 아내로 맞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입김이 스쳐가듯 가볍게 받아들인 행운의 예술가, 멘델스존. ...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천재적인 아들을 높은 교양을 지닌 사업가로 키울 생각이었다. ... 당시 사회적으로 괴테는 무조건적인 신앙과 같은 대상이었다. 적어도 예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괴테를 알현하지 않는다는 것, 그에게 선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늘 논쟁의 대상이었던 문제의 바그너에 대해서도 그는 선배로서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 그는 결혼과 여자 문제에 관한 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사무적이었다. 그에게 결혼은 나이가 찼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에 신부감을 찾아 나선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창작에 전념했다'는 스토리 못지않게 또다른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 '부러울 것 없는 삶 속에서도 숙명처럼 창작과 연주에 일생을 바쳤다'는 얘기가 아닐까.

141p

아홉 살의 첫 공개 연주회부터 시작된 연이은 성공은 아버지의 집념의 결과였다. 빈으로 이주한 것도, 피아니스트 체르니와 작곡가 살리에리와의 만남도 아버지 덕분에 성사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습 일정도 결코 만만하게 짜지 않았다. 매일매일 고정된 스케쥴 외에도 연습이 끝나면 필수적으로 바흐의 푸가 6곡과 그것들을 즉석에서 이조해 연주하도록 아들에게 강요했다. 리스트가 후일 수백 곡의 기성 작곡가 작품을 즉석에서 편곡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도 결국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다. ... 사실 바그너는 리스트의 작품을 인정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에 상관없이 리스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탄호이저> <로엔그린>을 세상에 알리느라 분주했다. 또한 '베를리오즈 주간'을 바이마르에 만들만큼 미래 지향적 연주회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 그러나 리스트의 견해는 달랐다. 바그너와의 인간관계와는 상관없이 언젠가 그의 작품이 온 세상에 통용되는 날이 오리라 굳게 믿고 있었고 그 선봉 역할을 끝내 자청했다.

165p

어린 나이부터 다섯 명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술집을 전전하며 연주해야 했던 브람스가 세기적인 대작곡가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저변에는 타고난 재능과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슈만과의 해후라는 엄청난 행운이 깔려 있었다. ... 만약 그에게 이런 행운이 없었다면 브람스는 재주 많은 반주자 아니면 시골 소그룹 합창 지도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앞서 얘기한 대로 브람스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었기에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177p

베르디의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는 문맹이었다. 여느 음악가들처럼 화려한 음악적 계보도 없고 그렇다고 아들을 음악가로 키워 돈이나 명예를 얻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벽촌의 필부에 불과했는데 기이한 일이 아닌가. 어떻게 그 아래서 세계적 오페라의 제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음악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여리고 여렸던, 선함으로 덩어리진 삶을 살게 했을까. 끝내 대표작 하나 없노라, 라며 겸허로 일관했던 베르디를 낳은 동네, 론콜레에는 그칠 줄 모르는 안개비가 계속 내렸다.

234p

베를린,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로마로 돌아다니느라 빈 오페라좌를 너무 많이 비운다는 것이 공적인 해임 사유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작곡가 말러에게 예정된 길이었다. 그는 지휘와 작곡을 함께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나아가 정열 넘치는 예술사회의 리더이고 싶었다. ... 젋은 시절부터 유독 건강에 자신이 없었던 말러는 모든 일과를 규칙에 따랐다. ... 그녀의 천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알마는 그 모든 것을 그의 작품으로 보상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61p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 평소에 늘 더 많은 것들을 네 스스로가 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드보르자크가 54세 때인 1895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드보르자크는 먼저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그는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적 환경과는 거리가 너무 먼, 그래서 음악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집안의 가업은 정육점이었다. ... 드보르자크에게는 늘 소원이 있었다. 작곡가가 되기 전, 마을 술집을 전전하는 고달픈 악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소원을 지니고 살았다. ... 언젠가는 그 자신이 슈베르트가 되리라는 무서운 욕구를 품고 살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을 작품을 통해 실현하고픈 헌신에 가까운 바람을 일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 그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던 프라하 국립극장 비올라 주자 자리까지 던져버렸다. 드보르자크는 다시 가난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은 오직 작곡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작은 소망 한 가지도 들어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프라하 오르간 학교를 졸업하고도 끝내 전업 오르가니스트가 되지 못한 그는, 아버지 프란티제크의 기준대로라면 결국 쓸모없는 음악가가 되고 말았다.

317p

바르토크의 연구가 헝가리 음악사에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가정 형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레슨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 바르토크는 첫부인과 이혼하고 곧바로 재혼을 했다. 사실 바르토크는 쫓기듯 무엇인가를 찾고 도전하는 이상주의자였던 반면 그의 첫부인은 순종으로 일관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순종만으로는 천재의 부인 역할을 담당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 바르토크가 세상을 하직하던 날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 미국 국민이 가장 큰 애도를 보냈다던가. 그의 조국 헝가리를 물론 유럽 어떤 나라에서도 떠나는 그를 애석해하는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330p

천성적으로 쇤베르크는 비평에 무덤덤했다. 평생 동안 자신과 작품에 대한 구설수며 평론에 관해,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인내심으로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357p

완벽한 음악, 정결한 음악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그의 작품들을 그러나 상당 부분 가난과 역경 속에서 생산해낸 것들이었고 실제로 존재하기 힘들 만큼의 의지와 노력의 결정체였다. ... 바흐의 적성대로라면 교사보다는 악장을, 지휘보다는 오르가니스트를 훨씬 선호했겠지만 그는 주어진 직분을 천직으로 알며 그 모든 갈등을 끝까지 참고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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