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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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란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란 궁금증을 가졌었다.  

얼마나 다양한 삶의 경험을 했기에, 특정한 나라, 특정한 역사를 공유한 누군가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 어디선가 숨쉬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이토록 다채롭게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짧은 단편이나 중편이 주는 강렬한 이야기에 비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소설 [자기 앞의 생]은 또 얼마나 따뜻한 느낌인가?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스타일로 글을 쓰는 게 가능할까? 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세워 소설을 발표했을까? 왜 자살했을까? 등등   

로맹 가리의 일생을 담담히 읊어주는 이 책을 보자마자 저절로 손이 갔던 이유는 아마도 그런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사진을 넘기면서,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운 그의 두 아내, 레이첼과 진과 함께하는 잘생긴 그의 모습을 보면서.. 글쎄, 뭐랄까? 막연하게 내가 생각해 오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놀라웠다.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한 그는 약간의  사회 부적응자, 이방인, 혹은 예민한 신경증 환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의 그는 사교성도 강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고, 미국 주재 프랑스 영사로 오랫동안 활동할 만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설가로서의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란 작품으로 일찌감치 콩쿠르 상을 수상한 이후로 로맹 가리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님에도 너무 일찍 대가 취급을 받게 되었고 그런 세간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거장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이야기만을 줄창 써 대는 판에 박힌 소설가, 그래서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꾼이라는 평단의 평가가 그에게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을 상상해 내듯, 전혀 새로운 인물 에밀 아자르라는 분신을 창조해 낸다. 혜성처럼 등단해 그해의 콩쿠르 작을 수상하면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베일에 쌓인 신비한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치밀하게 그는 모든 준비한다. 에밀 아자르라는 재능 있는 신진 작가를 찾고자 하는 추적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자신의 조카에게 에밀 아자르역을 하도록 연출까지 한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을 즐기는 그의 모습!  로맹 가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소설을 계속 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물론 동일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의 색깔이 다른 탓도 있었지만, 에밀 아자르로 분한 로맹 가리의 조카가 스스로도 자신이 작품을 썼다고 믿을 만큼 배역에 몰두한 영향도 컸을 것이다. 

 로맹가리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삶 자체를 소설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삶은 권총 자살로 마감되었다. 더이상 쓰고 싶은 게 없고 더이상 이룰 것이 없기에 더  삶을 연장하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소설가!  그가 죽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로맹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임을 알았으니까, 로맹 가리의 삶은 놀라운 반전으로 마감되는 놀라운 작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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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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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르다 보면 생전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도  왠지 그 이름이 아주 친숙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저자 헤르타 뮐러의 이름도 그랬다. 그의 작품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왠지 구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저자 소개에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아마도 어느 해 인가, 신문 지상에서 오르내리는 그녀의 이름을 어디선가 접했거나, 축하 선물처럼 서점가에 깔렸던 그녀의 책들을 보았던 모양이다. 친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남들은 모르는 예쁜 구석을 쉽게 찾아내는  것처럼 익숙한 것이 주는 매력은 상당한 듯 싶다.  서가에 진열된 여러 책들 중에서 이책을 골라낸 이유라면 아마 그 익숙함 때문이었을 거다.   

책의 첫부분은 소설이 아니라, 무슨 현대 시 마냥 난해했다. 단어들이 일상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비유와 상징일 것 같기는 한데 도통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한 구절 한 구절 읽기가 좀 버거웠다. 

책의 내용은 어떻게 말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 된 나라 루마니아의 한 여대생 기숙사에서 평소 품행이 방탕했던 한 여학생이 목을 매 자살한다. 평소 그녀를 꺼려하던 나는 그녀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 독재자 치하의 현실에 눈뜨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세명의 남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 바깥 세상에서 보내온 정보에 눈뜨고,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나와 나의 친구들은 볼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되어 체포되어 심문 받거나, 감시당하는 생활이 일상화된다. 방을 수시로 뒤지고, 편지를 몰래 뜯어보고, 고향집까지 뒤지며 독재 정권의 끄나풀들은 무언가 이들을 옭아맬 불온 서적이나 서류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들은 용케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계속되는 감시, 억눌려진 분노와 언제든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나와 친구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져간다. 가족과 친구 조차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숨 막히는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가족과 독일로 망명한다.   

공산 독재 정권 치하의 숨막히는 체제? 명확하게 같은 것은 아니겠지먄,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혹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거나, 불온 사상의 소유자란 딱지가 붙여져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시절이..  그래서인지 책 속 이야기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책의 제목이 책 내용의 대부분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제목은 잘 지어진 걸까, 잘못 지어진 걸까? 제목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준다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어떤 느낌 혹은 어떤 주제를 떠올리게 되고 그게 책 읽는 재미나 호기심을 반감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 반면에 책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을 잘 포착해서 붙인 제목이 몸에 착 감기는 옷처럼 맞어 떨어져서 작가의 통찰에 경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어느 쪽이라고 해야 될까? 
 

마음짐승이라는 책 제목처럼, 모든 인간들 마음에는 짐승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부당한 일, 혹은 옳지 않은 일임에도 침묵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도 죄의식을 갖기 보다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는 짐승 같은 무엇인가가 내면에 깃들어져 있다. 그렇기에, 지금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무수한 잔인한 일들이 인류 역사를 통해 자행되어 왔을 거다. 또 현재도 도처에서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하면서 치를 떨만한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거고.  

책을 다 덮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아마 내 속에도 깃들어 있을 그 놈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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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1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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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얼핏 본 영화, [제인 오스틴 북클럽]에서 이 책의 주인공 패니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인물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공감하기 힘들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제인 오스틴은 참 매력적인 작가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맛깔나게 쓸 수 있을까? 사실 평가절하하자면 그녀의 소설들은 대부분 영국 지주 계층 젊은 남녀의 짝짓기에 얽힌 소동들이지만, 그 안에 인간에 대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고 어쩌면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고방식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 사실적으로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작품 맨스필드 파크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돈 많은 이모부의 집에서 자라난 패니 프라이스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니까. 가난하고 부모 밑에서 많은 형제들과 함께 자라나던 패니는 작은 이모의 위선적인 호의로 이모부인 버트램 남작의 영지 맨스필드 파크에서 성장하게 된다. 원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패니에게는 낯선 이모부집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이모부는 너무 어려웠고, 큰 이모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으며, 작은 이모는 은근히 패니를 멸시했고 에드먼드를 제외한 다른 사촌들은 패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직 에드먼드만이 위축되어 있는 어린 패니를 다정하게 위로해주었고 여러 가지로 패니의 상황을 배려해 주었다. 무엇보다, 에드먼드는 패니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녀의 길잡이 역할을 해 주는 등,  어떤 면에서는 패니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자연스럽게 패니에게는 에드먼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자라났고 결국은 둘은 아름다운 한 쌍으로 맺어지게 된다. 

패니와 비교되는 인물로 거론되는 존재는 패니의 두 사촌 언니 마리아와 줄리아, 그리고 이웃집의 메리로 이들은 얼굴은 아름답지만, 그에 걸맞는 덕성을 갖추지 못한 가벼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저 경제력이라는 외적 조건만으로 결혼한 뒤, 잘생긴 청년 헨리의 유혹에 금새 넘어가 부도덕한 관계를 맺어 집안의 수치가 된 마리아, 헨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쉽게 포기하고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며 놀기 좋아하는 줄리아, 에드먼드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을 꺽으려 하고, 주변 사람에 대해 배려 없는 말을 늘어놓아 에드먼드를 실망시키고, 물려 받을 것이 별로 없는 에드먼드를 포기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패니를 도와주는 어리석은 메리! 뭐 이런 식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왜 이런 내용에 약간의 반감이 섞이게 되는 걸까? 

책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패니의 덕성이란 것이 그다지 현실성있게 다가오지 않아서였을까? 패니는 남의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아준 이모부 가족에 대해 사랑을 간직하고 있고, 사람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고.. 흔들림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현대적인 인물이라는데, 글쎄.. 난 솔직하게.. 자기 스스로 생산활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유한 계층들끼리 덕성 운운하는 게 많이 거슬린다고 해야 되나.. 물려받은 유산으로 놀고 먹으면서..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신들끼리 책 읽고 음악을 즐기고 사는 그들의 삶에서 덕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소설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생활상과 문화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기에, 그 시대의 사고방식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재적 관점에서 이렇다 저렇다 비평하는 것이 꼭 온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인 오스틴을 소설들을 읽다보면 늘 이런 문제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의 손에 직접 물을 묻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평생 그런 삶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된 여자들과 그녀의 가족들.. 그들끼리의 결합! 이런 게 아무래도 나의 시각에서는 불편한 듯 싶다.  

물론 남녀 사이의 탁월한 심리 묘사라든가.. 결혼을 단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거나, 외적 조건이 맞는 사람들끼리의 계약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당대의 분위기랑 다르게 남녀의 영혼의 교류나 이해, 공감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경탄하지만.. 그녀의 소설이 담고 있는 시대 자체가 나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한 시절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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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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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이로 초등학생 정도에 불과한 아이들이 지구촌 어딘가에서 자기 몸보다 더 큰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들었다. 세계 곳곳에 불의와 불평등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에..
또 무엇보다 내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난 다른 모든 것처럼 그들의 존재 역시 쉽게 잊어버리고도 잘 산다.  

그런데, 가끔 이런 불편한 책들을 만난다.  

이스마엘 베아. 힙합과 랩을 좋아하던 꿈 많은 12살의 소년이 내전에 휩쓸려 부모와 형제를 잃고 살아남아 소년병으로 전쟁을 직접 수행하다 간신히 거기서 벗어난 이야기..   

이 소년의 조국은 시에라리온이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배경이 되었던 나라란다.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어서 더 불행한 나라..  이 다이아몬드의 채굴권을 둘러싸고 여러 해 동안 이 나라는 내전중이었다. 부패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던 RUF라는 반군 세력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점령하고 그 돈으로 무기를 사들이며 내전을 지속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마을을 점령하고 그곳 주민을 학살하거나 사지를 절단하고 어린 소년들을 강제 징집해 무기를 나르게 하거나, 혹은 직접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서게 했다.  

이스마엘 베아가 전쟁을 만났을 때 그는 고작 12살이었고, 자신의 형, 친구와 함께 도시에서 열린 장기자랑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반군의 기습에 부모 형제의 생사도 모른 채 살기 위해 도망친다. 도처에 불신과 살육과 광기가 넘쳐나는 시대이고, 누구보다 더 악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게 소년병들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저 살기위해 도망치는 이스마엘의 무리들은 종종 거주민들에게 반군이라는 오해를 받고 냉대받는다.   

천신만고 끝에 부모를 만나게 된다는 희망에 부풀지만, 부모가 살았던 곳이 반군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어 버리고 고아가 되어 버린 이스마엘은 결국 정부군이 되어 반군과의 전쟁을 치른다. 그런데, 정부군이라고 반군보다 더 나은 점이 있었을까? 처음에는 부모를 죽인 원수들을 죽인다는 생각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살인기계처럼 되어 버린다. 전쟁 영화 람보처럼 반군을 죽이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반군이 아니라, 민간인임을 알면서도 학살을 자행하는 그들의 모습은 섬뜩하다.  

어린이에게 불과한 그들에게 마약을 먹여가면서 그들의 복수심을 부채질하고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것이 영웅이라고 충동질 하는 정부군 장교..  내 눈에는 그들이나 그들이 그렇게 원수처럼 생각하는 반군들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처음에 전쟁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이 아니라, 광기일뿐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광기와 학살의 한 복판에 총을 들고 싸우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랄해 질 수 있는 건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인한지..

다행스럽게도 이스마엘은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벗어나 재활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물론 소년병으로 자유롭게 생사여탈권을 행사했던 기억은 재활이 계속될수록 가슴속에 참기 힘든 죄책감으로 되살아났지만.. 이스마엘에게, 또 다른 소년병들에게 "괜찮아,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는 어른들 덕분에.. 이스마엘은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수도 프리 타운이 반군들에게 점령될 무렵 이스마엘은 다시 소년병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조국 시에라리온을 탈출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해 그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현재 국제  인권 감시 기구의 어린이 인권 분과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이스마엘들이 아직 남아서 어른들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편에서는 그들의 전쟁을 부추기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무리들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채굴된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에 열광하면서 어쩌면 그 전쟁을 지속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 뒷면에 이스마엘의 맑은 미소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주며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말했는가? 이스마엘은 지금 미소 짓지만, 세계 곳곳에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총을 들고 총알받이로 싸우는 어린아이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들도 이스마엘처럼 미소 지으면서 사람들과 다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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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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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시간당 최저 임금을 오천원으로 인상하려다가 정부 여당의 반대로 사천 몇 백원 선으로 맞췄다는 기사를 얼핏 본 것 같다. 몇 백원 더 올려 준다고 해서 기업 하는 사람들이 크게 난리 나는 것도 아닐텐데.. 참 너무들 한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워킹 푸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말 그대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여태 세뇌 되어온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다. 열심히 성설하게, 근면하게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아니 최소한 큰 부자는 못되어도 자기 식구 건사할 정도는 먹고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 깊이 박혀 있다.  

옛말에도 "소부는 재근하고 대부는 재천이라. 小富在勤 大富在天: 큰 부자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고 작은 부자는 근면한 데 있다 "는 말이 있다. 또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청춘을 보내셨던 우리들의 아버지 시대에는 이말이 어느 정도는 들어 맞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4천원 인생은 한겨레 21 사회부 기자 4인의 위장 취업기를 담고 있다. 힘겨운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 우리 사회의 취약 계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자 기획된 대로, 4인의 기자는 각각 식당 아줌마로, 마트 임시직 사원으로, 가구 공장의 노동자로, 공장 조립 라인의 단순 노동자로 대략 한달을 시간급 4천원 남짓을 받으며 다녔다.  

어쨌는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그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살아낸 현실의 이야기는 결코 녹녹하지 않다. 거의 11-12 시간의 고강도 노동을 하더라도 그들이 손에 쥐는 것은 최저 생계비가 될까말까  하고, 그 돈이라도 받지 않으면 먹고 살기 막막해 지고, 달리 갈 곳도 없고 설사 가더라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버티며 일한다. 일하면 할수록 몸은 더 망가지고, 생활은 쪼들리고 희망은 부서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나마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조차 없기에 그냥 하루 하루 버텨내듯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거나, 외국인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거나, 경력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만큼의 교육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곳에 취업한 기자들이 하루만에 , 자신이 기자라서 다행이라고.. 한달만 버티면 다시 자신은 기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 간신히 버텨 내는 삶을 그들은 벌써 수년에서 수십년째 살고 있다. 발에 물집이 잡이고 손이 굳고,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프고 소음 때문에 귀가 멍멍해지고 하루 종일 마신 분진에 가슴이 막혀도.. 또 자신을 아랫사람 취급하고 무시하는 사용주나 손님으로 인해 모멸감이니 설사 느껴진다고 해도 그곳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안타까운 일은 그런 가난이 어느 사이엔가 대물림 되는 구조로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처럼 지독히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자식까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적절하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자식은 원치 않았던 자신의 부모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원천 봉쇄되 버리는 것이다.  

 보수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그런 자리는 4년제 대학물이라도 먹고 어느 정도 스펙을 갖춘(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가난한 부모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해서 자신의 계발할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 자식들은 자신들의 부모처럼 최저 임금을 받으며 파견 용역을 전전하거나 시급 사오천원짜리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게 된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저자들의 말처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점점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정부의 개입이 없다면, 기업들은 너도 나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더 쥐어짜게 된다. 그래야 무한 경쟁 속에서 좀더 나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그 속에 속해있는 사람의 인권이나 생존권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너 아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많다는 의식이 어느 곳에나 팽배해 있다. 그러니.. 사람이 귀한 것이 아니고, 돈이 귀할 뿐이다.   

물론 사회 취약 계층끼리 연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수 밖에 없겠지만, 그들은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쁘다. 이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사람이 없기에..이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아직 요원하다. 그런데, 저들이 꼭 나와 상관없는 존재들인가? 당장 우리 오빠만 해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있다.  또 누구라도 이 험악한 경쟁 사회에서 한발 삐끗하면.. (갑작스러운 가족 누군가의 질병이나 사업 실패, 실직 혹은 요즈음 많이 회자되는 하우스 푸어 같이 대출 과다)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것처럼 삶의 모든 수준이 추락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자체가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최소한 이땅에서만이라도 미래를 위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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