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나무 1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전작 <타임 투 킬>의 3년 후를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전작의 세부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주인공 이름조차도. 실제 읽은 지가 십 수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계속 읽으나가면서 몇 가지 기억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소설을 떠올려줄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놀라운 것은 주인공 제이크 브리건스가 그 재판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3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평범한 변호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재판의 성공이 엄청난 보수를 받는 변호사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보여준다. <레인메이커>에서 보험회사에 승소했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과 연결된다.

 

이번 소설도 역시 미국의 민감한 인종 문제와 이어진다. 모든 사건의 발생 원인은 한 거부의 자살에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세스 후버드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놀라운 재산을 남긴 후 자살한다. 그 계획은 나무에 목을 매어 죽고, 자신의 직원 중 한 명을 약속한 시간에 그곳으로 오게 해서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게 만든다. 당연히 경찰이 와서 시체를 내리고 집에 가서 유서를 발견한다. 자살로 판명난다. 이제 그의 자식과 손자들이 유산을 물려받으면 끝이다. 그런데 그가 자살하기 전 한 통의 자필 유언장을 작성해서 제이크에게 보낸다. 그 유언장에 실린 내용은 이전의 유언장을 폐기하고 흑인 가정부 레티에게 유산의 90%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언제나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소식 중 하나가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가족들의 소송이다. 유언장의 내용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생긴 분쟁들이다. 이 유언장도 그렇다. 자식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레티에게는 그가 언질을 준 약간의 유산이 얼마일까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세스가 치밀하게 계획한 것은 전혀 공증이 되지 않음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남겨두었다. 물론 공증이 되었다고 소송이 붙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가 자살하기 불과 하루 전에 만든 유언장이고, 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 함께 한 사람이 레티가 유일하다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식들의 변호사가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유언장을 무효화하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한 중년 흑인 여성이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다. 세스의 자식들이 유산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레티 주변에도 그 유산의 일부를 노리는 사람들이 모인다. 당연히 이해 관계가 충동하고 엮인다. 이 와중에 제이크가 해야 할 일은 세스의 유언이 그대로 이행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일이 곧 레티의 이익인데 레티의 남편은 인종 문제를 이용해 소송을 거는 흑인 변호사를 선임한다. 하나의 소송에 다양한 이익이 걸리면서 변호사들 숫자만 늘어난다. 이것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트리 판사다. 그는 판사의 권한을 이용해서 소송의 분위기와 상황을 주도해나간다. 최종 결과는 배심원이 내리지만 그 과정을 조율하는 것은 판사임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법정 스릴러지만 솔직히 이전에 본 그의 소설에 비해 긴장도가 떨어진다. 그의 소설에 익숙한 것도 있지만 중반 이후 세스가 왜 레티에게 그런 거액의 유산을 남겼는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입도는 변함없이 좋다. 하나의 소송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변호사들이 왜 둘 이상이 함께 다니는지, 1심에서 승소하였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주면서 조금은 낯선 법조계의 모습을 알 게 한다. 법의 허점이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직업들이 나올 때 세월의 흐름을 살짝 엿보게 된다. 그리고 80년대 미국 남부 지역이 아직도 백인우월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지금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제목부터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있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의문인 ‘왜 흑인 가정부 레티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겼을까?’에 대한 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답만이 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 소송에 이기기 위한 변호사들의 노력과 계획과 조사와 치밀한 전략 등이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전체적인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법정에서의 치열한 싸움보다 바깥에서 생긴 변수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제이크의 역할이 전편보다 약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그의 소설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훈훈하고 낯설고 억지스럽다.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 때문일까? 그렇지만 반갑고 재밌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에 하진을 책을 몇 권 사놓았지만 읽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몇 년 전 갑자기 하진에 대한 좋은 서평들이 올라와 관심을 두었고, 호평들 덕분에 몇 권을 샀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책장 어딘가에 꽂아둔 채로 몇 년이 흘렀다. 산 후 바로 읽지 않은 책들의 운명이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책더미 속에 파묻힌다. 하지만 기억 한 곳에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이미지들이 남아 있다. 이 기억은 나중에 그 작가나 작품을 읽고자 하는 마음을 되살려준다. 하진의 이번 소설도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다. 취향의 차이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다. 하진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보니 취향에 맞는지 알지도 못했다. 단순히 하진이란 작가의 이름 때문에 선택했다. 최근 바빠 충분히 집중할 시간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작가의 장편을 읽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비교하고, 삐딱하게 보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정도는 아니다. 분량이 그렇다. 난의 이야기 속에서 하진의 모습을 찾고, 작가가 만난 시인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읽었다.

 

이 소설의 화자는 난 우다. 중국인이다. 천안문 사태 이후 학업을 포기한다. 중국 정치에 혐오를 느낀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베니아다. 그녀가 그의 삶을 지배한다. 아내 핑핑도 이 사실을 안다. 난은 핑핑과 결혼해서 타오타오란 아들을 두고 있다. 미국에 유학 와서 아내를 불렀다. 나중에는 아들도 왔다. 이 소설을 첫 부분은 다섯 살 아들이 홀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이다. 엄마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다행히 잘 도착했다. 제대로 된 가족이 모인 것이다. 이때부터 우 가족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 사람의 중국인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난 우의 이야기다.

 

중국 국민으로 생활하다가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살기로 결심한 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의 국적을 감안하면 거의 노동일 밖에 없다. 하지만 낯선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이 일은 생존에 대한 문제다. 부잣집 관리 일을 하지만 돈이 부족해서 뉴욕에서 중국 시 잡지 편집 일을 하지만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부업으로 선택한 것이 식당 일이다. 그의 성실함 덕분에 식당에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는다. 이제 요리사는 그의 평생의 직업이 된다.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난이 바라는 것은 평온한 일상과 시를 쓸 수 있는 환경이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식당을 인수하고 빚내어 집을 산다. 생활이 쪼달린다. 풍족한 미국에서 그들의 삶은 궁핍하다. 물론 그 당시 중국에 비하면 풍족하다. 조그만 중식당을 운영하고 빚을 갚으면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시인의 삶이 꿈틀거린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줄기인 시인이 되고 싶은 난의 의지가 곳곳에 스며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영어로 시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 이 괴리는 평생 그를 괴롭힌다. 나중에는 포기하라는 혹평까지 듣는다. 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중국인의 영어에 대한 나의 착각을 깨닫는다. 그들이 쉽게 영어를 배운다는 착각을.

 

난은 중국 태생의 중국인이지만 미국 영주권을 얻고 시간이 흐른 후 시민권을 받는다. 그런데 그의 태생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에게 와서 애국을 강요한다. 단지 중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중국을 도와야 하고 응원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거부한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들마저도 무분별한 애국주의에 빠져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단순히 이것이 중국만의 문제가 아님을 금방 깨달았다. 한국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오쩌뚱을 비판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우리의 박정희가 떠올랐다. 박정희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어른들은 미화된 위대한 지도자 이미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마오도 여자를 바꿔가며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더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그것은 그가 쓴 책의 인세를 챙겼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주석이 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이미지들이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90년대 급속하게 변화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가 흔히 부패되었다고 말하는 중국의 진짜 모습 중 한 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소설은 한 중국 이민1세대가 시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문화의 충돌을 경험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간다. 밖에서 볼 때는 평온하지만 그의 내면은 불타고 있다. 사랑보다 의무감에서 처자식을 돌보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미국에서 수년 간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아니 산다고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보면서 놀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미국으로 온 그의 아들보다 영어의 활용이나 이해가 떨어진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교적 평온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 몰입하게 된다. 난의 삶이 평탄하게 흘러가도, 주변의 삶에 흔들려도, 내면에서 열정이 솟구쳐 올라도 작가는 무리하게 비약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심심한 소설인데 긴 세월 속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 덕분에 결코 심심함을 느끼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난이 애국을 외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자유를 말할 때 깊이 공감한다. 물론 미국인으로 산다고 그의 삶이 자유로울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언론과 정보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나라라면 다를 것이다. 작가의 유일한 자전적 소설이란 부분에 눈길이 많이 갔는데 세부적인 부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인의 정체성과 시와 영어에 대한 고민과 노력은 알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등에 베이다 - 당신과 내가 책을 꺼내드는 순간
이로 지음, 박진영 사진 / 이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독특한 책이다. 제목부터 시선을 끈다. 책등에 베이다니 그게 가능할까? 물론 이것은 저자의 수사다. 뻔한 과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글에 귀를 기울이면 이것이 꼭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말한 책등이 서점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수많은 책등을 떠올려준다. 표지와 제목과 저자와 출판사 이름 등이 함께 어우러져 책에 대한 열망과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지금은 이 열정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연소한 것은 아니다. 자주 서점에 가지 않음으로 인한 일시적인 휴식기다.

 

분명 저자는 책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책이 주인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권의 책들은 저자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물론 책 속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많다. 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을 베고 지나간 책등에 대한 추억과 이해 등에 집중한다. 그래서 읽다 보면 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이것을 보고 뭐지?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 신선하고 재밌다. 곱씹어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냥 웃으면서 지나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실제 책 속에는 책등 사진이 없다. 책등이란 외양에 매달리면 저자가 보여주는 작품과 단상의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추억 뒤에 자리 잡은 깊은 이해와 사유는 어느 순간 번뜩이는 재치를 보여준다. 그가 지어낸 콩트는 간결하지만 재밌다. 현실을 뛰어넘었지만 그 속 깊은 곳에는 변함없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눈감고 귀 닫고 있으면서 놓친 것들이다. “우리 무조건 행복하자고 외치는 불행에 대하여. 가족의 고통을 촬영하는 환희에 대하여.”(171쪽) 말할 때 가장 슬픈 노래의 세계를 살짝 엿본 느낌이다.

 

에세이는 태생적으로 개인의 추억과 기억과 감상을 먹고 산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이 간결한 책은 독특함이 많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기존에 읽은 문장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도 서평을 많이 써다보니 어느 때는 그대로 붙여넣기한 느낌을 주는 문장이나 단어가 그대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가 걸러낸 문장과 이야기는 책과 어우러져 새로운 재미와 감각으로 다가온다. 살짝 비튼 곳에서는 웃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했을 때 “글을 쓰기보다 누군가의 글을 옮겨 적는 일을 잘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219쪽)라고 되물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 나온 답 중 하나가 필경사와 인용의 창고다. 띠지에 나오는 한 번도 인용된 적이 없는 문장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각각의 분량이 다르다. 문장은 간결하다. 인용도 적지 않다. 빠르게 읽힌다. 긴 호흡의 글보다 짧은 글을 선호하는 저자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낭독’에 대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책은 눈으로 읽고 소리는 사라졌다. 가끔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 소리 내어 읽어본다. 몇 번 그렇게 읽다보면 문장이 분해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이해된다. “이 문장들은 이제 나와 함께 합니다!”(95쪽)란 선포에 공감한다. 이 짧은 책이 매력있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글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끔 무작정 펼쳐서 아무 곳이나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궁금하다. 물론 이것은 이 책에 대한 기억이 좀더 흐려진 후에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후보로 오른다는 토마스 핀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모두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네 편은 대학 다닐 때 쓴 것이고, 마지막 한 편은 작가로 데뷔한 후 발표한 글이다. 이 단편집이 나온 것은 작가 데뷔 후 쓴 <은밀한 통합>(1964년)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1984년이다. 재미난 점은 이 단편집에 작가 서문을 일반 작가의 서문과 완전히 다르게 썼다는 것이다. 습작 시절의 작품에 대한 그의 감상과 비평이 아주 신랄하고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 어떤 평론가로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지 않을까 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을 읽고 난 후 소설을 읽으니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 더 복잡하게 꼬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나의 탓이다. 개인적으로 단편들을 모두 읽은 후 이 서문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이 단편집 이전에 단 한 번도 핀천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브이>를 헌책방에 구입했지만 그 두툼한 분량에 압도되어 팽개쳤다가 지금은 어디에 놓아두었는지도 잘 모른다.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아마 그때 <브이>를 펼쳤다면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문장이 어렵다거나 내용과 구성이 복잡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왠지 그의 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뭔가 때문이다. 그 뭔가를 잘 모르니 작가 서문의 이미지에 끌려 다니면서 엉뚱한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니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다음에 좀더 느린 속도로 여유있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슬비>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지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고, <로우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 생겼다. <앤트로피>는 두 층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언더 더 로즈>는 시대를 잘못 파악하면서 완전히 딴 길로 빠져버렸다. <은밀한 통합>도 역시 잘못된 오독으로 엉뚱한 생각만 하면서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다. 이런 오독과 착각은 어느 한 순간 잘못된 길로 생각이 빠지면서 시작되었다. 어떤 부분은 작가의 서문을 읽고 예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오만에서 비롯했다.

 

핀천에 대한 평가 중 ‘싸이버펑크 SF문학의 선조로 인정받는 소설가’란 부분에 솔직히 끌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사실 그런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나의 오독이나 싸이버펑크에 대한 이해 부족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집에 있는 <브이>나 아직 사지 못한 <제49호 품목의 경매> 등을 모두 읽은 후에는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핀천이 샐린저처럼 은둔 작가란 사실은 아주 낯설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샐린저의 소설에 아직도 빠지지 못하고 있는데 핀천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즈니스> 이후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읽었다. 한때 유행했던 <은교>를 읽지 않고 영화로만 보았는데 이번 작품과 같이 놓고 해설하는 글이 보인다. 읽지 않은 작품을 영화로 봤다고 두 작품을 연결해서 이야기를 풀어낼 능력이 솔직히 나에게는 없다. 뭐 책을 봤다고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제대로 표현하는데 부족하겠지만 ‘소소’와 ‘풍경’에 방점을 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세 남녀의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이야기도 같이.

 

이 소설의 목차를 유심하게 보면 참 많은 것을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얼굴을, 그 다음은 혼자에서 둘로, 셋으로 숫자가 늘어난다. 이 늘어난 숫자는 ‘참’과 ‘더’와 ‘진짜’로 감정이 변하는 것을 같이 표현한다. 에필로그에서 물의 기원을 말할 때 왠지 모르게 예전 작가의 다른 소설 제목이었던 <물의 나라>가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이 숫자와 감정의 상승은 책을 읽기 전에는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첫 번째 장이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ㄱ이 함께 하면서 느꼈을 감정들이 조금씩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야기는 작가가 한 제자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라고 묻는다. 그녀는 00학번 ㄱ이다. 이 전화 한 통이 과거 기억 한 자락을 건져 올렸고 그녀를 찾아가게 된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소소다. 그녀는 선인장의 가시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차도 중앙선에서 어쩌지 못하고 불안할 때 차를 멈춰 세우고 차장 밖으로 쓰윽 손을 내밀고 건너라고 말한 교수의 손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기억들이 그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온 후 ‘소소한 풍경’이란 단어를 쓴다. 그 후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ㄱ은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빠는 자신이 바라던 꽃을 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부모님은 무면허 부잣집 아들의 폭주를 피하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런 상처를 안고 대학을 다니던 그녀에게 한 남자와 우연한 만남이 이어진다. 이 인연은 한 순진한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졸업 후 결혼한다. 하지만 이 결혼은 잘못된 결합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한 그들이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결혼한 것이다. 특히 ㄱ은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 그 결과는 이혼이다. 이혼 후 돌아온 곳이 바로 소소 시다. 그 중 구소소라 불리는 곳이다.

 

남편에게 받은 상처를 혼자 살면서 둘이 하나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혼자 사니 참 좋아’다. 이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ㄴ이다. 그녀가 볼 때 ㄴ은 자살할 것처럼 보였다. 그를 살릴 생각을 하고 집을 들인다. 다음 날 내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가 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이렇게 둘이 살게 된다. 남녀가 둘이 살다보니 생기는 일이 있다. ㄱ은 그것을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라고 부른다. 그 이후 ㄴ은 우물을 판다. 그가 일하는 모습은 ‘스스로 풍경이 된’것 같다.

 

둘의 생활에 또 한 명이 참여한다. 그녀는 ㄷ이다. 세놓는 곳을 찾다가 ㄴ처럼 그들과 함께 산다. 둘이 셋으로 변하고 이때의 느낌은 ‘셋이 사니 진짜 좋아’로 발전한다. 3은 가장 안정적인 숫자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있다. ㄴ은 80년 광주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ㄷ은 탈북자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살고 있다. 이런 세 명이 사는 풍경에서 ㄱ은 ㄷ을 여자로 느끼지 못한다. 생물학적 성별로 보면 분명히 여자지만 이 셋이 덩어리지면서 성의 구별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 도덕관에서 이들을 보면 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덩어리진 상태에서 서로의 가시와 상처를 핥아주고 안아준다. 그러니 진짜 좋을 수밖에.

 

안정적일 것 같은 이 세 명의 생활에 파국이 생긴 것은 ㄴ이 판 우물에 ㄴ이 떨어져 죽으면서부터다. 첫 장면에 나온 시멘트로 된 데스마스크도 바로 ㄴ이다. 두 번째 장에서 화자로 ㄴ이 등장한 것은 바로 ㄱ의 기억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의 기억과 추억을 하나씩 풀어낸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또한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산다. 이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노렸는데 우물이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밴드의 기타를 쳤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도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것이다. ㄱ이 ㄴ의 손에 굳은살이 박힌 것을 보고 오해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에서 ㄷ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 또한 결코 평탄하지 않다. ㄴ이 죽은 후 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결국 머물고 있는 곳이 바닷가 티켓 다방이다. 그녀가 번 돈은 같이 탈북한 엄마와 그녀를 겁탈한 양아버지에게 들어간다. 탈북자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그녀 엄마가 보여준 섬뜩하고 끈질긴 살인을 보여줄 때 인간의 새로운 바닥을 보게 된다. 이제 세 명이 살면서 같이 누렸던 ‘진짜 좋아’의 기쁨은 사라졌다. 그들이 함께 누린 비밀은 이제 작가에 의해 밖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비밀은 은밀하지 않다. 구소소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풍경 속 사람들은 치열하고 은밀하고 즐겁고 기쁘고 아픈 삶을 살지만 밖에서 그들을 보는 사람에게는 평화롭고 아주 소소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은 반어적이다. 구소소를 생각하면 또한 은유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