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즈니스> 이후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읽었다. 한때 유행했던 <은교>를 읽지 않고 영화로만 보았는데 이번 작품과 같이 놓고 해설하는 글이 보인다. 읽지 않은 작품을 영화로 봤다고 두 작품을 연결해서 이야기를 풀어낼 능력이 솔직히 나에게는 없다. 뭐 책을 봤다고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제대로 표현하는데 부족하겠지만 ‘소소’와 ‘풍경’에 방점을 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세 남녀의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이야기도 같이.

 

이 소설의 목차를 유심하게 보면 참 많은 것을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얼굴을, 그 다음은 혼자에서 둘로, 셋으로 숫자가 늘어난다. 이 늘어난 숫자는 ‘참’과 ‘더’와 ‘진짜’로 감정이 변하는 것을 같이 표현한다. 에필로그에서 물의 기원을 말할 때 왠지 모르게 예전 작가의 다른 소설 제목이었던 <물의 나라>가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이 숫자와 감정의 상승은 책을 읽기 전에는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첫 번째 장이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ㄱ이 함께 하면서 느꼈을 감정들이 조금씩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야기는 작가가 한 제자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라고 묻는다. 그녀는 00학번 ㄱ이다. 이 전화 한 통이 과거 기억 한 자락을 건져 올렸고 그녀를 찾아가게 된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소소다. 그녀는 선인장의 가시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차도 중앙선에서 어쩌지 못하고 불안할 때 차를 멈춰 세우고 차장 밖으로 쓰윽 손을 내밀고 건너라고 말한 교수의 손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기억들이 그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온 후 ‘소소한 풍경’이란 단어를 쓴다. 그 후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ㄱ은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빠는 자신이 바라던 꽃을 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부모님은 무면허 부잣집 아들의 폭주를 피하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런 상처를 안고 대학을 다니던 그녀에게 한 남자와 우연한 만남이 이어진다. 이 인연은 한 순진한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졸업 후 결혼한다. 하지만 이 결혼은 잘못된 결합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한 그들이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결혼한 것이다. 특히 ㄱ은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 그 결과는 이혼이다. 이혼 후 돌아온 곳이 바로 소소 시다. 그 중 구소소라 불리는 곳이다.

 

남편에게 받은 상처를 혼자 살면서 둘이 하나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혼자 사니 참 좋아’다. 이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ㄴ이다. 그녀가 볼 때 ㄴ은 자살할 것처럼 보였다. 그를 살릴 생각을 하고 집을 들인다. 다음 날 내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가 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이렇게 둘이 살게 된다. 남녀가 둘이 살다보니 생기는 일이 있다. ㄱ은 그것을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라고 부른다. 그 이후 ㄴ은 우물을 판다. 그가 일하는 모습은 ‘스스로 풍경이 된’것 같다.

 

둘의 생활에 또 한 명이 참여한다. 그녀는 ㄷ이다. 세놓는 곳을 찾다가 ㄴ처럼 그들과 함께 산다. 둘이 셋으로 변하고 이때의 느낌은 ‘셋이 사니 진짜 좋아’로 발전한다. 3은 가장 안정적인 숫자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있다. ㄴ은 80년 광주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ㄷ은 탈북자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살고 있다. 이런 세 명이 사는 풍경에서 ㄱ은 ㄷ을 여자로 느끼지 못한다. 생물학적 성별로 보면 분명히 여자지만 이 셋이 덩어리지면서 성의 구별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 도덕관에서 이들을 보면 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덩어리진 상태에서 서로의 가시와 상처를 핥아주고 안아준다. 그러니 진짜 좋을 수밖에.

 

안정적일 것 같은 이 세 명의 생활에 파국이 생긴 것은 ㄴ이 판 우물에 ㄴ이 떨어져 죽으면서부터다. 첫 장면에 나온 시멘트로 된 데스마스크도 바로 ㄴ이다. 두 번째 장에서 화자로 ㄴ이 등장한 것은 바로 ㄱ의 기억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의 기억과 추억을 하나씩 풀어낸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또한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산다. 이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노렸는데 우물이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밴드의 기타를 쳤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도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것이다. ㄱ이 ㄴ의 손에 굳은살이 박힌 것을 보고 오해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에서 ㄷ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 또한 결코 평탄하지 않다. ㄴ이 죽은 후 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결국 머물고 있는 곳이 바닷가 티켓 다방이다. 그녀가 번 돈은 같이 탈북한 엄마와 그녀를 겁탈한 양아버지에게 들어간다. 탈북자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그녀 엄마가 보여준 섬뜩하고 끈질긴 살인을 보여줄 때 인간의 새로운 바닥을 보게 된다. 이제 세 명이 살면서 같이 누렸던 ‘진짜 좋아’의 기쁨은 사라졌다. 그들이 함께 누린 비밀은 이제 작가에 의해 밖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비밀은 은밀하지 않다. 구소소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풍경 속 사람들은 치열하고 은밀하고 즐겁고 기쁘고 아픈 삶을 살지만 밖에서 그들을 보는 사람에게는 평화롭고 아주 소소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은 반어적이다. 구소소를 생각하면 또한 은유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