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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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이다. 최근에 그의 단편이나 에세이가 재간되기는 했지만 신작으로 단편집이 나온 것은 몇 년 만이다. 하루키의 팬이고 거의 대부분의 책을 읽었지만 아직 하루키에 대해 잘 모르겠다. 이전에 하루키의 문체가 짧은 에세이에 더 어울린다고 했을 때 그 이유를 모르다가 최근에 안 것처럼 아직 그는 탐구 중인 작가다. 물론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느낌을 수없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느낌이다. 문장으로 그것을 설명할 능력이 아직 내게는 부족하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도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들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다양하다. 사랑, 상실, 아픔, 추억, 변신 등이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중에서 어떤 작품은 순간적으로 한 편의 호러물 같이 다가온 것도 있다. 반면에 카프카의 <변신>을 오마주한 듯한 <사랑하는 잠자>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이질적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이 인간에서 벌레로 바뀌는 과정을 다루었다면 이 소설은 사람으로 변한 후 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으로 변한 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집 열쇠를 고치러 온 꼽추 아가씨와의 대화는 프라하의 봄을 연상시킨다. 문장도 기존의 하루키와 조금 달라 앞부분을 읽는데 조금 고생했다.

 

첫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 중견 배우의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첫 도입부는 괜히 여자들의 운전을 남성 입장에서 풀어내었다가 갑자기 아내 이야기로 빠진다. 이 전개가 사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 둘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듯했는데 주제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외도를 알지만 자신의 직업을 살려 이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은 남자의 처절한 삶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느 순간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양념처럼 등장하는 운전수 미사키의 말들은 이 이야기의 안내역을 한다. 가후쿠의 말에서 양자역학의 흔적을 보았다면 과장된 것일까?

 

<예스터데이>와 <독립기관>의 화자는 다니무라다. 같은 이름인데 직업도 같은 작가다. 실제 작가의 이미지가 투영된 인물이 아닐까 추측한다. <예스터데이> 속에서 이십대의 사랑을 다뤘다면 <독립기관>은 오십대의 열렬한 사랑을 다룬다. 아직 섹스가 낯선 이십대의 사랑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될 수밖에 없고 상실의 아픔도 시간 속에서 비교적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오십대에 찾아온 사랑은 너무 무거워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 결과로 거식증 같은 행동으로 자신의 파괴한다. 다니무라는 이 둘의 모습을 관찰자로 등장하여 차분하고 신중하게 그의 삶의 한 순간을 들려준다.

 

<셰에라자드> 속 그녀와 하바라의 만남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우스에서 세상과 떨어진 채 살아가는 하바라의 삶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셰에라자드 역할을 하는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다. 둘 사이의 무미건조했던 섹스에 불을 지피고, 다른 무엇보다 기대하게 만든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하바라가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기노>의 술집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 잠시 등장한 그곳이다. 세상에 고양이가 장식장 속에서 편안하게 쉬는 다른 술집이 또 없다면. 아내의 불륜 현장을 본 후 차린 바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후반으로 가면 갑자기 비약한다. 이 비약이 순간적으로 호러 소설처럼 다가오지만 그 후에 나오는 묻어두었던 상처 이야기는 삶의 한 면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평온했던 분위기가 묘한 분위기로 바뀌고 그 다음은 따스함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좋다.

 

표제작 <여자 없는 남자들>은 한 통의 전화로 시작한다. 오래전 헤어졌고 어디에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한 여자의 남편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전해준다. 물론 남편과는 일면식도 없다. 연락처도 모른다. 조문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소식은 한 남자의 과거를 일깨운다. 열네 살 때의 추억. 그녀와의 사랑. 늦은 밤 한통의 전화는 그를 고독 속으로 밀어넣는다. 여자 없는 남자가 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법은 간단하다. 그가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된다. 이것은 아주 안타깝고, 아주 가슴 아픈 일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다. 현재 바로 옆에 아내나 애인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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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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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쓰다 신조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비채에서 나온 도조 겐야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주는 재미는 일본 민속 괴담 등을 미스터리와 엮어 풀어낸 것이다. 이 시리즈를 읽다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에도가와 란포나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 두 작가가 일본 미스터리에 끼친 영향이 크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더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다른 차이를 수없이 많이 나열할 수 있겠지만 단순한 독자의 경우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 아는 것 하나 정도라면 란포의 소설 중 한 편이 이 단편집 속에서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2001년에 <기관, 호러 작가가 사는 집>으로 정식 데뷔한 것은 알았지만 도조 겐야 시리즈보다 먼저 출간된 작품들이 주로 호러물이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도 <내려다보는 집>을 제외하면 <염매처럼 신들린 것> 이후 발표한 소설들이다. 도조 겐야 시리즈를 준비하는 중간에 발표한 것들이다. 이 작품들 중 <죽음이 으뜸이다 : 사상학 탐정>은 새로운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死相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가장 먼저 나온 단편 <붉은 눈>의 소녀가 이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해설을 보니 작가의 문학 작품 속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 작가의 열성팬이라면 한 번 조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덟 편의 단편 소설과 네 편의 엽편 소설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붉은 눈>은 솔직히 흔한 괴담처럼 다가와서 약간 밋밋했다. 하지만 이 소녀가 앞에서 말한 마지막 단편에 등장할 때 반가웠다. 다음에 또 어떤 사건과 함께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를 주었기 때문이다. <괴기 사진 작가>는 읽을 때 등장인물이나 잡지 등을 작가가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했는데 해설을 보니 실제 있는 인물과 잡지였다. 작가의 이력과도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재미난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애너그램도 눈길이 가지만 작가가 달아나는 과정에서 마주한 섬뜩한 장면과 위기탈출의 순간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내려다보는 집>은 다른 단편들처럼 그 공포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당시는 피했지만 그것이 아직도 있다는 암시를 주면서 서늘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붉은 눈>의 마지막 문장에서 보여주는 퇴마술은 비교적 간단한 방식이다. 대화만으로 구성된 <한밤중의 전화>는 읽는 도중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특별한 설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흔하게 듣던 구성인데 바뀐 분위기가 조용하고 늦은 밤과 어우러져 순간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친한 친구의 전화기로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존재가 전화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는 도조 겐야 시리즈와 닮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일반적인 공포 소설과 별 차이가 없다. 실제 재미를 주는 부분은 늦은 밤 노천탕에서 재나방 남자와의 대화다. 이 단편집에서 미스터리 요소가 가장 강한 단편이다. <뒷골목의 상가>는 작가가 한 남자의 체험담을 음향 효과를 내는 단어들의 사용으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름과 대답이다. 귀신 같은 존재들이 인간의 대답이나 허락을 통해 그들을 집어삼키는 장면은 세계 어디에서나 보게 되는 형식이지만 늘 서늘한 기분을 전해준다.

 

<맞거울의 지옥>은 어릴 때 굉장히 신기했던 장면이었던 공간의 끝없는 반복과 소실을 괴담으로 풀어낸 것이다. 정해진 설정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영화 등으로 만들 때 공포가 더 잘 표현될 것 같다. 아니면 뛰어난 이미지 형성 능력이 있는 독자이거나. 네 편의 엽편 소설인 괴담 기담은 솔직히 어떤 공포를 느끼기에 너무 짧았다. 하나의 괴담 기담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괴담 중 하나가 단편 속에 인용된다. 이렇게 이 단편집은 독립적이지만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면서 미쓰다 신조 월드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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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즈 웨이워드파인즈 시리즈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변용란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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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에 <트윈픽스>를 좋아했다. 이 기이한 분위기의 미국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단되었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그 의문은 다 풀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 드라마를 찍은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들을 열심히 보기는 했다. 뭔지도 모른 채. 갑자기 이런 글로 시작하는 것은 이 소설 속 분위기 중 일부분이 <트윈픽스>를 연상시켰고, 작가 자신도 후기에서 강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트윈픽스>를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트루먼 쇼>를 연상했을 것이다. 아닌가?

 

한 남자가 부상당한 몸으로 강에서 깬다.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신분증도 지갑도 없다. 있다면 작은 스위스 군용 칼 하나 정도. 걸어서 마을 쪽으로 간다. 몇 가지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정확한 것은 없다. 차 사고를 당한 것은 기억난다.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 마을을 걷는다.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 갑자기 떠오른 단어 하나. MACK. 자신과 동료가 타고 있던 차를 덮친 차의 마크다.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쓰러진다. 병원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이 병원 왠지 이상하다.

 

병원에서 기억을 되찾는다. 자신은 미합중국 비밀수사국 특수요원 에단이었다. 동료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아이다 호 웨이워드파인즈라른 마을로 가던 중이었다. 차 사고가 났고 부상을 당했지만 아직 살아있다. 상사와 집에 연락을 하고 싶다. 번호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 아니다. 쉬고 싶다. 하지만 돈도 카드도 없다. 보안관 사무실도 가야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마을과 그의 모습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이상한 마을이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소설은 에단이 웨이워드파인즈 마을 속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을 그려내었다. 외부와 단절된 마을 속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그와 이를 막는 사람들의 대결이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베벌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가 준 집 주소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동료였던 스톨링스의 시체다. 보안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 어떤 후속 조치도 없다. 그리고 차 사고가 났다는 것은 알지만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다. 신분증이나 지갑을 줘도 될 텐데 자꾸 딴 소리를 한다. 수상한 행동이다.

 

에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중에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갑자기 사라진 그의 생사를 궁금해 하고 그리워한다. 비록 같은 요원과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장면 속에서 시간이 살짝 엇나간다. 에단은 사고 후 며칠인데 아내 테레사는 1년 이상 지났다. 예상 가능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본다. 하나도 맞지 않는다. 이 시간 차이는 이 마을의 탄생과 운영에 관한 가장 큰 비밀을 담고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후반부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렸다.

 

짧은 문장과 빠른 전개와 많은 장면 전환은 가독성을 높인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묘하게 엇나간 일상과 사람들의 반응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후반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보여주는 살인은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어느 부분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산을 넘어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는 그의 노력은 처절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진실은 가장 앞에 나온 인용구를 곱씹게 한다. 모든 것이 다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이 3부작 중 첫 권이라고 한다. 다른 두 권은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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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면 그만,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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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글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가끔 그의 글을 마주하는 것은 대부분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다. 이때도 만나는 글들은 그의 SNS에 올라온 것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의 활발한 사회 참여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그의 글을 읽게 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더 좋아한다. 한때는 짧은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그의 소설만 빌려서 읽은 적도 있다. 그 후 몇 년에 한 번씩 나오는 장편에 큰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소설 대신, 아니 더 자주 출간되는 이런 우화집은 사실 아쉬움 덩어리다. 소설을 한 편 더 써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실 이런 종류의 글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너무 말랑말랑하고, 좀더 치열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괜히 멀리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나이가 먹고, 세상을 조금더 알면서 이런 글들이 가슴 한 곳에 조용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마 이렇게 읽게 된 것이 고등학교 국어선생의 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젊을 때는 시와 소설과 인문학 서적을, 나이가 든 후는 에세이 종류를 읽어야 한다는 그 말. 이 말이 금과옥조가 되어 책읽기에 빠진 나에게 유연성을 빼앗아갔다. 뭐 그 덕분에 다른 것을 배운 것도 많지만.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눠 놓았지만 읽다 보면 살짝 비슷한 내용도 나온다. 정확하게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당장 찾을 수 없다. 거의 300쪽 분량 속에 수많은 제목과 이야기를 간략하고 함축적으로 풀어내어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패스. 하지만 이 감성우화는 머리와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해학과 유머로 가득하다. 그냥 읽으면서 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근조근 그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읽어야한다. 그래야 이 책의 재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책 속에 밑줄치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상당히 많은 잉크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스마트폰 사진으로 겨우 몇 장만 찍어놓았다. 겨우 몇 장인 것은 귀차니즘 탓이다.

 

풍자와 해학, 유머와 날 섰지만 은근한 비평 등은 나의 지식 한계 안에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 말이 이 책 속에 그래도 적용된다. SNS로 정치, 사회, 문화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의 이력이 이 길지 않은 글들 속에 잔잔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굴곡진 인생을 산 작가의 경험이나 통찰이 표현될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곳에서는 웃음이 절로 터진다. 간결한 문장으로 삶의 경험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될 때 인상을 찌푸리고 집중한다. 그 의미를 좀더 깊이 되새겨보고 싶기 때문이다.

 

“뱀이 나타나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했을 때 한국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 대신 정력에 좋다는 뱀을 먼저 잡아먹지 않았을까.” 했을 때 웃음과 함께 우리 문화의 씁쓸함이 동시에 다가왔다. “24시간마다 한 번씩 묵은 날이 가고 새날이 온다. 하지만 자신이 새롭지 않으면 어떤 날이 와도 결코 새날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을 때 삶에 대한 통찰을 보았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젊었을 때 개고생을 많이 해서 비만 오면 뼈마디가 쑤신다. 자연과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일까.”라고 했을 때는 도가의 천인합일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재밌는 풍자와 해학이 아닌가.

 

전체적으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며칠 동안 조금씩 읽었다. 좀더 곱씹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했을 때 아직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해 아쉬웠고, 세월호 사건이나 표절, 자살, 정치 등의 문제로 옮겨갔을 때는 가슴 한 곳에 분노의 파편들이 들끓어 올랐다. 아직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쌓이는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책에 실린 정태련 화가의 그림은 낯선 놀람을 전해준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모두 다른 물고기들이 세상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 세밀함과 자유로움은 글과 글 사이의 쉼터가 되었다. 어떨 때는 조용히 그림만 본다. 이 책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존버다. 지금 병상에서 암과 싸우고 있는 작가가 존버정신으로 일어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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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는 나무 1 단비청소년 문학 9
크리스 하워드 지음, 김선희 옮김 / 단비청소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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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묵시론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계는 나무나 풀 같은 자연물은 사라졌고,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옥수수만 존재한다. 이 옥수수는 유전자 조작으로 황무지 같이 척박한 이 세계에서도 잘 자란다. 그런데 이 옥수수는 젠텍에 의해서만 재배된다. 누군가가 옥수수를 무단으로 재배하다가 걸리면 젠텍의 요원들이 잡아간다. 현대 기업들이 아예 옥수수 알을 심어도 자라지 않게 조작한 것에 비하면 아주 착한 설정이다. 작가도 이 부분을 잘 알 텐데 왜 이런 설정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포식집단이 있다. 바로 메뚜기 떼다. 이 메뚜기 떼들은 사람부터 나무까지 모두 달려들어 먹어치운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는 이 위협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식량이다.

 

첫 시작은 한 소년, 반얀이 나무를 만들어주고 식량을 받기로 계약하는 장면이다. 이 식량은 당연히 옥수수다. 소년이 나무를 만든다고 했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나무는 제목처럼 뿌리가 없는 나무다. 즉 철이나 플라스틱 등을 이용해서 나무 모양을 만들 뿐이다. 사람들이 실제 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시대에 이 뿌리 없는 나무는 부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품이다. 반얀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이 나무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1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끌려가 사라졌고, 소년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려내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니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황무지 같은 분위기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세계다. 옥수수로 바이오디젤을 만들어 자동차의 연료로 사용하고, 옥수수를 튀겨 팝콘으로 만들어 먹는다. 계약의 대가도 역시 옥수수다. 반얀이 일하는 집에서 한 여인의 나신 속에 그려진 나무 문신은 집주인 프로스트가 바라는 나무 모양이다. 소년은 재료를 모으고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이 집 아들과 딸처럼 보이는 소녀가 그의 곁으로 온다. 소녀가 가진 사진 속에서 나무와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렇게나 열심히 찾아다녔던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단순히 한 소년이 디스토피아 세계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액션이 조금씩 늘어난다. 반얀은 프로스트가 나무를 찾아 떠난 후 그 집에서 식량을 챙기고, 프로스트의 아들 살과 함께 GPS를 구하기 위한 여행을 한다. 이때 옥수수 밭에서 한 무리의 해적들에게 잡힌다. 이들은 해적들의 교역대상으로 잡혔다. 이 시대는 사람이 하나의 식량으로 거래되기도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장면들을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리고 이 해적 무리 속에서 한 소녀 알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빠르게 타오르지만 다른 적의 등장으로 제대로 성숙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미래 디스토피아 세계 속에서 환경과 생태에 대한 고찰이 이어질 것이란 나의 예상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사라졌다. 한편의 SF소설로 변했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 복제인간이 나오고, 거대한 옥수수 밭에서 액션이 펼쳐지고, 왜 메뚜기 떼들이 무서운지 섬뜩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설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느낌보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다. 이 낯선 등장은 갑작스러운 설정으로 이어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몰입도를 떨어트린다. 그리고 반얀의 친구 혹은 동료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는다. 가차 없이 진행된다. 살짝 놀란 대목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유기적이지 않다. 쉽게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작은 이야기에서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가는데 이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한 소년에게 너무 많은 행운과 기회가 찾아와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한 편의 모험 소설로도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좀더 세밀하고 잘 짜인 구성과 설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최근에 본 가장 최악의 분권이다. 한 권으로도 충분한 것을 무리하게 두 권으로 나눴다.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것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조금 아쉽다. 뿌리 없는 기계 등으로 만들어진 것도 과연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제목의 의미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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