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까마귀 1
마야 유타카 지음, 하성호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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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읽고 난 후 서평 쓰기가 어려운 책이 있다. 왠지 모르게 포인트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서 헤매기 때문이다. <붉은 까마귀>가 그렇다. 다 읽은 것은 꽤 오래 전이다. 바로 서평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바쁜 일과 다른 책 때문에 밀리다보니 현재까지 흘러왔다. 처음엔 내용을 복기하면서 다양한 시각에서 소설을 생각해보자는 기특한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금방 쓰기 싫었다. 이 소설 속 탐정 역인 메르카토르에 대한 불만과 서술 트릭도 한몫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도 없었다. 지금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고 첫 문장을 고민한다.

 

카인과 아벨. 성경에 나오는 태초의 두 형제다. 이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카인은 자살한 동생 아벨이 머물렀던 마을 노도를 찾는다. 이 마을은 지도에는 없다. 산 속을 헤매다 까마귀들의 공격을 받고 죽기 직전에 가시라기에게 구해진다. 이 인연으로 그는 노도에 머물게 되고, 동생 아벨의 자살 이유에 대한 답을 찾는다. 이 과정에 마을에서는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엄청나게 폐쇄된 마을에서 정말 드문 사건이다. 오카가미를 섬기는 마을 사람들은 살인자의 팔뚝에 징표로 반점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옛날에 살인자의 팔에 반점이 나타난 적이 있어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굳건하다.

 

깃카와 오카도 형제다. 깃카는 동생이란 이유만으로 일에서 상대적으로 해방되어 있다. 형인 오카는 어머니와 함께 논과 밭을 돌면서 일을 해야 한다. 겨우 두 살 차이가 날 뿐인데 어머니는 동생을 애라고 부르고 일을 면제시킨다. 역시 아직 어린 형의 입장에서 이것은 불합리하다. 그 또한 놀고 싶다. 오카의 감정은 동생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깃카는 자신의 것을 잘 누리면서 자유롭게 논다. 이 노는 일 중 하나가 살인 사건의 탐정 역할이다. 그 탐정 놀이의 대상은 노나가세 아재의 죽음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했는데 그의 눈에는 자살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마을 밖을 동경했던 깃카에게 아재는 소중한 이야기꾼이자 정보원이었다.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마을 노도와 오카가미의 절대성을 믿는 마을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여기에 두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카인과 아벨, 오카와 깃카다. 외부인 카인이 형이자 화자라면 내부인 깃카는 동생이면서 화자다. 이 둘은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각각 다른 시각에서 다른 사건을 주시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면서 교차하는 구성이다. 이 과정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들은 외부와 내부의 시선 차이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차이가 좁혀진다.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마을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면서 벌어진다. 범인 찾기의 객관성을 문제 삼는다면 결코 공정한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반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도라는 마을은 상당히 특이하다. 고립된 마을은 일본색이 강하게 드러난다. 노도는 오카가미의 절대적 지배 아래 운영되는 마을이다. 절대 권력 아래 위계질서가 잡혀 있다. 밖으로 보기에는 신정 아래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인간의 욕망은 무시무시하다. 고립된 마을 특유의 외지인에 대한 배타성은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이 배타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마을의 숨겨진 역사가 드러날 때 평화로워 보였던 마을 사람들의 탐욕과 폭력과 잔인함이 폭발한다.

 

사실 메르카토르가 탐정 역을 한다는 것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이 때문에 용의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올려놓기도 했다. 모른다는 것이 큰 재미를 주는 경우다. 강한 일본색이 한정된 공간 속에서 펼쳐질 때 지금까지 본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한국 추리소설을 읽을 때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강한 서술 트릭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모든 사건 해결에 가장 중요한 단서와 증거를 숨겨 놓고 끝까지 간다. 개인적으로 이런 설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다른 책을 구해놓았는데 이번에는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그 이후로 미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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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너 가져
김범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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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성장 소설이다.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계속 이어지는 사건들, 학생들끼리의 대립과 갈등, 성적 지상주의의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이 세밀하게 엮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주었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면 별이 경험한 모든 것이 환상이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왔거나 이제 지나갈 부모들에게 뭔가 가슴 한 곳에 찡한 것을 남겨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참으로 바른 생활을 했거나 별보다 더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김별. 그녀는 고2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고, 아빠는 지방대 조교수다. 아빠의 유학 시절 뉴욕에서 생활했다. 친한 친구는 순영이다. 이런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온다. 틴탑의 니엘을 닮았다고 말해지는 학생의 고백으로 인한 학교 짱 빽도의 괴롭힘과 폭력이다. 그녀에 대한 거짓된 소문과 일진 빽도의 권력 앞에 모든 학생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거나 암묵적 가해자로 변한다. 그러다 얼마나 심하게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 온다. 이때 한 중년의 남자가 다가온다. 신이 그녀의 기도에 응답한 것일까? 그의 활약으로 빽도의 위협은 사라진다. 그럼 그는 누굴까? 스스로 천국이라 부른다. 물론 실제 이름은 아니다.

 

사나운 개들과 함께 나타나 학교의 선생들도 하지 못한 그를 두고 도시는 소문으로 가득해진다. 도사, 개장수, 조폭 두목, 탈북자, 주님의 천사, 사기꾼 등 다양한 상상력으로 치장된다. 결국은 개를 가지고 간지나는 행동을 했다는 글 때문에 개간지로 불린다. 하지만 그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다. 이 비밀을 하는 사람들에게 쫓긴다. 그것은 S침으로 불리는 침술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침 한 방으로 스카이에 들어갔다는 소문이다. 좋은 대학에 목말라 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는 천국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연결선인 듯한 별을 발견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패거리 속으로 끌어들여 천국과 연락하길 바란다.

 

이 소설은 별이란 한 여고생을 통해 한국 교육과 학교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왕따와 일진, 학원과 학교의 은밀한 관계, 성적 지상주의와 부부의 갈등, 자격증과 실력의 문제 등. 현실을 그대로 보여줘서 읽는 동안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작가는 교묘하게 이야기를 이끌고 풀어나가면서 이 불편함을 제거하고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한다. 그렇게 하면서 불편함 대신 분노를 경험한다. 이 분노는 대부분 알고 있던 것이지만 대부분의 부모가 외면하고 있던 것들이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의 교육은 엄마가 담당하고 하자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다 결과를 보고 엄마들을 탓한다. 아이의 성적이 가정 불화의 원인이 된다. 별이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과거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와 학원의 은밀한 관계를 의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얼마 전 친구에게 들었다. 배우지도 않은 것이 시험에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그 문제들을 이미 학원에서 배웠다고 한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학생은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 학교 수업 진도와 다른 문제가 나왔다는 사실은 학원과 학교의 거래 관련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적이다 보니 학부모와 학생들이 A라는 부르는 천국의 S침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성적이 모래 위에 쌓아올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정당당한 진짜 경쟁에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너 가져’ 이 제목을 볼 때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창시절 공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좋은 대학을 말하면서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면 너의 미래가 밝게 펼쳐질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실제 가장 좋게 가는 길을 보면 재벌들의 좋은 집사 노릇이다. 좋은 직장과 많은 연봉으로 자신도 좋아지겠지만 그들의 삶에서 자유는 없다. 천국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자유를 잃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두를 야생개로 풀어놓는다. 이 행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학생과 어른들의 현재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별이 보여주는 행동은 그 결과가 바라는(?) 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별이 이 자유를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이 앞으로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진짜 맛보았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힘차게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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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견인
김비은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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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큰 기대를 가지고 읽지 않았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알렸다는 소개도 있지만 불분명한 약력과 10대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눈에 거슬렸다. 불분명한 약력이야 세계적인 작가들에게도 있는 일이니 문제가 될 수 없고,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 같은 소년 탐정들이 주인공인 작품들도 많으니 이것도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무대가 미국이고 미국인이 등장인물이란 점이 다시 눈에 들어왔지만 이런 종류의 작품은 이미 수없이 많지 않은가. 아마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나와 살짝 감정을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십대의 대결 구도와 소시오패스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연쇄살인범인 스칼렛 에이들과 동갑내기 사립 탐정 루카스 튜더가 바로 그들이다. 스칼렛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후견인으로 아버지의 친구가 유언으로 지정된다. 그런데 나중에 유서가 위조되었다고 알려지고, 새로운 후견인이 나타난다. 그는 스칼렛의 가정교사였던 테이트다. 이 변화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두 남매가 끔찍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 후 이 남매는 스칼렛에게 살해당한다. 이 일의 뒤에는 테이트와 테이트가 데리고 온 아이 노엘이 있다.

 

튜더의 이야기는 튜더가 아닌 술집에서 그를 만난 타일러가 한다. 그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살고 있다. 튜더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다. 삶의 의미를 잃은 그에게 이 일은 아주 큰 변화다. 그 동네의 유명한 사립 탐정인 튜더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술집 격투 장면은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아주 잘 보여준다. 탐정 활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지만 반면 그 수사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이다. 해커 할로윈의 악마가 보여준 정보 수집 능력과 비교하면 왠지 아쉬움이 생긴다. 능력을 한정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야기의 무게는 튜더에 더 실려 있다. 스칼렛의 경우 모든 사건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등장 빈도나 활약이 굉장히 정적이다. 직접적으로 활동하기보다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적들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다. 마치 거미줄 같다. 연쇄살인범인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찾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억지로 그녀의 정체와 위치를 숨긴다. 튜더에게 사건을 의뢰한 에밀리의 오빠도 마찬가지다. 힘들게 암호를 풀어도 그녀의 정체와 위치를 숨긴다. 아니 정체를 알려주지만 위치를 숨긴다. 그 위치도 생각해보면 쉬운데.

 

캐릭터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다보니 구성이나 전개가 조금 허술하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 알 수 없는 단체가 있다는 설정이지만 모호하다. 억지스럽다고 할까. 캐릭터 또한 깊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연쇄살인자인 스칼렛이나 후견인 테이트나 노엘 등의 심리 묘사가 깊지 않다. 이들이 표피적으로 묘사되다보니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할로윈의 악마도 그렇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타일러와 튜더다. 타일러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의 활동은 너무 미숙하다. 튜더의 과거가 간략하게 흘러나오지만 사람들이 납득할 수준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어떻게 보면 충분한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묶으면서 풀어내는 그 과정이 너무 쉽게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긴장감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예상한 것보다 쉽게 읽히지만 그것은 재미보다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 내용과 전개 때문이다. 다양한 설정을 풀어내어 자신의 관심사를 소설 속에 녹여내었지만 그것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참고 정도로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면서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에필로그는 상투적이다. 어떤 호기심도 더 불러오지 못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긴 호흡의 글을 썼다는 사실은 한 번 더 다음 작품에 기회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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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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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낯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 번도 책으로 읽은 적이 없다.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릭 호퍼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아마 다른 책에서 이 이름을 듣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읽은 적도 없는데 괜히 친숙한 이름이 있지 않는가. 이 친숙함은 잘 안다는 착각으로 이어졌는데 이력을 보면서 산산조각났다.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착각이 한 철학자의 나의 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 자서전은 그의 삶과 철학을 이해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아포리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함축적인 문장에 녹아 있는 철학이 쉽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장을 곱씹으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집을 읽는 느낌과 집중력으로 다가가야 하는 부분도 많다. 천천히 조금씩 읽는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지만 나의 취향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다른 책에 비해 훨씬 선호도가 낮다. 당연히 독서의 빈도도 낮다. 이 자서전을 읽기 전에는 아포리즘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곳곳에 잠시 눈을 멈추고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분량이 겨우 200 여쪽에 불과한데.

 

길 위의 철학자답게 그는 한 곳에 멈춰 살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 헬렌과 헤어질 때 모습은 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용기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그의 지성을 높게 평가한 그녀가 그를 제도권 안에 뿌리 내려 함께 살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냈을 때 그는 두려움을 느껴 달아났다. 떠난다는 이별의 말도 없이. 그녀들과 함께 살면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는 이 이별로부터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평생 껴안고 산 것이다. 떠난 것과 머문 것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용기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결과로 본다면 떠난 것이 맞지만 남았다고 해서 그 삶이 비루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희망보다 용기가 필요하다’(61쪽)을 인용했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은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대목이다.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65쪽) 흔히 말하는 희망고문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 대목을 다시 적으면서 헬렌과의 이별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다시 시력을 찾은 후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책을 내려놓지 않고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이 결과는 삶과 사람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그가 “유사성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169쪽)고 했을 때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비교와 편가르기가 떠올랐다. 차이점을 설명하기보다 유사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 것을 읽고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을 되짚어본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차이다.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던 그가 정착하게 된 원인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다. 군에 입대하지 못한 그가 부두노동자로 뿌리를 박고 25년을 산다. 이때 그의 저서들이 출간되었다. 이 자서전은 바로 이 시기 앞까지 다룬다. 다른 자서전처럼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고 간략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간결한 이야기 속에 담긴 통찰과 철학은 곳곳에 숨쉬고 있다. 길 위에서 그의 철학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부두노동자 생활은 그 결실로 이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포리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에릭 호퍼의 책은 시간내어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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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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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탄 영화의 원작 실화다. 그리고 흑인 감독에게 처음으로 작품상을 안겨준 영화다. 영화가 좋은 상을 타면서 많은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 저작권이 소멸된 책이니 출판사 입장에서 부담이 덜하다. 다양한 번역은 독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각 번역본의 번역 수준을 논하기에 나의 실력이 부족하니 넘어가자. 선택이 고민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출판사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열린책들은 언제나 나의 선택 1순위에 올라 있다. 물론 늘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책 뒷면 광구 문구는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 되기까지의 시간. 단 하루. 플랫이 솔로몬 노섭이 되기까지의 시간. 12년.” 그렇다 솔로몬 노섭이 조그만 욕심을 부려 믿고 같이 간 사람들에게 사기당해 노예로 순식간에 전락한다. 자신이 자유인이라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노예 상인들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다. 이미 이들은 이런 방식의 노예 사냥을 벌려 왔기 때문이다. 아마 이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도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 흑인이 노예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인에서 노예로, 노예에서 다시 자유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이미 결과를 알고 읽지만 각 장면마다 분노나 안타까움 등을 수없이 경험한다. 이 감정들은 단순히 플랫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흑인 노예들에게 투영된다. 영화나 다른 소설 등에게 노예들이 주인들에게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볼 때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에는 주인에 따라, 주인의 기분에 따라 때때로 벌어진다. 자유인이었던 플랫에게 이 일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다. 부당한 폭력에 그는 가끔 폭발한다. 이렇게 상대하는 것은 그 시대에 정말 위험한 일이다. 큰 재산이 아니라면 그의 목숨은 몇 번이라 사라졌을 것이다.

 

책 속에도 나오지만 그는 늘 자유를 꿈꾼다. 예전에 자유인이었기에 더 그렇다. 이 꿈이 어떤 때는 좌절되기도 했지만 결국 좋은 캐나다인 배스를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단지 배스의 노력만 있은 것은 아니다. 북구의 헨리 B. 노섭을 비롯한 다른 지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여기에 또 한 부류가 있다. 그들은 선량한 주인들이다. 그들은 선량한 마음도 있지만 노예를 어떻게 다루어야 더 효율적인지 잘 알고 있다. 그 방법은 노예들을 잘 대해줘 그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반면에 폭력적인 노예 주인들은 순간적인 효율은 얻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면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좋은 주인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았다. 뭐 이런 주인 때문에 플랫이 목숨을 구했지만.

 

이 시대를 보면 노예는 아주 큰 재산이다. 좋은 노예의 경우 몇 년치 연봉을 모아야 겨우 살 정도다. 그러니 성격 급하고 성질이 나쁜 주인이라면 폭력적으로 다루면서 금방 본전을 뽑으려고 한다. 플랫의 경우 못하는 노동, 목화 따기도 있지만 대부분 탄탄한 몸으로 일을 잘한다. 거기에다 바이올린까지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 주인들이 볼 때는 착하고 순종적이다. 그러니 요구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하지만 팔고 싶지 않다. 이런 그의 모습은 현대의 시점으로 본다면 아주 충실한 전형적인 노예다. 숨겨진 속내는 다르지만.

 

강한 폭력과 힘든 노동 속에서 살아가는 노예들에게도 즐겁고 신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크리스마스 전후 며칠이다. 이때 그들의 열정은 미친 듯이 폭발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흑인 문화가 이 속에서 탄생했다. 사실 이 대목을 읽을 때 약간 당황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백인들도 쉬어야 하는 시간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은 노예 솔로몬 노섭이 경험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일과 그 시대 노예들에 대한 기록이다. 플랫이 다시 노섭으로 변할 때 그와 함께 했던 노예들의 감정과 그와 같이 자유인에서 노예로 변했지만 먼저 죽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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