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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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낯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 번도 책으로 읽은 적이 없다.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릭 호퍼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아마 다른 책에서 이 이름을 듣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읽은 적도 없는데 괜히 친숙한 이름이 있지 않는가. 이 친숙함은 잘 안다는 착각으로 이어졌는데 이력을 보면서 산산조각났다.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착각이 한 철학자의 나의 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 자서전은 그의 삶과 철학을 이해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아포리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함축적인 문장에 녹아 있는 철학이 쉽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장을 곱씹으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집을 읽는 느낌과 집중력으로 다가가야 하는 부분도 많다. 천천히 조금씩 읽는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지만 나의 취향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다른 책에 비해 훨씬 선호도가 낮다. 당연히 독서의 빈도도 낮다. 이 자서전을 읽기 전에는 아포리즘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곳곳에 잠시 눈을 멈추고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분량이 겨우 200 여쪽에 불과한데.

 

길 위의 철학자답게 그는 한 곳에 멈춰 살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 헬렌과 헤어질 때 모습은 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용기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그의 지성을 높게 평가한 그녀가 그를 제도권 안에 뿌리 내려 함께 살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냈을 때 그는 두려움을 느껴 달아났다. 떠난다는 이별의 말도 없이. 그녀들과 함께 살면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는 이 이별로부터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평생 껴안고 산 것이다. 떠난 것과 머문 것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용기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결과로 본다면 떠난 것이 맞지만 남았다고 해서 그 삶이 비루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희망보다 용기가 필요하다’(61쪽)을 인용했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은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대목이다.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65쪽) 흔히 말하는 희망고문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 대목을 다시 적으면서 헬렌과의 이별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다시 시력을 찾은 후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책을 내려놓지 않고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이 결과는 삶과 사람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그가 “유사성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169쪽)고 했을 때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비교와 편가르기가 떠올랐다. 차이점을 설명하기보다 유사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 것을 읽고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을 되짚어본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차이다.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던 그가 정착하게 된 원인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다. 군에 입대하지 못한 그가 부두노동자로 뿌리를 박고 25년을 산다. 이때 그의 저서들이 출간되었다. 이 자서전은 바로 이 시기 앞까지 다룬다. 다른 자서전처럼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고 간략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간결한 이야기 속에 담긴 통찰과 철학은 곳곳에 숨쉬고 있다. 길 위에서 그의 철학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부두노동자 생활은 그 결실로 이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포리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에릭 호퍼의 책은 시간내어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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