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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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킹의 소설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킹의 광팬은 아니다. 그런데 그의 책이 나오면 산다. 밀리언셀러클럽에서 그의 소설들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의 소설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한참 헌책방을 다닐 때 사계 시리즈를 보고 사지 않았었다. 그의 다른 장편이나 단편을 산 것과 비교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을 잘 몰랐을 때도 그의 소설을 잡고 읽으면 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기이한 이야기에 홀린 것이다. 읽고 나서 그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의 책이라면 사고 읽었다. 한때 무협을 제외하고 집에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킹의 소설들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중단편집이다. 모두 네 편이 실려 있다. 모두 분량이 다른데 역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첫 작품인 <1922>다. 처음에 읽으면서 왠지 낯익은 분위기를 느꼈다. 한 부자의 살인 사건이 우리의 귀신 이야기와 닮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왜냐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이것을 아들이 돕기 때문이다. 이때 아들의 나이는 열네 살이다. 아내를 죽인 이유도 아내의 부정이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남편 제임스는 아내의 땅이 돼지 도축업을 하는 패링턴 사에 팔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아내 알렛은 이 땅을 팔아서 도시로 나가고 싶어한다. 각자 자신의 재산을 가진 채 이혼해도 되겠지만 제임스는 자신의 땅 옆에 패링턴 사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생긴다.

 

첫 번째 비극은 그가 예상한 대로 아내가 쉽게 죽지 않는 것이다. 돼지 목을 따듯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시도를 한 끝에 겨우 죽인다. 아내의 시체를 아들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 우물 속에 넣는다. 어린 아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아내가 가출한 것처럼 꾸민다. 아내를 찾아 패링턴 사 직원과 보안관이 온다. 아내는 우물 속에 묻혀 있다. 집에서 키우는 소 한 마리가 우물 속에 빠지면서 그의 계획은 더 좋아진다. 겉으로 볼 때 이야기다. 우물 속에 사는 쥐들은 아내를 파먹고 축사에까지 들어온다. 그에게 이 쥐들은 아내의 부하다. 그리고 두 번째 비극이 생긴다. 바로 아들의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한 것이다. 겨우 열다섯 살인데. 부모들이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개인의 농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 한 가정의 파멸과 죄의식에 의한 환상이 교차한다. 대공황을 앞둔 시대를 작가가 선택한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농장을 헐값에 팔려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이웃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대공황은 사람을 가려서 다가오지 않는다. 살기 위해 농장주도 공장으로 가야한다. 이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제임스는 유서처럼 남겨 놓았다. 그가 죽인 아내 알렛의 환상과 그녀의 부하들인 쥐들 때문이다. 킹은 언제나처럼 이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아내를 죽이고, 묻는 과정을 읽으면서 서늘한 공포와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신문 기사는 제임스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빅 드라이버>는 <1922>를 읽고 난 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나를 놀라게 했다. 코지 미스터리물 작가 테스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워 처절한 복수극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파들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작가다. 이 시리즈가 상당히 많이 팔렸고, 적지 않은 팬들이 있다. 어느 날 강연회에 초청받는다. 다른 유명 작가 자넷 에바노비치의 대타다.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와 강연료를 받고 브라운 베거스 북 클럽에 온다. 그냥 평범한 강연회다. 잘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이 클럽의 회장인 라모나 노빌이 지름길을 알려준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테스는 그 길로 돌아간다. 불행은 바로 이때 생긴다. 그녀는 지름길로 가다가 폐자재의 못에 타이어가 찔린다. 휴대폰도 되지 않아 보험사도 부를 수 없다. 이때 거대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순진한 첫 마디가 끝난 후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그녀를 때리고 강간하고 때리고 강간한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린다. 테스가 죽은 척한 것뿐이다.

 

보통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강간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혹시 그가 좇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이고, 자신이 언론의 먹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킹은 이 과정을 탁월한 테스의 심리 묘사와 행동을 통해 아주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킹의 최고 매력은 인물의 심리 묘사와 기묘한 상황으로 독자를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스릴과 긴장감은 같이 따라다닌다. 여기에 미스터리 작가의 복수극을 집어넣어 반격을 가한다. 우연으로 생각했던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차분히 되짚으면서 단서를 쫓는다. 비극과 통쾌한 복수 뒤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는 현실의 씁쓸한 단면을 보게 만든다.

 

<공정한 거래>는 악마와 거래를 한 남자의 소원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역사적 사실과 엮어서 보여준다. 한 가족의 처참한 몰락 뒤에 있는 숨겨진 거래가 예상한 반전을 뒤집는다. 가장 짧은 작품인데 그 속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악마나 반전을 없앴다. 제목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맞는 거래다. 이야기가 끝난 후 이 거래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비밀을 다룬다. 남편의 정체는 열한 명을 죽인 연쇄살인마다. 하지만 집에서 그는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다. 이것을 발견한 아내 다아시가 느낀 공포와 혼란은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적 판단보다 항상 앞서는 것이 감정이다보니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한 동안 살인을 멈추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에게 다시는 이런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그대로 덮어둔 채 살아갈 수 없다. 마지막에 비디의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은퇴 형사를 등장시켜 감정을 위로한 것은 약간 혼란스럽다. 깔끔한 결론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여운을 없앴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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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5
전아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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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그림에 대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림이 아닌 섬 이야기다. 이 섬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섬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떻게 가는 지도 알 수 없는 곳이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곳으로 끌려간다. 이 놀라운 섬에 대한 비밀은 한 남자가 자신의 밥값 대신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 한 노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이 뉴스를 통해 알려진다.

 

24시간 해장국집의 주인 김 노인은 텔레비전을 통해 어제 발생한 의문의 사망 사건을 본다. 백주대낮에 비쩍 여윈 노인이 숨을 거두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노인의 신원이다. 1986년 생 남자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신분증뿐이라면 큰일이 아닐 텐데 일주일 전 실종 신고된 황종민이라는 대학생의 지문과 일치한다. DNA 감정도 마찬가지다.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는지 검사했지만 깨끗하다. 신체 조직은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에 의해 사망한 다른 사례와 다를 바가 없다. 김 노인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때 한 노인이 밥값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황종민의 동창이고, 밥값 대신 그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박성우다. 미인도(美人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박성우는 미대 학생이다. 노교수의 희귀한 미술품으로 가득한 집을 돌보기 위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무료한 일상 중에 컴퓨터를 찾기 위해 다니다 이상한 여자를 힐끗 본다. 쫓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쓰러진다. 다른 방에서 깨어난다. 기억이 없다. 다른 날 친구와 함께 스키장에 간다. 둘이 번갈아 운전을 하는데 그의 차례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 얼핏 잠들었는데 차는 벼랑에 부딪히며 추락한다. 안전벨트를 맸는데 몸이 앞 유리창을 뚫고 튕겨 나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안간힘을 쓰다가 지쳐 기절한다. 비몽사몽 간에 이상한 경험을 한다. 다시 정신을 잃는다. 허기를 느끼며 깨어났을 때 옆에 앳된 여자아이가 있다. 소향이다. 그리고 이곳을 돌보는 수영을 만난다. 여인들이 사는 섬이라고 말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섬의 시간은 현실 세계와 다르게 흐른다.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도 현실에서는 찰나다. 황종민의 사건을 감안하면 이 섬을 살다가 남자들은 모두 노인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우도 그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잠들면서 그 시기를 놓친다. 이 섬의 몇 가지 규칙을 지키면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어기면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 여인들만 사는 섬에도 권력을 둘러싼 음모가 진행된다. 수영이 다스리는 것을 반대하는 가희가 노파들과 그들이 키우는 동물들이 사는 숲을 베어 더 큰 집을 짓고 싶어한다. 비극은 언제나 비뚤어진 욕망에 의해 생긴다. 서로 다른 욕망이 결합할 때 그 비극은 더 커진다.

 

성우가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꿈을 꿀 때 얼굴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찾고 싶다. 그러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 월화다. 그는 그녀가 비몽사몽과 꿈속에서 본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미 다른 남자가 곁에 있다. 바로 황종민이다. 그는 그녀를 빼앗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 가희다. 가희는 성우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다. 성우는 다른 남녀의 성교를 보고 춘화도를 그렸는데 이것이 섬 여인들이 원하는 물품이 된 것이다. 이 결탁은 섬에 비극을 불러오고, 그 비극을 통해 섬의 비밀과 성우의 비밀이 알려진다.

 

전아리는 이 섬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려내었다. 섬 여인들의 대화체나 옷 등도 현실과 다르다. 조선 시대 이상의 시대를 닮은 것 같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이질감이 생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이라 조금만 집중하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엇갈린 운명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뒤틀리는데 길지 않은 글 속에 잘 녹여내었다. 맹인 남자들과 노파들의 정체를 적절하게 숨긴 후 단계별로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하면서 군더더기를 없앴다. 성우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김 노인도 그곳을 다녀왔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도 혹시 다녀왔을까? 어쩌면 꿈속에서 잠시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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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 보이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4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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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력을 가진 소설이다. 작가가 방송 작가로 일할 당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내놓았지만 피디가 좀 고치자고 하면서 원래 의도했던 이야기가 상당히 바뀐 채 방송되었다. 소설가로 데뷔한 뒤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제의 받으면서 이것을 전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쓴 소설이다. 처음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기가 1996년이었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이다. 뭐 요즘이야 이런 연상연하가 유행처럼 지나가고 있지만. 그리고 현실과 마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여운을 남긴다.

 

많지 않은 분량이다. 이 시리즈들이 그렇게 많은 분량을 담고 있지 않다. 최소한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그렇다. 적은 분량이다 보니 이야기는 깊이 파고들지도 않고 이야기의 곁가지를 치지도 않는다. 한 사람, 즉 주인공인 정은영 아나운서의 감정에 집중한다. 그녀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데 유일한 실패가 결혼이었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한 번 결혼한 적이 있었다. 사기 결혼을 당한 것이다. 그녀의 이혼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명했던 한 아나운서의 사연이 겹쳐보였던 것은 왜일까? 냉정했지만 치밀하지 못했던 그녀는 이혼을 하지만 양육권은 빼앗긴 채 방송국에 복귀한다. 결혼 당시도 유망한 아나운서가 아니었던 그녀는 라디오에서 성공을 노린다. 그런데 이 방송의 청취율이 영 시원하지 않다.

 

시간적 배경은 지금이 아니다. 그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던 2002년이다. 그중에서 한국과 스페인전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해 봄까지 이야기를 다룬다. 정 아나운서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애인이 있다. 정우다. 같은 방송국 피디다. 대학 동창이자 입사 선후배 사이인데 어느 날 둘은 몰래 연애를 시작했다. 정우가 그녀의 집에 와서 머물다 간다. 밤을 세는 경우는 없다.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정우가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농담처럼 말하면서 거절한다. 이후 단 한 번도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방송국 안에 그의 결혼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때 그녀의 진심이 조금씩 드러난다.

 

그녀의 방송에 편의점 알바를 하는 한 애청자가 전화를 한다. 사연을 말한다. 마법과 누나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름은 천온희다. 이때만 해도 그녀와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생일에 집안 가득 꽃들이 놓여 있었을 때도 그녀는 정우의 선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녀의 생일도 몰랐다. 그녀의 집근처 편의점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녀가 먼저 생각한 것은 스토커다. 그런데 그의 알리바이를 편의점 사장이 보증한다. 정말 마법일까? 천온희가 집에 뭔가를 처음 놓아둔 것은 하얀 새의 깃털이다. 실제 이야기도 바로 이 깃털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마술이 아닌 마법을 공부한다는 그의 말은 아주 현실적 사랑과 연애에 살짝 판타지를 덧씌운다.

 

소설 속에서는 두 개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정우이고, 다른 하나는 천온희다. 정우는 과거가 되면서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면 천온희는 그 틈새를 아주 잘 파고들어 그녀에게 평온함을 안겨준다. 정우의 결혼 소식보다 더 큰 상처를 준 것은 다른 여자와의 만남을 그가 속여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쿨한 척한 행동 뒤에 숨겨져 있던 솔직한 감정이 드러난다. 결혼 실패를 바라는 마음이다. 치졸한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단지 둘 사이의 몰래한 연애를 다른 사람에게 폭로하는 것으로 변한다. 감정을 정리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리고 천온희가 있다.

 

천온희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거짓으로 꾸민 부모의 이야기나 비현실적 마법 이야기는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아름답다. 하지만 의심이 살짝 자랄 때는 그녀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그가 어떤 폭력을 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일시적이다. 온희는 정우와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해주고, 사랑을 느끼게 만든다. 둘 사이에 마법은 현실의 어둠과 높은 벽을 깨는 도구다. 그 도구의 정체가 드러날 때 새로운 현실이 둘 앞에 놓인다. 이때 감정은 변한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런 감정의 변화를 잘 포착해서 그려낸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가벼운 이야기를 집어넣어 잠시 동안 무거움을 털어내면서. 드라마로 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마지막 감정을 연출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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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정동진에 가면 - 정동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이순원 지음 / 북극곰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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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 당시 엄청난 열풍이었지만 드라마에 관심이 없다 보니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드라마 속 유명한 대사나 장소 등은 너무나도 많이, 자주 방송에 나와 알고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정동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기 위해, 혹은 드라마 속 장소를 보기 위해 정동진으로 갔다. 유행에 상대적으로 둔감한 나는 한참 유행할 때 가지 못하고, 몇 년 전 늦은 여름 갈 곳이 없어 한낮에 놀러갔다. 한적한 그곳의 풍경은 여유로워 좋았다. 기차역도 나쁘지 않았다. 잠시 머물다 스쳐지나가기에 좋은 곳이었다.

 

지금도 연말이 되면 수십 만의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기 위해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흉물스러운 건물이 하나 있다. 거대한 배 모양의 건축물이다. 멀리서 지나가듯이 보면 나쁘지 않지만 해 뜨는 풍경을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인데 이 지역이 탄광촌과 어촌이 함께 했고, 모래시계가 뜨기 전에는 그냥 한적한 동네였다고 한다. 물론 광산 경기가 좋을 때는 수많은 사람이 살았다. 딱 거기까지다. 탄광들이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자리를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채웠는데 갑작스러운 관광 특수가 주민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온 모양이다. 책 후반부에 이 이야기가 나올 때 씁쓸했다.

 

기본적으로 옛사랑의 흔적을 쫓아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미연이라고 불렀던 국민학교 동창이다. 소설 속 화자인 석하는 동해에 사인회를 왔다가 미연의 소식을 듣는다. 그 당시 몰랐다가 밤에 문득 그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찾아와 그녀를 만나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 당시 추억과 애틋한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앞부분을 읽을 때 왠지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조금 더 읽으면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석하의 이야기가 조용히 파고들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이 남아 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언제나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자락이 갑자기 떠오르면 감상적으로 변하게 된다. 미연이란 이름이 그 작용을 한다. 그녀를 찾는 방법도 무식하다. 잡지에 나온 사진 한 장을 들고 정동진에 내려와 카페를 돌면서 찾아다닌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들고, 솔직히 말해 그렇게 설득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감상에는 공감한다. 어릴 때 한 약속을 잊고 있다가 갑자기 그것이 떠올라 먼 정동진까지 올 정도로 둘 사이가 각별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뭐 덕분에 아련한 옛사랑의 느낌을 만끽했지만. 기억과 사실 사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작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정동역이 맞을까, 아니면 정동진역이 맞을까.

 

많지 않은 분량이라 조금만 집중하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책 뒤에 단어들만 적어놓은 것이 몇 쪽 있는데 흔히 말하는 이야기의 키워드다. 처음 이 단어들을 읽었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이 단어들이 이야기를 조용히 떠올려주었다. 감성적인 문장과 이야기가 아주 조용히 천천히 가슴속에 스며든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 반발하는 부분도 있다. 중학교 때 헤어진 두 남녀가 이십 년 이상 지난 후 다시 만났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는 부분이다. 중간에 비슷한 또는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한 번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편지조차 주고받지 않은 사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겨 놓은 감정의 여운은 진하다. 정동진에 대해 알게 된 몇 곳은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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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갈 용기 - 자유롭고 행복해질 용기를 부르는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노만수 옮김 / 에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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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그 후 그의 저작들이 각각의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출판사라고 생각했는데 몇 권 확인하니 모두 다르다. 이런 성공은 인문학이 홀대받는 현실에서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나처럼 아들러에 문외한인 사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이론에 관심을 둔 것을 보면 더더욱. 하지만 심리학에서 아들러의 명성은 대단하다. 아마 나도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단지 프로이트나 융처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저자는 아들러 심리학 전문가다. 제목처럼 늙어갈 용기를 아들러 이론을 통해 다섯 장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대화할 용기, 몸말에 응답할 용기, 늙어갈 용기, 책임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등이다. 이것은 각각 타자, 아픔, 나이 듦, 죽음,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각 장에 용기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 개념은 아들러 이론의 핵심 중 하나다. 출간된 각 책의 제목에 용기란 단어가 들어간 것이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다. “참된 능력은 용기다.”라고 아들러가 생각할 정도였다.

 

아들러 심리학 대중서 역할을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 책이 이 정도 내용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1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내용을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한 상태지만 ‘우리의 앞길을 막아설 질병, 노화, 죽음이라는 인생의 과제’를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준다. 어느 부분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인간에게 생로병사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 현실이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듯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거의 대부분 자신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이 과정 중 현재 우리에게 크게 와 닿는 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이 과정이 모두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저자는 상당히 신선한 시각으로 이 현상을 바라본다.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공연히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것이다. 타인의 인정욕구는 결국 타인이 만들어낸 공포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결정한다”고 본다. 즉 어떤 특정한 경험을 트라우마로 보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있을 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의미 부여다. 그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사람이 아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한다. 혼자서만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공동체 심리학으로 불린다.

 

저자는 심근경색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이 그로 하여금 삶을 다른 방식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아픈 사람도 그 존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아픔을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존재’란 단어가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은 전체를 벗어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혼자만 행복한 것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는 있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싫어한다. 일본의 핵발전에 대해 비판적인데 필요악이란 논리를 부정한다. 맞다. 비겁한 변명이자 타협책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자주 본 것이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해서 자유롭지 못하다”란 문장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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