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 법정의 산중 편지
법정 지음, 박성직 엮음 / 책읽는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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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서 내놓은 책이다. 기간은 1955년부터 1970년까지이고, 편지는 50여 통에 이른다. 출가하면서 보낸 편지와 출가 중에 쓴 편지들이라 법정 스님의 초기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난다. <무소유>란 희대의 작품을 낸 법정 스님이 초기에 얼마나 많은 독서에 욕심을 내었는지 알 수 있고, 속세의 인연을 단숨에 끊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의 편지 속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박성직이 쓴 답장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돌아가실 때 자신의 저작들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 글과 영향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한 권씩 책으로 묶여 나오고 있다. 아니면 이 책처럼 편지 모음과 그의 글 인용 등으로 사용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편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우리 시대에 남긴 영향력을 감안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마 이 말도 다른 책에서 한 번은 쓴 적이 있다. 한때 그의 유언에 따라 절판될 것이란 이유 때문에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되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계속 나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되면 또 누군가가 출간할 것이 분명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번 편지를 읽으면서 글들이 상당히 문학적이라고 느꼈다. 비유와 은유 등으로 표현된 문장들은 어떻게 그가 그렇게 뛰어난 수필들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학문과 문학 등에 대한 열정과 탐구열은 그가 요청한 책들에서 잘 드러난다. 사촌동생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추천하는데 낯선 제목도 많이 보인다. 1950년대란 시대를 감안해야 하겠지만 관심이 생기는 책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장 반가운 것은 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도반들에게 먹일 김을 잘 골라 보내달라는 요청이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다.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기에 그의 글과 인품이 우리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끌렸던 문장은 책 제목이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흔히 마음에 따라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문장은 그 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우리가 흔히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이 이외에도 좋은 문장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우리가 그냥 무심코 보내는 시간 속에, 행동 속에 담긴 일상의 위대함을 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이나 한계가 조금씩 엿보이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잘 정제된 문장과 절제된 감정으로 이루어진 편지는 그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법정 스님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다. 아니 그분이 생존해 계실 때 그 유명한 <무소유>를 들고 다니다 술 먹은 날 택시에 놓고 내렸다. 그 이후 몇 권의 산문집을 사고 얻었지만 쉽게 손이 나가질 않았다. 그 당시는 이런 글을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도 했다. 그러다 사후 원문이 아닌 이처럼 과거의 흔적들을 다룬 책들을 읽고 있는데 그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법정이란 법명보다 박재철이란 청년의 모습이 더 많이 드러나는 이 책은 한 명의 불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무소유란 단어를 보고 들을 때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된 법정 스님이다. 동시에 너무 탐욕스러운 나의 삶들을 돌아보게 된다. 갑자기 예전에 쓴 편지들이 궁금해진다. 얼마나 조악했을지, 얼마나 솔직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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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상 리처드 씨의 수수께끼 감정 보석상 리처드 씨의 수수께끼 감정
쓰지무라 나나코 지음, 박수현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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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노벨을 오랜만에 읽었다. 읽다 말다 한 책을 빼면 몇 년만이다. 개인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기에 예전에는 자주 읽었다. 하지만 다른 장르에 빠지면서 한동안 뜸했다. 그리고 이 책을 선택하면서 한 가지 기대를 했었다.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말이다. 하지만 휴가지에서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다 보니 그 재미를 제대로 누릴 수 없었고, 시끄러운 비행기는 독서에 방해만 되었다. 그러다 늦은 밤 차분히 읽으면서 처음 바란 속도와 재미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보석들과 관련된 사연을 다룬다.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보았고, 오다가다 본 보석들이지만 실제 그 보석을 놓아두고 구분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조차 인조와 천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문외한이다. 각각의 보석의 가치는 당연히 모른다. 다이아몬드가 비싸다는 것과 이 다이아몬드에 얽힌 슬픈 역사의 단편 정도를 알 뿐이다. 하지만 이 보석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면 그 가치와 상관없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다.

 

화자는 세기라는 대학생이다. 취객에게 피해를 입은 외국인을 도와주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외국인은 리처드라고 불리고, 보석상이다. 이 사실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설명은 그가 지닌 미모다. 절세미남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쉽게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보석상이란 사실을 알고 감정을 의뢰한다. 이 짧은 단편 속에 그 시대의 한 단면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작가의 뛰어난 부분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끌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조금 선명하지 않은 대목들이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나의 이해도나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럴 수도 있다.

 

핑크 사파이어, 루비, 자수정, 다이아몬드 등은 흔히 듣는 이름이다. 가격은 솔직히 잘 모른다. ‘자수정의 가호’란 에피소드에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저렴한 보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잘 생각해보면 아주 싼 보석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만 보석에 관심이 없고 살 일이 없다 보니 그 가격을 모를 뿐이다. 단순히 다이아몬드가 제일 비싸다는 상상만 할 뿐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가격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보석과 그 보석의 주인에 집중한다. 이야기를 만든다. 복잡하지도 않다. 조금만 집중한다면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약간은 뻔한 설정도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세기의 출생에 관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외할머니 이야기다. 소매치기였던 그녀의 삶이다. 핑크 사파이어의 감정을 한 이유도 이 보석의 가치보다 이 보석 때문에 일어난 사고와 그 사고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산 할머니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 소매치기 어머니와 대립하고 살았던 세기의 엄마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좀더 깊은 곳까지 이 사연을 파고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세기와 리처드의 알쏭달쏭한 관계에 대해서도. 검색하니 시리즈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한두 권 더 읽어보고 싶다. 이번에는 좀더 차분하게 앉아 더 집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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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때기 포트
김이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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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검>을 재밌게 읽었기에 선택했다. 한국형 느와르라는 소개글도 한몫했다. 인천의 재개발 지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해서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재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깔때기 포트’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현실의 공간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살고 있거나 관계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하나의 풍경일 뿐이지만 많은 매체를 통해 간접 경험했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다. 그리고 돈을 둘러싼 각종 인간의 욕망이 그곳에서 충돌한다.

 

영민은 가난한 대학생이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 중이다. 열심히 잡지를 배달해서 한 달 살 돈을 번다. 이때 고등학교 친구인 상구가 자신의 후임으로 그를 추천한다. 그 일이란 것이 불법 약품 배달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한 후 현찰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전 일에 비해 일도 쉽고 보수도 높다. 다만 불법이란 것이 문제다. 하지만 하류인생에게 이런 불법 배달은 큰 문제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를 조금이나마 좋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상구는 깔때기 포트로 옮겨가서 깡패가 되려고 하고, 영민은 약 배달 사업에 참여한다.

 

일이 잘 풀리면 그냥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대학을 졸업해서 다른 직장을 구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짓밟는다. 작가는 이 과정을 현실의 바탕 위에 하나씩 풀어놓는다. 인천상륙작전의 피해자 모임이나 재개발지구의 생활자 등을 옆에 놓고 우리 삶의 주변부를 살짝 들춘다. 이들을 주연으로 등장시킬 마음이 작가에게는 없다. 하류인생이지만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조배가 데리고 간 술집에서 만난 다해가 그 대상이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본 후 자기만의 공주였던 그녀인데 술집에서 만났다. 조배가 늘 찝쩍거렸던 그녀이지만 그녀는 영민에게 더 끌린다. 여기서도 나의 생각을 벗어나는 결말로 이어진다.

 

어떤 조직이나 위계질서를 세우려고 한다. 조배가 선배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그 이유다. 영민에게 허세를 부리고, 사장에게 가끔 대들지만 그 바탕에는 상승 욕구가 있다. 깡패 특유의 허세와 자랑질이 딱 그곳에서만 허용된다.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진짜 무서운 인간들은 언제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움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과도한 욕심이 자신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영민은 너무나도 자기 절제가 강하다. 한 번의 폭주가 그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지만 작가는 이 상황을 아주 흥미롭게 만들었다. 보이는 것의 이면을 자세하게 풀어준 에필로그는 어떻게 보면 사족이지만 어떻게 보면 불행한 삶의 순환 고리 중 한 단면이다.

 

소설은 잘 읽힌다. 과도하게 설정하는 부분도 없다. 현실의 욕망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삶을 보여주는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이 거리두기가 과도한 감정의 소모를 막아준다. 감정이입이 절제되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밋밋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영민과 다해의 로맨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격렬하고 열정적인 모습이 보이지도 가슴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자기절제가 강한 영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삶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의 삶이 앞으로, 위로 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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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클럽
사스키아 노르트 지음, 이원열 옮김 / 박하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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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매혹적인 광고 문구를 가졌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위기의 주부들>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상상해봐라. 그것이 바로 《디너 클럽》이다!” 이런 표현은 하이스미스가 보여준 심리 묘사를 좋아하고, <위기의 주부들>에서 나타나는 막장 드라마를 즐겼던 독자라면 누구에게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흔치 않는 네덜란드 스릴러란 점도 관심을 끌었다. 자극적인 표지도 아주 인상적이다. 이런 멋진 포장은 과도한 기대를 품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기대는 조금 과했다. 취향 탓도 있지만 마무리로 이어지는 과정이 조금 느슨하고 긴박감이 조금 떨어졌다.

 

긴박감이 떨어지는 부분을 멋지게 채우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관계와 멋진 심리 묘사다. 카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하나의 모임 속에 감추어진 욕망과 속내를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엮이고 꼬이고 뒤틀린 관계는 하나의 파국을 통해 확대된다. 순진하면 자신의 속내를 알게 모르게 드러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것은 질타의 대상이 된다. 순수한 우정이 계속 될 것 같았던 모임 속에 욕망이 꿈틀거리고, 거짓과 비밀이 난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을 놓고 보면 광고 문구와 딱 맞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환상 중 하나가 한적한 전원생활이다. 카렌 부부가 교외로 나간 것도 이런 환상이 작용했다. 하지만 현실은 지루하고 지겹다. 이때 만난 한네커가 다른 여자들을 소개해주고, 이들이 하나의 모임을 만든다. 디너 클럽이다. 여자들만의 모임이었으면 문제가 덜 생겼을 텐데 남편들도 함께 한다. 동등한 관계가 유지된다면 멋진 모임으로 지속될 수 있었겠지만 성인들의 모임은 감추어진 욕망들이 알게 모르게 표출될 수밖에 없다. 카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하게 시몬에게 성적으로 끌린다. 그가 보여준 과감한 행동을 제지할 생각조차 않는다. 오히려 즐긴다. 이런 모임이 오래간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이런 목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친구 중 한 명의 집에 불이 난다. 남편 에베르트는 죽고, 아내 바베터와 아이들은 살아난다. 다행스런 일이지만 얼마 후 이 모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네커가 죽는다. 자살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비밀이 드러난다. 에베르트와 한네커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둘의 관계가 깨어졌지만 이 불륜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 여형사가 끼어들면서 평온한 듯 보였던 관계의 실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진실과 믿음보다 여형사가 흘린 한 마디가 더 큰 작용을 한 것이다. 2년 동안 그들이 쌓아올린 우정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지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에베르트와 한네커의 죽음을 추적하는 설정이지만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카렌의 욕망과 인간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심리 묘사다. 특히 시몬을 둘러싼 욕망은 아주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다. “미첼은 나 때문이 아니라 돈, 그리고 시몬이 그에게 펼쳐 보여준 장밋빛 미래에 흥분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시몬, 바로 그에 대한 생각 때문에 흥분했다.” 돈과 육체적 욕망은 언제나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끈다. 이성의 고삐가 잠시라도 풀리면 그 틈새로 쉴 새 없이 들어온다. 한 번은 두 번으로,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한네커의 죽음과 잘못된 정보는 이 디너 클럽의 모래성을 가차없이 무너트린다. 카렌이 생각했던 친목 모임의 성격이 한 번에 드러난 것이다. “나는 이 집단 안에서 자 자신을 잃고 있었다. 따스함, 서로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내 머릿속에서만 있었다.” 그리고 다시 느낀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캐릭터, 외모, 결혼 생활과 가족을 샅샅이 분석하고,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는 일은 흔했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면 늘 내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이제 내가 쫓겨나고 보니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게임을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 늦은 깨달음은 늦었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충분하다.

 

누군가가 죽는 스릴러에서 범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빼놓을 수 없다. 한 남자를 계속해서 가리키지만 왠지 어설프다. 이 남자를 뒤지는 형사의 행동도 그렇게 치밀하거나 강한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카렌의 수사가 너무 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형사나 다른 가족들의 노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게 된다. 가족은 정신이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경찰은 어떨까? 자살이란 선입견에 빠져 더 파헤칠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은 추리소설을 봐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일까? 이런 것과 달리 욕망과 관계를 아주 멋지게 묘사한 부분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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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 지양어린이의 세계 명작 그림책 52
모르텐 뒤르 지음, 라스 호네만 그림, 윤지원 옮김 / 지양어린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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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그림으로 가득해 한달음에 끝까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현실에 있었던 이야기를 저자가 상상을 조금 덧붙여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아픔과 비극은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나에게 피상적이지만 조금만 그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묵직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이 슬픈 이야기는 시리아 내전이란 참혹한 현실을 알아야만 그 깊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슬픈 이야기와 그림만으로는 그것의 반도 알 수 없다.

 

2015년 터키의 한 해수욕장에서 세 살 소년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시리아 난민 어린이다. 이전까지 다른 나라의 불행한 역사가 이 사건을 계기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흔히 말하는 시리아 난민 문제가 공식적으로 세계인들에게 부각된 것이다. 이 그림책은 이 소년의 죽음에서 모티브와 주제를 얻었다. 한 소녀 아미나를 등장시켜 왜 그녀가 작은 배를 타고 위험한 망망대해를 떠돌게 되었는지 보여주면서 한 소녀의 죽음 이면에 있는 한 국가의 비극을 아주 잘 보여준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장면들 없이도 한 소녀의 익사 과정과 과거를 배치하면서 강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현실의 참혹함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극은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내전이 있었다고 해도 어린 소녀에게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한다면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최소한 아미나에게는 그랬다. 엄마와의 술래잡기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함께 먹은 음식이 제대로 재료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나 따뜻한 기억이었는지 등이 간결한 그림과 더불어 잘 드러난다. 풍랑 속에 침몰하는 배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아미나의 기억이 연결되는 순간 작은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작가에게 이런 희망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소녀의 짧은 행적을 통해 그 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술래잡기는 들키지 않기 위한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가 찾아주길 바라는 게임이다. “나를 찾아줘”란 대사는 한 소녀의 절규인 동시에 시리아 내전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작은 희망을 의미한다. 제노비아란 제목도 시리아의 유명했던 여왕의 이름에서 빌려왔는데 이 모든 것들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아미나의 어머니가 딸에게 바란 것이 이 제노비아 여왕 같이 당당하게 사는 것이지만 현실은 절망적인 참혹함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제노비아 호의 침몰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런 간결한 장면과 배치를 통해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한다. 그리고 그 현실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이 시리아 난민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대상 연령을 초등학생으로 잡았는데 이 그림책을 읽고 난 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그들이 품게 될 의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또 어떨지도. 과연 이 초등학생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도. 역사를 알고, 그 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냥 슬픈 이야기에 그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사람에게 더 맞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어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책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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