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시선 K-포엣 시리즈 6
김현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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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카페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된 시인 중 한 명이 김현이다. 한 권의 시집도 읽은 적이 없지만 왠지 낯익은 느낌이다. 당연히 이런 착각은 실제 경험과 만났을 때 다양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최소한 이번 시집의 경우에는 반갑고 즐겁기보다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어려움이 먼저 다가왔다. 2015~6년 사이에 쓴 시 중에서 20편을 골랐고, 애초에 ‘목소리의 미래’라는 큰 그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자신은 이 시집의 제목을 ‘슬픔의 미래’라고 이름 붙였다. 먼저 이 정보를 알고 읽었다면 조금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뭐 자신은 없다.

 

“각주 대신 음향과 이미지를 동기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각주처럼 달린 글들을 읽었지만 음향도 이미지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이 시인의 언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아마 시에 좀 더 집중하지 못했고,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시인의 이미지가 조금씩 발걸음을 무겁게 한 모양이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돌의 존재도 인식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내가 그린 이미지 속에 돌들은 없었던 모양이다. 있었다고 해도 비중이 적었을 것이다.

 

시에 갑자기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나올 때는 뭐지? 하는 느낌이었다. 해석을 읽고 겨우 시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대충 시집을 넘겨보다 보니 이번에는 수많은 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때까지 시집을 어떻게 읽은 것일까? 뒤로 가면 하라 세츠코란 실명이 또 한 번 나온다. 이런 인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해보다는 의문이 더 많았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시어들은 그냥 놓고 보면 쉬운데 같이 묶어 놓으니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시의 매력이지만 그 이미지를 그리는데는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안지영의 평에 공감한다. “김현은 우리의 삶이 단일하게 해석될 수 없으며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손아귀를 빠져 나가는 해석 불가능의 대상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이 문장은 김현의 시를 읽은 지금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아마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를 몇 번이고 읽고 읽고 읽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언제 시간이 되면 이 시집의 몇 편은 소리 내어 읽어봐야겠다. 가끔 이렇게 소리를 통해 시에 다가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더 해야 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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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시선 K-포엣 시리즈 5
안상학 지음, 안선재(안토니 수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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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시집을 읽기 전에는 안상학이란 시인을 몰랐다. 아주 가끔 시집을 읽는데 이런 시집들도 대부분 이미 잘 알려진 시인들이다. 물론 어딘가의 시선집에서 그의 시 한두 편을 읽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집 한 권을 읽은 적은 없다. 그래서 선택할 때 조금 주저했다.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선택을 잘 했다. 우연히 새벽에 일어나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일상을 그려내는 시부터 사회 문제를 다루는 시까지 다양한 시들이 나오는데 나의 감상과 해석이 달라 조금 어리둥절한 부분이 있다. 해설에는 무위자연과 음양을 중심으로 풀어내었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시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나의 입장에서 이런 해설을 볼 때는 늘 당혹스럽다. 무작정 나의 이해만 주장하기에는 나의 내공이 부족하고, 그 해설이 시를 다른 방향에서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벼랑의 나무>였다. “머리도 풀어헤쳤고/ 그 어느 손도 다뿌리쳤으니/ 사뿐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신발만 벗으면 홀가분할 것이다.” 이 시구를 보고 자살과 절망을 느꼈는데 해설은 깨달음의 절대성으로 풀어낸다.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얼굴> 이 글을 보고 우리의 삶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이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좀 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까? <평화라는 이름의 칼>이란 시는 평화를 가장한 평화라는 이름의 칼에 의해 학살 당한 사람을 기리고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절대, 평화를 가장한, 평화라는 이름의 칼, 그 칼날에 배식을 맡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이런 평화를 가장한 칼들이 춤추고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도 그 칼에 당한다.

 

<내 손이 슬퍼보인다>에서 직립하는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소유를 갈망하고, 폭력을 행하고, 군림을 바라는지 보여준다. 빌어먹던 손이 소유의 손이 되기도 하고, 칼을 빼앗아 살수를 휘두르기도 하는 이 손들은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한 삶이다. “두 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싸움을 재생산하는 역사다.” 멋진 시어다. 이런 무거운 시만 있다면 조금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아배 생각>에서 유쾌한 부자 간의 대화를 보고 빙그레 웃고, <노정>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슬픔의 출처는 사랑이다.”라고 말할 때 잠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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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챈스의 외출
저지 코진스키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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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소설이다. 두 작품은 한 인물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 때문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행동이 역사와 엮이면서 풀려가는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럴싸하게 보인다. 이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의도를 행동을 오해하고 자신이 생각한대로 해석한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다. 황당하지만 재밌다. 이런 영화나 소설 이전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있었다. 바로 이 소설 <정원사 챈스의 외출>이다.

 

원제는 <Being there>이다. 제목 그대로 챈스는 거기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 그는 어느 부자 어르신의 집에서 정원사로 산다. 그러다 이 노인이 죽었다. 변호사들이 와서 유산을 정리하는데 어느 서류에도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은 이전에는 라디오였고, 이제는 TV. 만나는 사람은 가정부와 그 노인 밖에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일 때문에 온 잡부들과도 만난 것이 드러나지만 서류상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태어나서 그곳에서 정원사로 일한 그지만 그의 실존을, 관계를 증명해줄 서류가 없다. 이런 그가 집을 떠난다. 그리고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이 우연한 사고가 그를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치료를 위해 금융사 회장의 집으로 옮겨지고, 치료와 간호를 받는다. 사실 그는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세상 일은 TV로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무지와 순수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든다. 회장이 그에게 던진 질문을 정원사로써 설명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음에 쏙 든다. 이 일로 챈스는 대통령까지 만나게 된다. 이때도 그가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정원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자신이 바라는 대답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오해한다. 이 일로 챈스는 세상에 알려진다. 방송에도 나가고, 그의 침묵과 대답에 환호한다. 단지 그는 거기 있을 뿐이데.

 

오해의 시작은 역시 사고 후 그의 이름을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일을 설명하는 가드너를 이름 가디너로, 죽은 노인의 옷을 보고 부유한 사업가로, 그가 사실을 말하면 사실 그 자체보다 의미를 더 만들어낸다. 이런 오해의 극치는 러시아 대사와의 만남에서 일어난다. 러시아 우화를 원서로 읽었다는 착각을 하고, 그의 있는 그대로 답변을 우호적으로 해석한다. 대통령이 그를 말하고, 금융회사 이사로 책정될 것이란 소문이 돌자 주시하고 포섭해야 할 대상으로 변한다. 그의 정보가 최대한 필요하다. 이것은 그를 중용하려는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작은 소동은 또 다른 재미다.

 

챈스는 언제나 거기 있다. 그는 사람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들은 그의 답변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는다. 물론 그의 말이 모두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적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반감을 표한다. 그런데 이 반감도 챈스가 말하고자 한 것을 오해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지명도가 올라가면서 그를 유혹하는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실제 경험해본 적이 없다. TV의 수위는 뻔하지 않는가. 이때 벌어지는 해프닝은 그에게 수컷의 본능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실제 존재하나 서류상 존재하지 않고, 그의 존재는 온갖 오해의 온상이 된다.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재미와 함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량도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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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
윤영수 지음 / 열림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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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두툼한 책이다. 거기에 한쪽의 분량도 최근에 나오는 책들보다 많다. 한쪽 분량을 적게 편집한 책대로 하면 천 쪽도 넘을 것이다. 아마 최근에 읽은 한 권짜리 책 중에서 가장 두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통 이 정도 분량이면 일주일을 꼬박 읽어야 한다. 가독성이 좋다면 3~4일 정도 걸린다. 처음 며칠은 생소한 내용과 설정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말해 지루했다. 실제로 이 책은 일주일 이상 걸렸고, 지루함 속에 다른 책도 두 권 정도 읽었다. 그러다 설정에 익숙해지고, 전개가 바뀌면서 가속도가 조금씩 붙었다.

 

한국형 판타지라는 말해 혹했다. 예전에 읽은 <착한 사람 문성현>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두툼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작가가 풀어내는 세계를 나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설정한 세계를 작가 자신도 제대로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작가 나름대로 단풍동과 다른 나라를 창조해내었지만 그 속에 풀어낸 이야기들과 충분히 어우러지는 느낌은 없다. 특히 단풍동의 풍경과 그 속에 살아가는 다양한 종족들은 초반에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맑은이, 하얀이, 황인, 햇빛족, 땅옷족 등은 개별 설명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야 겨우 감을 잡았다.

 

검은머리짐승이 우리 기준에서 인간인데 이 세계에서는 짐승으로 불린다. 다른 세계로 떨어진 준호가 바로 검은머리짐승이다. 그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의사였다. 그것도 70대의 노인이었다. 보통 단풍동에 이 짐승들이 나타나면 바로 죽임을 당한다. 이 이유는 마지막에 가서 풀린다. 준호는 연토가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살아남았다. 그가 가진 지식은 동굴국에서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하지만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맑은이 등에게 그는 냄새나고 더러운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토가 짚을 내어주고, 음식을 먹고, 씻을 수 있게 해주면서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연토를 통해 이 동굴국을 조금씩 이해하고, 계속해서 자신이 살던 셰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어른이와 어미산에서 캐어오는 자식들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다. 이들이 자식을 얻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다. 다 자란 아이를 어미산에 부부가 올라가 칠성함에 넣어 데리고 온다. 이후 이 크기를 유지하다가 늙게 되면 크기가 줄어든다. 보통 우리의 성장과 반대다. 이 다름을 작가는 꾸준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른이들은 빛이 없어도 문제없다. 연토가 장대한 여행을 떠나면서 경험하는 밝은 빛의 세계는 그에게는 고통이다. 물론 익숙해진다. 그런데 빛과 색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들은 색깔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하고. 현대 과학을 뛰어넘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이들은 물이 없다면 생존할 수도 없다. 이런 점은 나무 인간에 가까운데 이야기 속에 나무 인간들이 별도로 나온다. 준호가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죽은 것으로 착각하는데 이것이 이들의 삶의 방식 일부를 보여준다. 집안에는 물길이 있고, 샘물을 소유한 집안은 세금을 받는다. 옛날 하나의 물길에 독이 풀려 많은 어른이들이 죽었다. 이 독초 사건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가면서 풀린다. 작가는 이렇게 앞부분에 많은 것을 만들고, 설명하고, 그려내고, 차이를 드러내야 했다. 그 사이 사이에 작은 이벤트를 집어넣어 긴장감과 재미를 불러왔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부분이 부족하다.

 

곳곳에 한자를 한글로 풀어내었는데 한국어의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단지 한글로 풀어낸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기존의 판타지를 많이 읽었던 독자들이라면 이 세계에 그렇게 감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규모나 설정에서 아쉬움을 느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다른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아마 개인의 경험과 이해 정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연토가 준호를 만나고, 여행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부분들은 한 편의 성장소설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당연한 것이 기적이오. 하루하루 해낼 일을 사고 없이 해내는 것이 기적이오.”라는 평범한 말이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들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적이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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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울다
거수이핑 지음, 김남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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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넷을 담고 있는 중편집이다. 이 중에서 표제작인 <산이 울다>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중편집에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생활한다. 마지막 작품인 <시간을 넘어>만 현대의 시간을 직접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전에 읽었던 중국 작가의 시골 풍경이 이 작품 속에서도 느껴졌다. 순박하지만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과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들 말이다. 위화나 모옌의 작품 속에서 느낀 것과 전체적인 분위기도 다르다. 아마 이 네 작품 속 여주인공들의 삶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산이 울다>는 한 산마을에 라홍 가족이 이사 온 후 생긴 일을 다룬다. 여자 홍샤는 예쁘지만 벙어리고, 가족은 구걸을 하면서 산다. 마을 청년 한충이 살 곳을 내줬는데 오소리를 잡기 위해 설치한 폭발물에 라홍이 죽는다. 마을 간부는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들이 해결하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남은 홍샤 등을 돌보고 배상해야 한다. 한충에게는 내연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충을 이용만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틀어지고, 홍샤의 비밀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어처구니없지만 참혹한 과거 이야기는 평범한 듯한 이야기에 한 인간의 숨겨진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하늘 아래>는 긴 세월을 다룬다. 롼친이 항일전쟁 당시 무장대 리만탕을 구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수십 년이 흐른다. 남편 훠창뤼는 은전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의 내기에 발을 내딛는다. 이 때문에 돈은 벌지만 몸이 망가진다. 리만탕은 차용증을 쓴 후 은전으로 식량을 구해 돌아가고, 훠창뤼가 돈을 벌었다는 소식은 그녀의 친정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돈이 있다는 소문은 빌려달라는 요청으로 이어지지만 실제 그들 손에 돈이 없다. 비난만 가득하다. 그들은 이후로도 평범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재밌는 대목들은 리만탕이 성의 높은 지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려는 그녀를 말리는 마을 간부들이다. 문제 거리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함축적이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지막 리만탕소학교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채찍돌림>은 읽으면서 불길한 예감을 품게 만든다. 한 편의 추리소설과도 같다. 왕인란의 남편 마우가 고환 두 쪽이 묶인 상태로 죽고, 이후 결혼한 남편마저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기구한 운명이다. 이런 왕인란의 곁에는 마우의 종이었던 테헤이가 있다. 테헤이는 왕인란이 마우의 둘째 부인으로 올 때부터 관심을 둔 인물이다. 마우가 인민재판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사실 마우는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모았지만 지주라는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출신성분은 그 가족에게도 이어진다. 이런 시대상과 더불어 하나의 무서운 욕망이 삶에 끼어든다. 예상한 것처럼 잔혹한 행위는 없지만 의도는 잔인하다. 마지막 장면은 채찍돌림처럼 큰 울림을 전해준다.

 

<시간을 넘어>는 딸의 실종 사건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처음에는 어린 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열여덟 살의 리리다. 이 딸의 실종은 쑤홍 가족에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리리가 남편 야오량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과 쑤홍이 도시에서 몸을 판 것이다. 여기에 도시에서 발견된 조각난 사체의 주인이 리리일 줄 모른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이야기가 풀려가면서 나오는 쑤홍의 과거와 리리의 도시행은 살짝 닮은 모습을 가진다. <산이 울다>의 홍샤가 겪었던 일도 리리와 이어진다. 여자라서 겪어야 했던 비극들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쑤홍이 선택한 문제 해결은 현실 도피다. 자신이 만든 환상 속 세계다. 이곳이라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리콴청의 생각은 남자의 또 다른 현실 도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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