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 소녀 Wow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도나 조 나폴리 글,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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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Fish Girl”이다. 표지만 보면 인어 공주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 그래픽노블은 인어 공주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으로 변한 후 물거품이 된 그 이야기 아니다. 인어 소녀의 정체는 이야기 속에서 아주 불분명하다. 인어 공주처럼 물 속에서 살고 물고기와 문어와 소통하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다리가 생긴다. 마녀의 마법이 작용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외관 상 평범한 수족관 관장이자 넵튠으로 변신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어 소녀는 리디아란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수족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넵튠의 공연이나 설명을 위해 작은 연출을 할 뿐이다. 인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이들에게 잠시 보여준다. 절대로 본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그런데 리디아가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본다. 인어 소녀에게 리디아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친구다. 자신이 살고 있는 수족관 밖의 세계를 알려준다. 이 작은 접촉이 그녀로 하여금 수족관 밖으로 나갈 용기를 준다. 물밖에 처음 나갔을 때는 하반신에 통증이 왔다. 문어의 도움으로 다시 수족관 속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다음 시도에서 하반신이 다리로 바뀌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수족관에서 넵튠은 바다의 신을 연기하고 인어 소녀에 대한 관심 등으로 돈을 번다. 관객이 던진 동전을 인어 소녀가 주워주고, 입장료와 인어 소녀 관련 옷을 팔아 수족관을 유지한다. 많은 관객들이 들어와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인어 소녀가 자신의 존재를 살짝 살짝 보여주면서 소년 소녀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혹시 소년 등이 그녀를 보았다고 말해도 어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넵튠이 지적한 어른의 문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인 ‘나잇값’이니 ‘현실’이니 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은 오션 원더스 수족관의 영업 비밀이기도 하다.

 

이름도 없던 인어 소녀는 리디아를 통해 이름을 얻게 된다. 미라클에서 따온 ‘미라’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미라는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진다. 어느 날 밤에는 홀로 수족관 밖으로 나간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 수족관이다 보니 금방 해변에 도착한다. 바닷물이 그녀의 발에 닿으면 다시 비늘이 돋아난다. 바닷물이 다리에 닿았을 때 “안 돼! 안 돼! 바다가 날 잡으려고 하잖아!”하고 말한다. 마르면 두 다리로 변한다. 밤의 외출은 신기하고 즐겁지만 아직 미라에게는 힘든 일이다. 리디아에게 요가를 배워 다리 근육을 키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리디아와 함께 피자도 먹고 같이 수족관에서 수영도 한다. 순수한 소녀들의 만남이자 놀이다. 이것을 본 넵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어 소녀는 그 자신에게 종속된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라의 정체가 드러나면 실험체로 바뀔 것이라고 계속 주장한다. 이 공포는 리디아가 미라를 돕기 위해 어른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말하려고 할 때 강한 반대로 표출된다.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인어를 그대로 둘 인간들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리디아의 순수함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이자 미라에게 주입된 교육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갇힌 세계 속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미라가 인간과 함께 지내려고 노력하자 수족관 속 물고기들이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어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만화에서 주목해야 할 존재 중 하나가 문어다. 묵묵히 미라의 곁을 지키고, 도와주는 존재이자 어느 날은 파괴자로 변신한다. 그의 대답없는 모습은 밖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추측이 가능하다. 바다와 문어의 도움으로 수족관을 벗어난 그녀의 미래를 보면서 결코 밝은 미래를 떠올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인어의 존재를 믿지 않는 어른처럼 그녀 앞에 펼쳐질 어둡고 힘든 미래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현실의 때가 너무 많이 묻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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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기담
전건우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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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고시원의 풍경은 방송으로 본 것이 전부다. 공간의 크기만 놓고 본다면 학창시절 나의 하숙방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둘이 있었고, 다른 하숙방의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 둘이 있지만 밖이 열린 공간이다 보니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시원은 한 평이란 좁은 공간에 많은 집기를 넣어놓았고, 열린 공간이 없고 다른 방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이 익명의 공간은 사람들을 점점 고립시킨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멋진 장르 복합물을 만들어내었다.

 

303호 홍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316호 외국노동자 깜과 311호 취업준비생 편, 311호 아저씨 최, 317호 소녀 정으로 이어진다. 이 사이 사이에 비정성시를 패러디한 비정묘시가 들어가 있고, 이 이야기 속 고양이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려준다. 그리고 고문고시원의 유래를 설명한 첫 이야기와 맞물리는 마지막 유령들이 등장한다. 각 방의 화자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각각의 장르가 드러난다. 공포, 추리, sf, 무협, 스릴러, 액션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연결이 상당히 부드럽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는 기묘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부분이 몰입도를 높인다.

 

고시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증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창문이 있으면 월세를 3만원 더 내야 한다. 이들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이 닫힌 공간이 그들의 절박한 환경과 맞물려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작은 관심이 어느 순간 이 고시원이 완전히 닫힌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인물이 바로 303호 고시생 홍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문고시원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깨트리는 첫 발자국을 내딛는 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가 귀신과 대화를 하고, 옆방에 관심을 두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316호 깜은 외국노동자다. 한때 개그프로그램에서 흔히 하던 말을 그는 수시로 내뱉는다. ‘괜찮아요.’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기에 아파도 힘들어도 이 말을 낼 수밖에 없다. 그가 초능력을 얻게 된 과정도, 이 초능력으로 사람을 구했을 때 보인 사람들의 반응도, 그의 신상이 털려 인터넷 개인방송에 이용당할 때도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자 피해자였다. 이런 그에게 고시원의 작은 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식처다. 이 고시원에 대해 휴식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 311호의 매일 죽는 역할을 맡은 최와 317호의 킬러 소녀 정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상황은 다르다. 그렇지만 이 고시원의 공간이 주는 평온함은 같다.

 

313호 편은 무협을 사랑한다. 아니 협객을 동경한다. 이것이 취업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였던 도서대여점 사장을 만나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위한 비법을 전수받는다. 무협의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무협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면접을 보고, 최종 단계까지 마친 그가 마주한 것은 너무 강력한 신공이다. 지인소개, 낙하신공. 311호 최는 빚을 지고 자살한 것처럼 꾸민 후 사라졌다. 그런데 시체가 없다 보니 그의 부채가 남은 가족에게 전가되었다. 아내의 전화 한 통은 실종자에 노숙인으로 살았던 그에게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트레스 해소방에서 매일 죽는 연기를 한다는 것은 그의 실제 삶과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를 죽이는 방식과 동일한 실재 사건을 마주한다.

 

317호 정은 소녀 킬러다. 킬러였던 아버지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다. 그녀는 알바를 하면서 열심히 사는데 그녀의 이력을 아는 사람이 다가온다. 그녀의 살인은 도시 전설처럼 퍼진다. 그러다 한 무당의 살인 의뢰가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꼬인다. 그 무당은 죽어야할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당을 구하기 위한 그녀의 활약은 한 편의 액션영화와도 같다. 이런 각 방의 사람들이 모여 위기에 빠진 고시원과 그 일원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 적은 뱀 사나이, 얼음장, 괴물 등으로 불린다. 여기에 고시원에 살고 있는 유령들이 합세했다. 장르 복합적인 이야기는 어느 순간 거대한 적과 마주하고, 각각의 인물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어두운 현실에서 이들의 연대는 작은 빛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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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지막 날들
그레이엄 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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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재 우리는 빛의 공해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어둠은 우리의 가장 큰 공포였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결코 적지 않았다.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달빛조차 없다면 밤길은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밤의 어둠은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햇불과 촛불로 밤의 어둠을 조금씩 물리쳤지만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19세기 가스등이 등장해 밤을 밝혔지만 아직 어둡다. 그러다 19세기 말 전기가 발견되고, 우리는 어둠을 우리 영역 밖으로 밀어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그 시절에 있었던 과학자와 발명가 등의 전류 전쟁을 멋지게 그려내었다.

 

에디슨. 자라면서 배운 가장 유명한 발명가다. 우리는 그의 발명가 정신과 발명품을 배웠지만 그의 삶에는 지저분한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가 관심을 가졌고, 집중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는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상품들이 꽤 많다. 에디슨의 전기와 함께 말해지는 인물이 한 명 있다. 테슬라다. 지금은 전기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지만 그가 발명한 교류 전기는 전기 산업에 혁신을 불러왔다. 물론 그 당시는 이 교류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과 음모가 있었다. 과거의 두 발명가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웨스팅하우스다. 그는 에디슨의 전구 때문에 10억 달러 소송이 걸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된 변호사가 바로 주인공인 폴 크라배스다.

 

폴은 경력이 풍부한 변호사가 아니다.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작은 법률사무소의 파트너가 된다. 그가 웨스팅하우스의 변호사가 된 것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많은 변호사들이 에디슨과 싸우길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보 변호사는 열정 가득하지만 경험은 많이 부족하다. 작가는 이 부분을 이용해 한 변호사의 성장과 전류 전쟁의 이면을 멋지게 그려내었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에 기반을 하고 있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긴 시간을 짧은 시간 안에 압축하기도 하고, 실제 사건을 가공해서 실제 내용과 다르게 바꾼다. 사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를 또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한다. 이 부분은 저자의 참고 자료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실존 인물들을 다룬 팩션이다. 하지만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설다. 워낙 유명한 에디슨을 제외하면 테슬라 정도가 유명인이다. 웨스팅하우스를 검색하면 자료가 나오지만 이 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지도와 달리 웨스팅하우스를 포함한 이 세 명의 발명가들은 특허경쟁과 함께 우리 삶에서 어둠을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전기, 전구, 교류 등이다. 발명가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대단한 에디슨과 달리 웨스팅하우스는 기계 쪽에 더 능력이 좋았다. 테슬라는 발명가이자 몽상가다. 작가는 이 세 사람의 역할을 나누고, 대립하고 경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폴을 넣어 음모와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고, 서로의 관계를 이어간다.

 

초짜 변호사의 실수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 열정과 노력은 수많은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든다. 이 과정은 단숨에 진행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폴의 로맨스도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대상은 오페라 가수 애그니스 헌팅턴이다. 그녀는 폴에게 많은 영감과 정보를 제공한다. 그가 무작정 벽을 두드릴 때 그녀는 그에게 벽 뒤에 있는 것을 알려준다. 벽을 부술 무기를 제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단순한 로맨스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테슬라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에디슨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둘의 로맨스는 아주 고전적이다.

 

500쪽이 조금 넘는데 읽는데 부담스럽지 않다. 세 명의 발명가를 내세워 현대 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에디슨과 벨의 특허경쟁이 나와 작은 재미를 주고, 에디슨이란 벽을 무너트리는 단서를 제공한다. 폴은 에디슨의 발명 시스템에서 새로운 변호사 시스템을 만든다. 이런 모방과 발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다 빠르게 나아간다. 자본주의 초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이익과 탐욕은 끝없이 자란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테슬라의 과거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반가웠다. 그리고 폴이 에디슨과의 소송에서 이기는 과정들과 그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흥미로웠다. 각 장마다 유명인의 문장을 인용한 것도 아는 만큼 유익했다. 믿고 읽을 수 있는 팩션 작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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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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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작가가 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장편 소설이자, 오늘날까지 원본이 완전하게 보전된 유일한 라틴어 소설에, 세계 최초의 액자 소설이다. 멋진 책 소개다. 보통 이런 작품들의 경우 읽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아주 재밌고 잘 읽힌다. 매우 선정적이고 방탕하다는 평이 덧붙여져 있는데 동의한다. 원색적인 표현에 그림까지 더해지면서 고대 작품들 중에 이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물론 그림은 에로틱한 고전 작품들의 삽화를 그린 벨기에 태생 장 드 보쉐르의 작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적인 묘사에 놀란다.

 

루키우스가 화자인 1인칭 소설이다. 그가 여행을 하던 중 들은 이야기와 당나귀로 변한 후 모험을 다룬다. 인간들의 원색적인 욕망과 마법과 마녀와 신화 등이 뒤섞여 있다. 기발한 상상력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추악한 욕망이 만들어내는 비극도 같이 나온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어 그 상황을 설명해준다. 액자구성인데 이어지는 액자구성이 아닌 독립적인 이야기들이다. 단순히 액자 속 이야기만 놓고 보면 간단한 단편 소설로 간주해도 큰 무리가 없다. ‘쿠피도와 프쉬케의 사랑’ 같은 장은 실제로 아주 긴 이야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루키우스가 당나귀로 변한 것은 마녀와 마법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원래 그가 원했던 것은 새인데 약을 잘못 사용해 당나귀로 변했다. 장미꽃잎을 먹으면 인간으로 다시 변신할 수 있는데 기회가 생기질 않는다. 외모가 당나귀이다보니 그를 잡아 짐을 싣는다. 이 소설에서 수많은 모험과 액션과 이야기들이 풀려 나오는 부분은 바로 당나귀로 변한 이후다.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모는 당나귀인 그가 무방비의 사람들로부터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녹여내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속에는 인간의 탐욕, 색욕, 질투, 사랑, 복수 등 다양한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 잔인하고 원색적으로.

 

당나귀로 변신한 이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주인들이 바뀌면서 그의 삶도 많은 굴곡을 겪는다. 몇 번은 살해의 위협 속에 노출되고, 또 어떤 순간은 거세될 뻔 했다. 처음에 도둑들에 끌려가 겪은 일들은 한 마리의 당나귀가 실제 겪는 일들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바로 죽이는 냉정한 도둑들의 행동은 화자를 바쁘게 움직이게 만든다. 이후에 다른 주인 밑에서 일하지 않기 위해 꾀를 부려보지만 현실은 매 타작 뿐이다. 인간 같은 행동의 결과가 파렴치한 살인자와의 공개 성행위로 이어질 뻔한 적도 있다. 이런 당나귀의 모험은 나에게 인간들이 동물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습고 비극적이고 외설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황당하기까지 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간다. 그가 죽을지도 모르고, 거세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긴장감을 느낀다. 그가 뒷발로 사람들을 찰 때 잠시 통쾌함을 느끼지만 당나귀의 한계는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되면 다른 사건이 발생해서 그 위기를 벗어난다. 물론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변신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인간으로의 변신이 갑작스런 종교로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힘이 약해진다. 다른 마무리도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데카메론>이 떠올랐는데 해설을 보니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 등은 주석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조금 힘들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이름 비교표를 부록이 아닌 앞부분에 놓았다면 몇몇 이야기는 이해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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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오기 전에 - 죽음 앞에서 더 눈부셨던 한 예술가 이야기
사이먼 피츠모리스 지음, 정성민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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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 극소수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심한 병을 앓고 있다. 시한부인생이란 의미다. 이 에세이의 저자 사이먼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루게릭병을 앓았다. 통상적 생존기간은 4년이라고 하는데 그는 살고자 의지가 가득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그 시간을 더 늘렸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일 수 있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일들을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에세이다. 동공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아이게이즈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 것이다.

 

많은 분량이 아니다. 긴 문장보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이 많다. 아이게이즈 때문일지, 아니면 자신의 문장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문장의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글도 많다.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는 저자의 의지가 이 에세이를 통해 그의 삶을 그려낸다. 2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1부는 아내 루스를 만나고, 다섯 아이를 낳고, 병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는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데 루스를 만나기 전 삶이 많이 나온다. 이 삶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변화가 없는 밋밋한 삶인지 알게 된다. 많은 여행과 수많은 경험은 부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병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그에게 루게릭병도 마찬가지다.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이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감독에게 이것은 거짓말 같은 일이다. 아내 루스의 첫 인상과 다시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행복한 삶은 이 거짓말 같은 병으로 인해 순식간에 파괴된다. 하지만 그는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공호흡기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현실과 의지를 충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그는 민간요법부터 사이비까지 하지 않은 것이 없다. 현실은 잔혹하게도 그에게 기적을 일으키게 만들지 않았다.

 

루게릭병을 앓는다고 금방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은 예정되어 있다. 얼마나 조금 더 사는가의 문제다. 이 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넷째와 다섯째를 얻었다. 그의 병은 여전히 그의 삶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진실은 이것이다. 더 나은 삶이 우리 모두를 돕고 있다.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햇살처럼.” 그는 병을 앓고 있지만 여행을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기억에 새긴다. 그리고 글로 남긴다. 글쓰기가 나의 마지막 투쟁이다.”란 문장은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대신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가슴이 아린다.

 

살고자 하는 의지. 이것을 한 편의 영화 속에 녹여 내려고 했다. “인생이 안겨주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려는 의지,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려는 의지, 사랑을 품고 살아가려는 의지, 인생의 길을 찾으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의지.” 이것은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내 루스에 대한 사랑은 곳곳에 남아 있다. 시점을 바꿔 루스는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나는 살아 있다.”라고 말하다. “어둠 속, 깊은 어둠 속에서, 오직 음악과 나뿐이다.”란 문장을 읽고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다. 어둠이 오기 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의지는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짧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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