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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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의외일 수도 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제대로 영화를 본 것이 몇 편 되지 않는다. 본 영화도 대부분 오락 영화였다.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이전에는 반드시 봐야할 영화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아니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다른 것에 시간이 빼앗기면서 이런 영화를 볼 시간이 상대적으로 없다. 하지만 가끔 좋은 소설을 읽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상영한 영화의 제목은 <어느 가족>이다. 이 소설은 영화를 원작으로 감독이 썼다. 감독이 영화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가족의 비밀과 결정적 순간의 디테일들을 담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지 않아 직접 비교하기 힘들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은 부분을 생략하지 않는가. 아마 영화를 보게 되면 더 많은 부분이 나의 머릿속으로 들어올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이 그려낸 섬세함과 다른 장면들에 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런 영상과 소설의 혼합 작용은 늘 있어왔다. 대부분 영화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지만.

 

다섯 명이 한 집에 산다. 할머니 하쓰에. 아버지 오사무, 어머니 노부요, 어머니 이복동생 아키, 아들 쇼타 등이다. 이런 집에 유리가 들어온다. 여섯 명이 한 집에 살지만 실제 돈을 버는 사람은 노부요와 연금수령자 하쓰에 밖에 없다. 아키도 어느 정도 벌지만 생활비를 내놓지는 않는다. 이런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좀도둑질이다. 오사무와 쇼타가 한조가 되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친다. 적은 돈으로 고르케를 사서 가족들이 나눠먹는다. 이때 한 꼬마가 집밖에서 떨고 있다. 바로 유리다. 나중에 그녀의 이름은 린으로 바뀐다.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족들은 그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유리가 이 집에 들어온 것처럼 한 명씩 합류했다. 쇼타가 어떻게 이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장면이나 아키의 집안 이야기 등은 조용히 하나의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풀린다. 처음에는 하쓰에와 오사무가 진짜 엄마와 아들 사이인 줄 알았다. 오사무와 노부요도 진짜 부부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이 가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오사무가 말한 것처럼 가슴으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진짜 가족 그 이상이다. 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법과 유괴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11살 쇼타와 5살 유리에게 좀도둑질을 시킨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이 가족에게는 그런 윤리적 잣대를 갖다 대면 가족이 성립할 수 없다. 노부요도 세탁소에서 옷 속에 들어있는 작은 물건을 슬쩍 훔친다. 하쓰에도 파친코 구슬을 훔친다. 이 가족에게 작은 도둑질은 일상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쇼타가 아키가 바라는 샴푸를 가져오지 않았을 때, 다른 제품을 가져왔을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아주 좋다. 좋고 맛있는 것을 먹지 않지만 작은 배려가 곳곳에 드러난다. 유리가 학대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이 작은 아이의 가족이 되어준다. 친부모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은 쇼타도 마찬가지다.

 

이 가족의 파국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펼쳐진다. 통상의 관점에서 유괴가 이 가족에게는 보호가 된다. 아동 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오히려 밝게 만든 것도 이 가족이다. 유리가 다시 가족으로 돌아간 후 보여주는 몇 장면은 아주 상징적이다. 진심과 거짓이 공존하는 이 가족은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가족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이것에 대한 답을 작가는 내놓지 않는다. 각 개인의 몫이다. 이 좀도둑 가족도 아주 멋진 바다 여행을 한다. 아름다운 추억이다. 아마 영화에서 하이라이트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족을 떠난 두 아이들의 현재 모습은 진한 여운과 불안감을 던져준다. 씁쓸하고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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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우화
류시화 지음, 블라디미르 루바로프 그림 / 연금술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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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실수해서 한 마을에 바보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마을은 폴란드 남동부의 작은 마을 헤움이다. 실제 지명은 존재하지만 이야기 속 마을은 가상의 마을이다. 이 바보들만 모여 사는 마을을 떠올리면서 악마와 바보들의 마을을 소재로 한 단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읽다 보면 이 마을 사람들이 정말 바보란 것을 알게 된다. 처음 몇 편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답답했다. 이성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 현명한 해결책이 나올 때도 있지만 아주 일부다. 그러다 문득 몇몇 이야기에서 우리 삶의 모습이 보였다.

 

17세기부터 동유럽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짧은 이야기들에서 소재를 빌려 작가가 새롭게 재창작한 우화들과 그 이야기들에 영감을 받아 작가가 창작한 우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작가의 말에 잘 나와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읽다 보면 내가 이해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우리 삶을 그 속에 대입해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헤움 사람들처럼 바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그것과 비슷한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읽으면서 ‘저런 바보가 있나.’하고 말하다가도 움찔 놀라게 된다.

 

마흔다섯 편의 우화는 생각보다 빨리 읽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믿는 헤움 사람들의 행동을 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우화와 우리의 삶을 비교하는 시간을 자신도 모르게 가진다. <하늘에서 내리는 나무>를 읽으면서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말장난들이 떠올랐고, <바보들의 인생 수업>에서 4대강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연상되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말과 행동을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한데 단순히 잠깐 동안 눈을 가리기 위한 행동을 펼치는 것과 너무나도 닮았다. 물론 이런 행동에 동의하는 바보들이 늘 있다.

 

읽으면서 나는 바보가 아니구나 생각했지만 다 읽은 지금 자신할 수 없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헤움 사람들처럼 수많은 바보짓을 한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거나 최선이었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바보 같은 행동을 적지 않았다. 내 욕심에 눈이 가려져 앞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름 지혜로운 대처였다고 생각한 것도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보면 다른 좋은 방법들이 많이 있었다. 가끔 바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이익 우선이다. 이런 나를 돌아보면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바로 헤움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헤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 배우고 싶은 것도 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들의 해결책은 황당하고 바보 같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진심과 열의는 진짜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기 위한 마음이나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행동 등이다. 그냥 보기에도 간단한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며칠을 토론하는 모습은 논쟁을 피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우리의 삶과 대비된다. 이것 또한 읽으면서 바보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이 우화들은 읽은 이후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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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 할 만한 것 - 오시이 마모루가 바라본 인생과 영화
오시이 마모루 지음, 장민주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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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쉽게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주로 본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작품이었다. 영화 잡지 등에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관심이 높았는데 그 중 한 편이 <공각기동대>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주인공의 누드톤을 빼면 강하게 인상에 남는 것이 없었다. 기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뇌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들이 펼치는 활약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다 TV용을 보고, 인터넷과 전뇌에 대한 이해가 조금 깊어지자 다른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감독이 쓴 인생과 영화 이야기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두툼한 책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과 영화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말했듯이 이 책은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순위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그의 인생이나 애니메이션 스텝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말한다. 재밌는 것은 남녀의 차이다. 여자 스텝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생활력 때문이다. 남자 스텝들은 오타쿠가 많은 것 같은데 승진과 성취감이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그러니 현실적인 여성들이 이들을 남편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화를 그릴 때 더 빨리 많이 그려서 승진하려는 욕구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감독까지 올라오는 일은 없다.

 

그의 직업관은 명확하다. 능력 우선이다. 개인사는 사회적인 문제가 크게 되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는다. 감독이란 위치도 자신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감독이 촬영 현장에 늦게 나타나는 것도 다른 스텝이 말해 준 것이다. 그가 빨리 나타나면 다른 스텝들이 긴장하고 서두르게 된다. 프로듀스와 다투는데 이것도 서로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 일과 개인을 분리하고 있는데 그에게 최고의 파트너는 집에 있는 개다. 너무 관계가 밀착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기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삶을 살짝 엿봤다.

 

가짜뉴스와 정치로 넘어가면 그의 정치관에 조금 의문이 생긴다. 특히 공모죄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스럽다. 그는 “공모죄나 새로운 헌법을 어떻게 올바르게 운용해나갈 것인가”라고 말한다. 하나의 법이 만들어진 후 잘못 운용될 경우 바로 잡으면 된다는 생각일 테지만 현실은 이것을 악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신이 “그 기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 존재가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뒤에 숨겨놓은 인간의 악의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둔감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치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주제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

 

그의 글 중에서 내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원전 부분이다. 원전이 안전하면 도쿄 근처에 지어라는 말과 같이 서울에 원전을 지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이율배반적 표현은 곳곳에 널려 있다. 나도 물론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술이나 과학 등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보다 재밌는 게 없다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전쟁영화도 그 속에 사람들의 사연들이 담겨 있기에 감동을 준다. 이것은 <신 고질라>의 안노 히데아키의 영화를 비평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재밌지만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감독의 시선에서 본 평론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이해하는 영화의 깊이를 알려준다. 아직 <신 고질라>를 보지 않았는데 검색하니 정치 풍자극이란 평가가 많다. 조금 혼란스럽다.

 

아마 김지운 감독이 새롭게 만든 <인랑>이 상영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이렇게 빨리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김지운 판 <인랑>을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전 판과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아직 보지 않은 오시이 마모루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다. 어릴 때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알게 된 것이 있으니 영화 속에서 그의 철학을 조금은 찾아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영화감독들의 영화평을 읽고 뭔 소린가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들이 보는 세계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한동안 끊다시피한 영화를 다시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나의 우선순위에 조금 변화를 줄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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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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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바리코, 낯선 이름이다. 이 이름보다 더 낯익은 것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다. 물론 이 영화 본 적이 없다. 거의 20년 전 영화이다 보니 봤다고 해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저자의 이력을 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아! 그 소설의 작가다. 태국 여행 중 아주 재밌게 읽었던 그 소설. 다른 소설들을 번역해 주었으면 했던 그 작가. 그런데 이번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기 좀 그렇다. 1인극을 위한 모놀로그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노베첸토. 정식 이름은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다. 그는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났고 평생 배 위에서 살았다. 피아노 위에서 발견되었고, 선원 대니 부드먼 손에 키워졌다.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아 그 어떤 신고서에도 그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버지니아 호와 사람들의 소문 속에만 존재한다. 그는 천재 피아니스트다. 너무나도 뛰어난 연주를 하는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은 감정의 홍수 속에 파묻힌다. 1등실 손님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매일 3등실로 내려왔다. 이런 소문은 멀리 퍼져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실존 인물인 ‘젤리 롤 모턴’과 피아노 경합을 벌이게 된다. 이 장면은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 이미지를 그려보지만 음악은 머릿속에서 재생되지 않는다. 불협화음 가득한 재즈 몇 가락이 전부다. 영화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런 음악을 다룬 책들을 읽을 때면 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음악이면 이런 감정들을 불러올까 하고. 만약 이런 음악을 듣게 되면 나의 반응은 어떨까?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벤트가 하나 펼쳐진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은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하는 장면이다. 파도에 따라 배가 기우는데 그 움직임 속에서 그 어떤 충돌도 없이 멋진 연주를 한다. 마지막에 유리가 파손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면 아주 멋진 영상이 재생된다. 비현실적이지만 환상적이다. 이렇게 이 모놀로그는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노베첸토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다. 그런데 그날이 되자 몇 발자국 내딛은 후 포기하고 배로 돌아온다. 그 앞에 펼쳐진 더 넓은 세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와 피아노는 한계가 있는 곳인 반면 세상은 그에게 무한으로 다가왔다. 불안감이 그를 배에 묶어두었다. 88개의 건반으로 무한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세상의 넓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제2차 대전과 선박의 마지막이다. 버니지아 호가 폐선 처리될 때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고. 하지만 불안한 예측은 현실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모놀로그란 것을 의식하는 동시에 영화적 연출을 생각한다. 문장을 읽을 때는 모놀로그를,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영화다. 이런 의식적인 행동은 이 짧은 글에 다양한 재미와 깊이를 제공한다. 만약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나중에 본다면 영화의 이미지가 이런 상상력을 제한할 것이다. 또 작가는 장면과 상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강하게 힘을 주거나 연극적인 음성으로 읊조린다. 당분간 노베첸토의 이미지가 일상 속에서 불쑥 불쑥 떠오를 것 같다. 명확하지 않고 실체도 없는 음악도 이미지로 다가온다. 짧은 글이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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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국화
매리 린 브락트 지음, 이다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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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읽기를 주저했다. 한 여성의 참혹했던 삶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은 고통을 읽는 내내 떠올리며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떨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저는 자꾸 눈에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결국 읽게 되었고, 예상한 아픔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마지막 장으로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혀지고, 눈물이 흘렀다. 과거의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 할 때, 아미가 소녀상을 보고 떠난 언니를 떠올릴 때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여인이 주인공이다. 하나와 아미다. 이 둘은 자매다. 제주 해녀의 딸들이다. 하나가 언니고, 아미가 동생이다. 1943년 하나는 물질을 하다가 일본군이 동생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 앞에 나섰다. 일본이 어린 소녀들을 공장으로 데려가는 것을 알기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선택은 두 자매를 역사의 비극 속으로 끌고 가는 갈림길이었다. 하나는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고, 아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채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을 경험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하나에게는 1943년이란 과거 시간만 다루고, 아미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말하게 한다.

 

과거는 그 시점에서 현재다. 하나는 자신이 끌려갈 때 어떻게 될지 몰랐다. 모리모토가 그녀를 겁탈하고 그녀에게 집착할 때도 그녀는 자신이 삶이 성 노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제주에서 시작한 이동이 만주로까지 이어져 한 건물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성욕에 휩싸인 수많은 군인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에도 십 수 차례 겁탈이 이어졌다. 도착 첫날 한 여성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것을 안 게이샤 출신 위안부 케이코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 참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케이코가 뺨을 때린다. 이때 소녀들 몇몇이 소리죽여 운다. 위안소 속으로 다시 돌아갈 때 하나는 사라지고 사쿠라가 남는다. 그녀 속에 남아 있던 인간성이 사라진다.

 

언니의 도움으로 끌려가지 않은 아미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님을 잃고, 살기 위해 경찰 출신과 결혼한다. 제주 4.3사건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 당시 어떤 참혹한 일이 있었는지 알기에 아미와 그 마을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에 공감한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고, 생계는 해녀의 물질로 유지했다. 남편이 남는 시간 동안 자식과 사랑과 정을 쌓았지만 그녀의 속은 돌처럼 굳어갔다.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남편에겐 일말의 정도 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사실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그녀였기에 자식들은 엄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성 노예가 된 하나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나에게 집착하는 모리모토의 존재는 가능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과 사건이 나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중에 결과만 놓고 보면 하나의 삶이 아미의 삶보다 평온하다. 물론 단절된 이야기 속에 또 어떤 아픈 과거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악은 벗어났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현재의 하나가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작가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희망으로 마무리한다. 제주로 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미는 평생 수치심을 안고 살았다. 이것은 한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스러질 동안 두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부끄러움. 목청껏 정의를 외치지 못한 부끄러움. 사는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부끄러움.” 이것이 평생 아미를 지배했다.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위안부 집회에 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언니 하나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결국 마주한 것은 소녀상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소녀상의 소녀는 하나의 사진이란 설정으로 이어진다.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을 부여잡고 그 소녀상 옆에 앉았을 때, 손자가 나중에 소녀상에 절을 할 때 눈시울이 붉혀졌다.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주하기 힘든 역사지만 반드시 정면에서 봐야할 우리의 역사다. 잊지 말고 널리 널리 퍼져야 할 사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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