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 할 만한 것 - 오시이 마모루가 바라본 인생과 영화
오시이 마모루 지음, 장민주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한때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쉽게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주로 본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작품이었다. 영화 잡지 등에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관심이 높았는데 그 중 한 편이 <공각기동대>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주인공의 누드톤을 빼면 강하게 인상에 남는 것이 없었다. 기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뇌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들이 펼치는 활약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다 TV용을 보고, 인터넷과 전뇌에 대한 이해가 조금 깊어지자 다른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감독이 쓴 인생과 영화 이야기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두툼한 책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과 영화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말했듯이 이 책은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순위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그의 인생이나 애니메이션 스텝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말한다. 재밌는 것은 남녀의 차이다. 여자 스텝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생활력 때문이다. 남자 스텝들은 오타쿠가 많은 것 같은데 승진과 성취감이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그러니 현실적인 여성들이 이들을 남편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화를 그릴 때 더 빨리 많이 그려서 승진하려는 욕구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감독까지 올라오는 일은 없다.

 

그의 직업관은 명확하다. 능력 우선이다. 개인사는 사회적인 문제가 크게 되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는다. 감독이란 위치도 자신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감독이 촬영 현장에 늦게 나타나는 것도 다른 스텝이 말해 준 것이다. 그가 빨리 나타나면 다른 스텝들이 긴장하고 서두르게 된다. 프로듀스와 다투는데 이것도 서로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 일과 개인을 분리하고 있는데 그에게 최고의 파트너는 집에 있는 개다. 너무 관계가 밀착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기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삶을 살짝 엿봤다.

 

가짜뉴스와 정치로 넘어가면 그의 정치관에 조금 의문이 생긴다. 특히 공모죄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스럽다. 그는 “공모죄나 새로운 헌법을 어떻게 올바르게 운용해나갈 것인가”라고 말한다. 하나의 법이 만들어진 후 잘못 운용될 경우 바로 잡으면 된다는 생각일 테지만 현실은 이것을 악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신이 “그 기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 존재가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뒤에 숨겨놓은 인간의 악의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둔감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치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주제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

 

그의 글 중에서 내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원전 부분이다. 원전이 안전하면 도쿄 근처에 지어라는 말과 같이 서울에 원전을 지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이율배반적 표현은 곳곳에 널려 있다. 나도 물론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술이나 과학 등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보다 재밌는 게 없다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전쟁영화도 그 속에 사람들의 사연들이 담겨 있기에 감동을 준다. 이것은 <신 고질라>의 안노 히데아키의 영화를 비평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재밌지만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감독의 시선에서 본 평론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이해하는 영화의 깊이를 알려준다. 아직 <신 고질라>를 보지 않았는데 검색하니 정치 풍자극이란 평가가 많다. 조금 혼란스럽다.

 

아마 김지운 감독이 새롭게 만든 <인랑>이 상영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이렇게 빨리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김지운 판 <인랑>을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전 판과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아직 보지 않은 오시이 마모루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다. 어릴 때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알게 된 것이 있으니 영화 속에서 그의 철학을 조금은 찾아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영화감독들의 영화평을 읽고 뭔 소린가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들이 보는 세계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한동안 끊다시피한 영화를 다시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나의 우선순위에 조금 변화를 줄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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