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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평점 :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주로 소설을 읽는 것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친구 집에 가서 동화책을 빌려 읽었던 것도 이야기가 좋아서였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한탄과 아픔과 사랑과 즐거움과 괴로움 등을 듣다 보면 나의 괴로움과 아픔이 잠시 멈추곤 했다. 솔직히 말해 거창한 것으로 아파본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누구나 겪은 평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어떤 때는 혼자 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데도. 아니 없기에 한 것인지 모른다. 그때는 그랬다. 작가가 글 첫머리에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하고 묻기에 떠오른 단상이다.
언제부터인가 목차를 유심히 본다. 연습에 의한 습관이다. 목차를 본다고 해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서적이라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책처럼 명사로 나열되어 있다면 알기 어렵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목차를 보니 중간에 감다, 매듭, 풀다의 장을 빼면 진행의 역순으로 제목의 순서가 나열되어 있다. 이 과정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자신으로 넘어가고, <프랑켄슈타인>, <나니아 연대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눈의 여왕>, <북극 모험> 등과 같은 이야기를 거처 다시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타래에 감았다가 다시 풀어낸다는 표현이 더 맞다. 첫 인상이 지워질 때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살구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어머니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일상에 대한 평범하고 약간 감상적인 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책소개에 나온 책들의 이야기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씩 이야기가 진행되고, 인생의 한 전환점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바뀌었다. 아마 나의 집중력이 높아진 것도 이때부터 일 것이다. 그 전환점은 집을 나와 여행하던 중 그랜드캐니언에서 래프팅을 제안받고 ‘예’라고 대답한 그 순간이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가고자 하던 그 순간이 그녀의 삶을 바꾸었다. 이것은 나중에 아이슬란드 초대가 왔을 때 가겠다는 대답으로 이어진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가 자신을 적대시할 때 그것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자식보다 자신을 먼저 찾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집에서 간호하고, 병원에도 보내고, 이사도 한다. 그러다 좋은 요양원에 보내지만 이것이 완전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유방에 문제가 생긴다. 유방암의 징후가 보이는 것이다. 다행이 암으로 판정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문제와 함께 남자 친구와의 갈등도 생긴다. 나쁜 일은 홀로 오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은 견디어내었다. 삶의 고비가 지나고 나면 또 다른 고비가 오지만 그 경험은 다음 고비를 지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책들이 있다. 친구들이 있다.
‘멀고도 가까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처음에는 이 제목이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부제인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 더 눈길이 갔다. 아마도 나의 관심이 그쪽에 더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책을 더 읽으면서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공감하면서 이 평범한 표현이 가슴 한곳으로 파고들었다. 나의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잠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작가는 철학이나 사상을 말하기보다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견디고 생각한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감아서 묶었던 것을 풀어내는 것도 역시 이야기다. 그래서 다른 에세이에 비해 더 쉽게 집중하고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다 읽은 후 다시 읽은 첫쪽의 문장은 아주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처음 읽을 때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졌던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