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 아버지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두현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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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주제로 엮은 테마시집이다. 이보다 먼저 어머니를 주제로 한 테마시집 <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가 출간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잠시 생각하니 아이에게 늘 우선순위는 어머니였다. 거의 대부분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단어도 엄마다. 괜히 이런 생각을 하니 한 아이의 아버지인 내가 뒤로 밀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20세기의 한국 경상도 아버지의 전형과도 같았던 당신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다가왔던 것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라면서 그 중요함과 고마움을 안다면, 아버지는 다 자란 후 알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시집은 30대 이후에게 더 감성적으로 다가올지 않을까 생각한다.

 

49인의 시인 중 어머니를 주제한 시집에도 시를 올린 시인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시인들의 이름이 바뀌었다. 아직도 시인을 잘 몰라 낯선 시인이 대부분이지만 생각보다 알고 있는 시인이 곳곳에 보인다. 3부로 나누어 편집했는데 1부의 경우는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그리움이 나의 현재와 미래를 떠올려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라는 동안 아버지와 말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고, 다 자란 후에도 집안 이야기는 대부분 어머니와 했다. 아버지와 둘 만 있으면 할 말이 없어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 !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나와 둘이서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 한 날 기분 좋게 나와 술을 먹었다고 어머니에게 전화했던 것이 떠오른다. 실제로는 나와 술 한 잔이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명색이 장남인데 말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아버지들은 모두 남자들의 아버지인 것 같다. 여자 시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나의 착각이나 실수겠지만 남자의 시선에 본,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인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마음에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감정들은 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그리움이고, 누군가는 아쉬움이고, 어떤 이에게는 정산되지 않은 감정들의 복합체일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등장하는 박후기의 <작약과 아버지>에서는 한 명의 성인 남자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었던 그들의 은밀한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손택수의 <조화>에서 어버이날에도 한 번/ 달아드린 적이 없는 듯// 평생 받지 못한 꽃을/한꺼번에 다 품으셨습니다.’(전문) 라고 했을 때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몇 번 없는 것 같다. 아니 한 번도 없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정호승이 <아버지의 수염>에서 수염을 면도해드리기 싫었던 날을 말할 때 그 조그만 귀찮음이 나중에 후회로 남는다는 평범한 사실에 가슴이 울린다. 자신이 아버지가 된 느낌을 내 안에서 뜬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오인태, <아버지>)이라고 말하고, ‘국수를 좋아하셨다/ 지금껏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이제훈, <국수>)라는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에 이 시집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 몇 가지는 아주 낯설다. 물론 문학적으로 본다면 낯익다. 김완하가 새벽은 숫돌에서 푸르게 빛이 섰다/ 어둠 속에서 낫을 미시는 아버지 어깨가/ 두꺼운 어둠 벽을 무너뜨렸다/ 새벽 들길에 이슬 한 점 지고 오셨다’(새벽의 꿈)라고 말할 때가 대표적인 이미지다. 세대간의 갈등을 노래한 듯한 이진우의 <애비는 잡초다>는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 ‘너희가 덜떨어졌다 늘 비웃는 우리가/ 네 애비고/ 내일의 너희다라고 했을 때는 뜨끔했다. 이창수의 <효자폰> 에피소드는 잠시 동안 웃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 시집 속 아버지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의 이해력이 더 높았다면 또 다른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기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뒤돌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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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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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밥 딜런이다. 처음에 그가 이 상을 수상했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왜 가수가 문학상을 받지 하고. 많은 호사가들은 그의 이름보다 다른 작가들을 먼저 말했다. 늘 예상한 것과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봤기에 그들이 되지 않아도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라니... 솔직히 말해 한국에 살고, 포크 송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는 정말 의외였다. 비록 밥 딜런의 가사가 지닌 놀라운 의미와 힘을 들었다고 해도 영어에,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음악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의 수상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생긴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런 나의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다른 자서전처럼 쉽게,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주 책을 펼치고 읽으면서 깨진다. 원제로 연대기를 붙였지만 실제 이야기의 진행은 시간 순과 그렇게 큰 연관성이 없다. 그가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흔한 방식의 자서전이 아니다. 성공에 대한 화려한 포장도, 깊은 좌절에 대한 기록도 그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다루고 있는 것은 포크에 대한 열정과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음악가와 문학 등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하다고 해도 낯선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 읽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더딘 속도로 읽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밥 딜런하면 언제나 가사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그의 앨범 몇 개를 들었지만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가사의 경우는 제대로 번역한 것을 읽은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한다. 이런 일들은 외국 음악을 들을 때면 늘 만나게 되는 문제다. 멜로디에 집중하게 되면서 가사는 놓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느낀다. 그가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작사를 하는지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한 곡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연주자들과 같이 노력하는 모습은 무한도전 같은 예능에서 보는 것 이상이다. 아니면 이런 부분들이 생략된 것일 수도 있다.

 

밥 딜런에 대해 잘 아는 독자에게는 이 자서전에서 생략된 부분들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떨까? 그의 아내가 나오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갑자기 3명의 자식들이 나와 뭐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렇게 보면 참 불친절한 자서전이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읽으면서 계속 검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책은 한 예술가의 수많은 고민과 노력과 열정을 잘 전해준다. ‘대중음악에서 가사의 수준을 올렸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가사를 갈고 닦고 다듬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중에 한 곡의 노래가 변한다. 그 과정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연주와 연주와 연주의 연속이다.

 

눈에 먼저 들어온 딜런의 말이 있다. “대부분의 다른 연주자들은 노래보다는 스스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노래를 이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차이가 그를 다른 일반 연주자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이것이 가사의 수준을 높였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음악가들의 이름들 속에서 아는 이름이 나오면 괜히 반가웠지만 대부분은 모른다. 그가 열심히 들었던 음악은 나도 듣고 싶다. 그처럼 음악을 분석하고 구조를 해석하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위대한 음악가로 불리는 밥 딜런의 삶을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곡을 만드는지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의 노랫말을 다시 조용히 음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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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라이프 -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삶,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한 인생철학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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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쉽게 읽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힘겹게 읽었다. 책을 편 첫 날은 좋았다. 몸 상태가 좋다보니 더딘 속도지만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해는 되지 않고, 속도는 더욱 더디고, 졸음까지 밀려왔다. 처음에 기록했던 내용들이 이제는 귀찮아졌다. 멋진 문장을 발견하고 나의 이성을 깨워줄 것이라고 생각한 문장들을 그냥 지나갔다. 소설이라고 했는데 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철학 소설과는 너무 다르다.

 

작가의 이전 작품인 <철학자와 늑대>의 평이 너무 좋아 선택했다. 하루에 백 쪽씩 읽는다면 3일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도 했다. 그렇게 두껍지 않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읽는 동안 제대로 이해는 못하지만 나의 이성을 깨워주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오만은 다음날 산산조각 났다. 미래의 시간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기록과 그 기록에 대한 엄마의 주석을 자신이 편집해 내놓은 책이란 설정이다. 화자인 미시킨의 탄생과 죽음까지 다루는데 이것을 스무 개의 주제를 통해 풀어놓았다. 존재, 탄생, 낙태, 윤리, 신 등에서 사랑, 마약, 죽음, 안락사, 구원 등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주제다. 한두 개만 가지고도 충분히 한 권의 책을 가득 채울 수 있는데 이것을 한 사람의 탄생과 성장과 죽음이란 일생으로 엮었다.

 

보통의 철학 소설이라면 기본 이야기가 있고, 그 사이를 철학적인 부분이 채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반대의 느낌이다. 주제를 던져 놓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처음 기대한 미시킨의 이야기는 주제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물론 미시킨의 삶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느 대학을 다녔고, 누구를 사랑했고, 자식을 키우고, 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책 속 한 주제 분량도 채 되지 않는다. 뒤로 가면서 조금 적응하면서 미시킨의 삶이 더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것도 각 단계의 주제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 같다. 아이들과의 경험을 적은 것을 제외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20개의 주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해답을 찾아간다. 미시킨이 종교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의 삶에 종교가 강한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강력한 힘을 다시금 깨닫는다. 각 주제들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읽는 동안 머리는 오랜만에 풀가동했다. 잠시 집중력을 흩트리면 단어들이 사라진다. 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몇 번 읽어도 이해를 못하는 내용도 있다. 중요한 것 같지만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뒤로 갔는데 앞의 내용이 전부였던 것도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다양한 의미와 해석으로 다가왔다. 한 번에 다 읽기 보다는 천천히 사유하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많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와 닿았다. 그 중 처음으로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성과 증오에 대한 글이다. “증오를 합리화하는 이성의 교묘함을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종족, 종교와 정치적 신조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후에 이성으로 합리화한 증오다. 증오는 동물적 본성일지 모르지만, 증오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이성은 증오에 초점과 방향을 제공한다. 이성은 증오에 효과를 더한다. 이성과 감정의 협력은 결코 우리 모두의 삶에 추악한 상처만을 남길 것이다.” 우리가 늘 외치는 이성적 판단, 이성적 행동 등의 이면에 이런 구조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현재의 한국 정치 현실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지는 문장도 있었다. “광신도들은 감정선 자체가 매우 다르고 너무 독특해서 생물학적으로 변종이 된 것 같아 진정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저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지 눈앞에 흔들면서 보여줄 이유가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어차피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 논쟁도 할 수 없고 협상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못 하게 막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골통보수와 왜 대화가 되지 않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이 문장을 보고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자식에 대한 그의 논리 전개는 역시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이다. 현실을 제대로 다룬다. 윤리와 정의 같은 문제도 많은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안락사에 대한 부분은 더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안락사를 인정한 나라도 있다. 물론 안락사를 무분별하게 적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몇 가지는 이미 다른 책들에서 본 것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책은 처음이다. 어렵고 힘들게 읽은 책이지만 언젠가 나의 머릿속에서 사유의 꽃을 피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다시 이 저자의 책을 살지는 솔직히 주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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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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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한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모든 원고와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는 도서관이다. 일반적인 도서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24시간 늘 열려 있다. 한 밤중에도 누군가가 원고를 들고 와 벨을 누르면 나가서 받아주어야 한다. 도서관 직원은 그 책을 장서 원장에 적고, 저자에게 원하는 곳에 꽂아두라고 말한다. 이렇게 받은 원고가 쌓이면 지하 저장소로 옮긴다. 도서관이 받는 원고에는 제한이 없다. 나이도, 국적도, 장르도 따지지 않는다. 놀라운 장소다. 이 책이 나온 뒤 실제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일이다.

 

사실 브라우티건의 소설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워낙 유명하다고 하니 읽었을 뿐이다. 다른 작품도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의 독서법과 맞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비교적 쉽게 읽혔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었고, 몇몇 문장에서 하루키의 문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기시감에 비롯한 착각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정보 때문에 생긴 착각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자가 풀어낸 상징과 이미지는 읽는 동안 전혀 몰랐다.

 

화자인 ‘나’는 이 도서관 사서다. 어느 날 도서관에 와서 사서로 눌러 앉았다. 그리고 한 번도 도서관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세계는 도서관과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그의 연인인 바이다도 자신의 몸에 관한 시를 쓴 후 가져온 저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려워하고 저주한다. 아주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여자들은 질투를 품는다. 외모에 관한 에피소드 대부분은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 오고 가는 도중에 생긴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 남자들 중 한 명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화자는 고립된 곳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 이 삶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바이다의 임신이다. 둘이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임신중절이다. 이를 위해 지하 저장소의 포스터가 멕시코 티후아나의 의사를 소개해준다. 이 소설의 중반 이후는 티후아나로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의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바이다를 둘러싼 에피소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비인간적인 행동과 모습은 그 병원에 온 환자와 가족의 모습과 대조된다. 제대로 된 의사에 비해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비전문적으로 보인다. 어린 소년과 소년가 보조한다. 그렇지만 소독이나 위생적인 처리는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야기보다 문체와 사람들이다.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문체는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화자와 바이다와 포스터 등이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산다. 나는 도서관에, 포스터는 지하 저장소에, 바이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이들에게 도서관이 없다면 세상으로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 동안 도서관을 비운 것 때문에 나와 포스터는 직업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변화는 머무는 곳을 벗어나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머릿속은 두 가지 이미지가 떠돈다. 하나는 당연히 도서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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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빌 시누누 지음, 유윤한 옮김 / 지식너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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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에 ‘여행 중에 깨달은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란 글이 있다. 내가 관심을 둔 것은 앞에 나온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 저자의 업무 중 하나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화 분쟁 조정가,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각기 다른 문화를 연결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가 문화의 충돌에서 생긴 것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었는지 말이다. 역시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다닌 수많은 여행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들이 나의 이해와 경험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도식적이고 표면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지기도 했다.

 

모두 아홉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공간도 시간도 하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여행하면서, 살면서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주제별로 엮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기, 재생의 시간, 가족의 유대감, 건강, 사랑, 당신의 성, 슬픔, 삶의 안전지대, 나의 손님 등으로 구분한다. 이 이야기들은 그렇게 길지 않다. 길어도 몇 쪽 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두 쪽도 되지 않는다. 이 간결한 이야기가 가슴 한 곳에 파고드는 순간도 있지만 가끔은 겉돌기도 한다. 저자의 경험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대한항공의 괌 착륙 사건을 다룬 부분에서 어색함을 많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저자의 직업이 항공사 직원이었다는 것과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것이 이 책과 같은 결과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열린 마음과 친화력과 긍정적인 생각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행 중에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여러 사람이 앉는 자리 한 가운데 앉는다거나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다는 등의 노력이 이어진다. 아니면 자신이 실수했을 때 상대방이 지적한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바로 그것을 고치는 모습은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부분이 여행 속에서 그를 깨닫게 하고, 다양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미국인이다. 이 국적이 그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여유를 낯설게 받아들이게 한다. 프랑스의 의료보험을 보고 놀라는 것을 읽고는 얼마 전 한동안 인터넷에 떠돌았던 미국 맹장수술 비용이 떠올랐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것도 문화적으로 접근해서 풀어낸 것을 보고 나의 학창시절과 비교해보았다. 너무 단순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제에 대한 부분에 도달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어떤 신문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작년에 스페인 여행을 한 직원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직도 그대로라고 한다. 졸리는 오후 잠깐 동안의 낮잠은 정말 업무의 효율을 높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영화를 만들지만 성은 억압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가 섹스 박물관을 방문한 후 느낀 감상은 엄숙주의 속에서 살던 한국인이 유럽에 가서 반드시 가보는 곳 중 한 곳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가족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는 사람들 이야기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장애물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오는 단순과 소박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이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이다. 매일 매순간을 즐기고, 나를 들여다보며 호흡을 고르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일도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현재 나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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