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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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무겁거나 더딘 진도로 읽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프랑스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나의 평가다. 물론 비채에서 나온 몇 편의 프랑스 문학상 수상작들이 예상을 뒤엎는 재미와 속도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한두 달 전에 읽었던 작품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전에 읽은 프랑스 소설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도 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경험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의 구판 표지를 봤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표지다. 그 당시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비해 이번 표지는 얼마나 깔끔한가. 나의 취향이다.

 

원제는 <노와 나>라고 한다. ‘나’는 열세 살의 소녀다. 소위 말하는 천재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몇 년이나 월반을 했다. 학습적으로 천재인지 모르지만 감정까지 천재는 아니다. 그래서 지적조숙아라고 부른다. 자신의 또래와 다른 삶을 살다보니 대인관계가 그렇게 편하지 않다. 이런 소녀가 한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노숙자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삶에서 우연은 또 다른 필연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다. 이렇게 해서 ‘나’는 ‘노’를 만난다.

 

‘노’는 노숙자다. 십대 소녀다. 길에서 흔히 보는 나이 많은 노숙자가 아니라 십대다. 첫 접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면서 조금씩 다가간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따뜻한 카페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발표를 위한 인터뷰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든다. 그녀의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 이 앎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노숙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의지와 노력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이 발표가 마지막 장에서나 이루어질 줄 알았다. 한 소녀 노숙자를 알아가는 과정을 다룰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 예상 그대로 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노가 ‘나’ 루이의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원한다고 노숙자를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은 보통 집이 아니다. 아프고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루의 동생 타이스가 유아돌연사로 죽은 것이다. 이 죽음이 엄마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가족의 유대를 끊었다. 루의 정서적인 불안감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정체된 집에 분위기가 노의 등장으로 바뀐다.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3년째 유급중인 뤼카다. 멋지고 잘 생겼지만 공부할 의지가 없는 그다. 루는 그를 좋아한다. 그가 자신을 안아주고 키스하는 것을 꿈꾼다. 바람일 뿐이다. 이런 그와 관계가 루의 노숙자에 대한 발표 후 변한다. 꼬맹이라고 부르고 같이 놀자고 한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현실은 반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노도 함께 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루의 집에서 노가 쫓겨났을 때 그녀가 간 곳도 뤼카의 집이다. 세 명의 십대 소년 소녀들은 신나고 즐겁다. 노의 삶이 빠르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 셋의 가정은 평범하지 않다. 루의 집은 아이의 죽음으로 엄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뤼카의 부모는 이혼한 후 아이만 홀로 둔 채 따로 산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노의 엄마다. 그녀는 노를 원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탄생이 사랑이 아닌 강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죽음 후 삶은 큰 파도를 탄다. 모성애가 없는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대답이 없다. 이것은 루도 마찬가지다. 한창 감정적으로 변하는 시기의 그녀에게 엄마의 기계적인 행동과 반응은 그녀에게는 폭력과 마찬가지다.

 

노숙자와 지적조숙아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잔하고 현실적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녀들에게는 필요한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것이 의존적으로 변하면서 관계가 불안정해진다. 노는 엄마가 필요한데 그녀는 반응이 없다.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노숙자 삶이 순간적으로 정리되었다고 삶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많은 의지와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아니다. 망가진 그녀의 삶에 대해 작가는 상세한 설명을 뺐다. 추측으로 채워야 한다. 알코올 중독 정도로 한정하기에는 더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존재의 고통과 아픔을 잘 그려내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가 한 명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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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자는 누구인가 - 유배탐정 김만중과 열 개의 사건
임종욱 지음 / 어문학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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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이란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소정묘 파일>이란 역사추리소설이었다. 이 당시 한창 팩션이 번역 출간되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의 광풍이 전 세계를 몰아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 팩션에 많은 실망을 하고 있었고, 번역된 팩션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서관에서 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백수였던 시절이라 가능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공자에 대한 역사추리소설이란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다행히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언제나처럼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책 제목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후 몇 편의 한국 팩션을 읽을 때면 이 작품이 떠올랐다.

 

사실 임종욱의 소설이 계속 나왔다. 반값 할인의 시기에 몇 권을 사놓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 정도가 출간된 책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검색하니 상당히 많은 책이 계속 나왔다. 새로운 작가와 작품에 점점 빠져들면서 이전에 재밌게 읽은 작가의 작품에 손이 쉽게 나가지 않고 있다. 이 작품도 한 카페에서 작가 자신의 소개글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선택했다. 그리고 이전에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인상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좀더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이미지다.

 

서포 김만중을 탐정으로 내세운 역사추리소설이다. 부제에서 ‘유배탐정 김만중과 열 개의 사건’이라고 말해 연작단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국어 시간에 배운 <구운몽>의 저자로 먼저 알았고, 좀더 자라면서 당쟁의 중심인물 중 한 명임을 알게 된 그 김만중이다. 최근에 조선시대 유배된 학자들을 탐정으로 내세운 소설이 몇 권 나왔다. 이 책도 그 작품들 중 한 권이다. 대부분 완성도가 높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부분이 있다.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가 낯익다거나 마무리가 나의 취향이 아니라는 등. 그럼에도 재미있는 단편이 많고,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나중에 김만중을 탐정으로 내세운 장편이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각 독립적이지만 계속 연관성을 가진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읽기에 큰 부담은 없다. 이 부분은 작가의 역량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은 크게 김만중과 포교 박태수다. 박태수가 사건을 가지고 오면 김만중이 논리적인 추리와 조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가끔은 어린 아이가 사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신의 제자가 우연히 들은 살인 이야기가 소재가 되기도 한다. 밀실 살인, 암호 풀이, 다잉 메세지 등 기존의 추리소설에서 다루는 소재들을 각각의 단편들에 녹였다. 트릭 등에 약한 내가 그 완성도를 평가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

 

김만중의 유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 속 설정은 상당히 자유로워 보인다. 남해 곳곳을 다닐 수 있고,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인척인 그의 유배에는 두 명의 하인이 따라붙는다.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호우와 음식 등을 담당하는 아미다. 여기에 그에게 글을 배우는 남해 거부의 아들 나정언이 같은 집에 머문다. 가끔 올 손님을 위한 사랑방까지 있는 집이니 상당한 규모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김만중은 남해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고, 박태수 등이 가져온 사건들을 해결한다. 가장 큰 사건으로 시작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현재로 내려오는 방식이다.

 

열 개의 사건이지만 이 단편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가 있다. 박태수와 조강호의 과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남해 최대 조폭인 조강호가 포교인 박태수에게 단순히 뇌물만 먹인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였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려주지만 정확한 내역은 생략되어 있다. 혹시 김만중 탐정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 부분이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의 마무리는 어정쩡하다. 깔끔하기보다는 뒤끝을 너무 많이 남겼다. 후속편이 없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매력적이고 정감 가는 캐릭터가 많은 소설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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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처럼 검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3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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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마지막 권이다. 3권의 시리즈를 읽으면서 각각 다른 방식의 이야기 전개로 약간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2권이다. 전작들도 그렇지만 이번 작품도 루미키의 활약은 한정적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녀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탁월한 추리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액션으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이 시리즈의 첫 권이 사실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2권을 읽으면서 이 생각이 바뀌었지만.

 

집단 자살 사건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온 루미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들이 큰 규모의 사건들이라면 이번에는 사건의 대상이 루미키 자신이다. 새로운 남자 친구 삼프사를 사귄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관능적이다. 남자의 애무를 받고, 전 남친과 현 남친이 꿈과 현실 속에서 등장한다. 전작에서 그녀가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언론과 친구들의 관심을 받지만 그녀는 이것이 불편하다. 인터뷰를 거절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을 산다. 하지만 전작들처럼 현실의 어둠은 그녀를 홀로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전편에서도 루미키의 언니가 하나의 소재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아예 언니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희미한 기억 속에 언니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데 정확한 기억이 없다. 그녀의 그림자를 자청하는 한 명의 메시지가 들어와 그녀를 협박한다. 이 메시지에는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그대로 나와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포함해서. 그리고 그 협박에는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살인하겠다는 말이 들어있다. 이 때문에 새벽에 눈길을 열심히 달린다. 혹시 그녀의 행동 때문에 그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겨진 삶을 파헤쳐 혼란과 공포 속으로 밀어넣는 존재가 있다면 현실에서는 전 남친과 현 남친이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전 남친 블레이크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너무 거대하여 순간적으로 그녀를 뒤흔들지만 삼프사의 존재가 경계선을 치게 만든다. 보통의 로맨스 소설이라면 이 갈등으로 상당한 분량을 뽑았겠지만 작가는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이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너무 잘 알기에 이 두 남자 친구를 한순간 범인으로 오해한다. 작가는 살짝 이 부분에서 독자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게 장면을 연출한다.

 

전작들처럼 백설공주나 다른 북유럽 동화가 하나의 장치로 이용되지만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역시 <백설공주> 한 편이다. 새롭게 각색된 백설공주 역할을 루미키가 맡는다. 이 연극에 그녀는 너무 심하게 몰입한다. 현실과 가상의 혼란 속에서 헤맨다. 이 연극이 자신의 과거와 겹쳐지면서 환상을 만든다. 책을 읽을 때 순간적으로 다른 장소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 또한 작가의 연출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루미키에게 순식간에 빠져든다. 기존에 알고 있던 동화와 너무 다른 동화에 한 번 더 놀란다. 새로운 해석은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적은 분량이다. 단숨에 읽었다. 전작들처럼 루미키의 활약은 특별하지 않다. 단지 사건의 중심에 있을 뿐이다. 스토커의 정체를 추측하는 재미가 있지만 길지 않은 분량이라 긴박감이나 긴장감이 특별히 고조되지는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설정이라면 루미키의 언니 루사의 존재다. 전편부터 계속 언니의 존재를 암시했지만 이번처럼 확실하게 등장한 적은 없다. 그녀의 가족이 왜 그렇게 소원해졌는지 알려줄 때 한 가족의 비극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진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자하는 것을 믿으면서 생긴 비극이다. 3부작으로 끝났지만 늘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루미키를 보면 또 어떤 사건을 만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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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중간의 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이정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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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제목 뒤에 가려져 있는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유아 살해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하나씩 파고들게 되면 육아에 지친 엄마들의 평범한 삶이 드러난다. 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조그만 말 하나에 흔들리고, 눈물 흘리고, 짜증내고, 화를 내고, 웃는 우리 주변의 엄마들 말이다. 아이의 발육이 조금만 늦어도 자신이 잘못한 것 같고, 모유 수유를 끝까지 하지 못했다고 자신감이 떨어지는 무수한 엄마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유아를 살해한 엄마 미즈호의 재판에 보충재판원으로 선정된 세 살배기 딸을 둔 리사코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미즈호는 여덟 달 된 딸을 익사시켰다. 고의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지만 자신이 들고 있던 아기를 떨어트리고 넋 놓고 있었다. 남편이 들어와서 이 상황을 보고 구급차를 불렀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영유아 살해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리사코는 이 재판에 재판원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다. 세 살배기 딸 아야카를 돌봐야하는 현실을 감안해서 빠지기를 원했지만 정식 재판원이 아닌 보충재판원으로 선택되었다. 재판이 있는 동안 법정에 앉아 재판 진행사항을 보고, 이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역할이다. 그냥 시간만 때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경험이 겹쳐지면서 상당히 어려운 일로 변한다.

 

재판기간 동안 아이는 시댁에서 돌봐주기로 한다. 매일 아침 아이를 시댁에 데려다 준 후 재판이 끝난 후 다시 데리고 오는 일정이다. 바로 옆집도 아니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야하는 상당히 먼 길이다. 재판에서 감정의 소모가 심한 상태인데 아이는 할머니 등의 선의에 의해 버릇이 조금씩 나빠진다. 가끔 보는 사람과 매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과의 차이다. 하루는 아이가 시댁에서 자겠다고 한다. 시어머니도 그러라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엄마를 찾으면서 계속 운다. 다시 돌아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이런 상황들이 점점 더 그녀의 삶과 육아의 경험을 미즈호와 겹쳐보이게 만든다.

 

미즈호의 재판이 한 여성의 삶을 하나씩 해부하는 과정이라면 보충재판원인 리사코에게는 잊고 있던 생각하는 삶을 돌려준 기회다. “생각하는 행위로부터 도망쳤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결혼 후 그녀의 삶에 대한 정확한 요약이기도 하다. 남편과 시댁과 친정엄마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하고, 육아에 지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아이를 민다거나 놓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이 아주 특별한 상황이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순간의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잠시 동안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나 주변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이때 그들이 던지는 한 마디 말의 힘은 어떻게 작용할까?

 

리사코가 미즈호의 사고를 자신의 경험과 비추어 감정이입하면서 풀어냈다. 그렇다면 이미 아이를 다 키운 아줌마나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거나 남자인 경우는 어떨까? 자극적인 언론은 또 어떨까? 검사들이 미즈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과거를 뒤짚고 왜곡하는데 이것 또한 리사코의 감정을 뒤흔든다. 결혼하면서 잊고 있던 생각과 판단이 조용히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남편의 한마디에 그렇게 큰 상처를 받지도, 감정의 혼란을 겪지도 않았겠지만 이 재판이 미즈호 속의 리사코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조용히 깨닫는다. 자신을 대하는 남편의 말과 행동 속에 어떤 의미가, 폭력이 조용히 스며있는지. 물론 이것이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육아와 유아 살해라는 주제를 아주 멋지게 엮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여자를 통해 너무 쉽게 판단하는 육아의 어려움을 꼼꼼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다. 망각의 힘에 의해 자신들의 어려웠던 순간을 잊은 여자들의 지적은 단순히 시대가 다르다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프다. 여론은 과거의 한 순간을 부각시켜 미즈호를 나쁜 여자로 몰아간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가치 판단을 유보하면서 현실을 최대한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가해자의 입장보다 피해자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더 쉽고 더 많이 된 사람들은 그녀를 악녀로 규정한다. 작가가 최대한 현실을 그려내었다고 해도 실제 현실에 더 잔혹한 삶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육아를 둘러싼 현실과 감정이입 덕분에 이 작가의 책 중에서 비교적 힘들게 읽었다. 아이를 곧 낳거나 낳을 예정인 예비 아빠들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의 육아에 힘겨워하는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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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골라주는 남자 - 18년차 여행작가 노중훈의 여행의 맛
노중훈 지음 / 지식너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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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테마로 100곳의 식당을 다룬다. 내가 가본 곳을 세어본다. 4곳이다. 반면에 이름을 아는 식당은 상당히 많다. 이 차이는 방송으로 식당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본 곳들이 지역적으로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이 나오면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여행과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한쌍이지 않은가. 저자도 여행작가이지 않은가. 언제부터인지 가슴 한 곳에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 일상의 무거움이 머리를 짓누를수록 이 열망은 더욱 자라난다.

 

맛집 책을 많이 읽었지만 겹치는 집은 많지 않다. 오히려 <수요미식회> 같은 방송에서 본 집이 더 많다. 요즘 먹방이 대세에 유행이다보니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 많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런 방송이나 책을 즐겨 들고 보았다. 한때는 방송이 나오지 않는 집이 더 귀했던 적이 있다. 자주 가는 식당들도 최소한 한두 번 이상은 방송에 나왔고, 벽에 방송 장면들이 출력되어 붙어있다. 맛집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면서 무조건 방송에 나오는 집에 가는 발걸음이 뚝 거친 적도 있다. 방송에서도 차별을 두기 위해 몰래 가는 방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면 괜히 또 한 번 가보곤 한다.

 

이렇게 맛집은 계속해서 나를 유혹한다. 지난 여름 제주에 가서 경치를 보기보다는 방송에 나온 맛집 탐방에 더 열을 올렸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계속 비가 온 것이다. 며칠 동안 식당을 돌면서 느낀 것은 나의 입맛과 방송의 괴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책이다. 방송이다. 이전보다 열심히 찾아보지 않지만 맛집 방송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눈길이 간다. 외식을 하려고 하면 맛집을 열심히 검색한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름 선별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물론 이것도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여행작가란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먹는 것을 좋아하는 탓인지 전국곳곳의 식당이 나온다. 이전 같으면 제주도 식당이라는 이유로 놀랐을 수도 있지만 요즘은 너무 많이 나왔다. 이 책의 특이한 부분 중 하나로 꼽는다면 섬의 민박집 밥을 목록에 올려놓은 것이다. 단순히 차별화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 집이 맛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자락을 불러왔다. 민박의 추억이다. 하지만 민박집 밥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대부분 밥을 해먹거나 아니면 나가 사먹었다. 뭐 대부분 민박의 경우 단체로 갔으니 그렇기도 하다.

 

해장으로 시작하여 고를 필요 없는 식당으로 끝난다. 속풀이 테마에서 우래옥을 넣은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평양냉면계의 넘사벽이란 표현은 수많은 평양냉면 마니아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실제 다른 방송에서 평양냉면을 다루었을 때 얼마나 많은 논쟁이 있었고, 개인 취향이 나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수집을 보면서 갈 곳이 많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신성각 짜장면이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팥을 좋아하는 나에게 진주의 수복빵집은 왜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을 준다. 몇 번이나 진주를 다녀왔기에 생긴 아쉬움이다. 어쩌면 먹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질 기억력과 너무 오래전 방문한 했기에.

 

맛집을 다니다가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 식당이 회사 근처에 있으면, 집 근처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다. 애성회관의 경우 지난 번에 갔다가 내부공사중으로 문을 닫아 그냥 돌아왔다. 차를 가지고 가면 늘 주차 문제가 생기는 곳이라 그때의 아쉬움이란. 류지의 솥밥은 늘 먹기보다는 가끔 둘러보고 싶다는 느낌이다. 김진환제과점 식빵은 이번에 꼭 사 먹고 싶다. 자신만의 맛을 찾아가는 식당들은 언제나 호불호가 갈린다. 박찬일 주방장의 로칸다 몽로는 한번쯤 가서 맛보고 싶다. 노부부의 치킨집 중동구판장도 마찬가지다.

 

한 잔 술이 당기는 날 좋은 친구들과 함께 가보고 싶은 식당들이 보인다. 늘 먹는 삼겹살에 소주가 아니라. 한동안 혼자 밥을 자주 먹었다. 하지만 청진옥은 아니었다. 노포임을 감안하면 다른 테마로 가야하지 않을까? 이천냥의 김밥은 이 김밥을 사기 위해 그곳으로 가고 싶게 만든다. 뭐야 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부부청대문이 목록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식당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불편한 식당이란 표현이 딱 맞는 곳이다. 예전에 이 근처에 살았을 때 알았다면 한두 번 정도 시도했을 텐데. 광주식당의 밥 이야기에서 인사동 골목길에 있던 식당이 떠올랐다. 반찬보다 밥으로 더 유명했던 집이다. 이렇게 이 책에 나오는 식당들은 추억도 같이 불러온다. 연말연초에 최소 한 곳 이상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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