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약간 무겁거나 더딘 진도로 읽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프랑스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나의 평가다. 물론 비채에서 나온 몇 편의 프랑스 문학상 수상작들이 예상을 뒤엎는 재미와 속도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한두 달 전에 읽었던 작품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전에 읽은 프랑스 소설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도 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경험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의 구판 표지를 봤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표지다. 그 당시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비해 이번 표지는 얼마나 깔끔한가. 나의 취향이다.

 

원제는 <노와 나>라고 한다. ‘나’는 열세 살의 소녀다. 소위 말하는 천재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몇 년이나 월반을 했다. 학습적으로 천재인지 모르지만 감정까지 천재는 아니다. 그래서 지적조숙아라고 부른다. 자신의 또래와 다른 삶을 살다보니 대인관계가 그렇게 편하지 않다. 이런 소녀가 한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노숙자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삶에서 우연은 또 다른 필연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다. 이렇게 해서 ‘나’는 ‘노’를 만난다.

 

‘노’는 노숙자다. 십대 소녀다. 길에서 흔히 보는 나이 많은 노숙자가 아니라 십대다. 첫 접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면서 조금씩 다가간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따뜻한 카페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발표를 위한 인터뷰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든다. 그녀의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 이 앎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노숙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의지와 노력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이 발표가 마지막 장에서나 이루어질 줄 알았다. 한 소녀 노숙자를 알아가는 과정을 다룰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 예상 그대로 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노가 ‘나’ 루이의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원한다고 노숙자를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은 보통 집이 아니다. 아프고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루의 동생 타이스가 유아돌연사로 죽은 것이다. 이 죽음이 엄마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가족의 유대를 끊었다. 루의 정서적인 불안감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정체된 집에 분위기가 노의 등장으로 바뀐다.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3년째 유급중인 뤼카다. 멋지고 잘 생겼지만 공부할 의지가 없는 그다. 루는 그를 좋아한다. 그가 자신을 안아주고 키스하는 것을 꿈꾼다. 바람일 뿐이다. 이런 그와 관계가 루의 노숙자에 대한 발표 후 변한다. 꼬맹이라고 부르고 같이 놀자고 한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현실은 반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노도 함께 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루의 집에서 노가 쫓겨났을 때 그녀가 간 곳도 뤼카의 집이다. 세 명의 십대 소년 소녀들은 신나고 즐겁다. 노의 삶이 빠르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 셋의 가정은 평범하지 않다. 루의 집은 아이의 죽음으로 엄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뤼카의 부모는 이혼한 후 아이만 홀로 둔 채 따로 산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노의 엄마다. 그녀는 노를 원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탄생이 사랑이 아닌 강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죽음 후 삶은 큰 파도를 탄다. 모성애가 없는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대답이 없다. 이것은 루도 마찬가지다. 한창 감정적으로 변하는 시기의 그녀에게 엄마의 기계적인 행동과 반응은 그녀에게는 폭력과 마찬가지다.

 

노숙자와 지적조숙아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잔하고 현실적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녀들에게는 필요한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것이 의존적으로 변하면서 관계가 불안정해진다. 노는 엄마가 필요한데 그녀는 반응이 없다.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노숙자 삶이 순간적으로 정리되었다고 삶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많은 의지와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아니다. 망가진 그녀의 삶에 대해 작가는 상세한 설명을 뺐다. 추측으로 채워야 한다. 알코올 중독 정도로 한정하기에는 더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존재의 고통과 아픔을 잘 그려내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가 한 명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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