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PLATE
손선영 지음 / 트로이목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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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침몰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시기는 2016년 11월 8일 늦은 오후다. 그리고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2월이나 2012년 12월까지 다양한 시간대로 옮겨간다. 이 시간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대다. 한국, 일본, 미국 등의 주요 인물들의 시간이다. 처음에는 등장하는 인물과 서로 다른 시간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냥 읽다 보면 이 시간들이 하나로 모인다. 그리고 왜 다른 시간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해 재밌지만 허황된 이야기다. 인물들의 능력이 과하게 포장되었거나 상황이 너무 황당하다. 일본 침몰을 둘러싼 비밀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일본 만화 한 편이 떠올랐다. 작가도 분명 그 작품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이 들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충실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묘사와 설명을 통해 이 거대한 거짓말에 논리의 힘을 붙인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이전에 박봉성 등의 만화를 볼 때 느낌을 받았다. 서울역 노숙자들과 함께 머무는 김기욱의 숨겨진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너무 국수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2의 김진명이란 광고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소설의 완성도나 재미는 김진명을 훨씬 넘어섰다.

 

한국, 미국, 일본의 주인공들이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국은 국정원4국이란 가상 조직이 등장해서 권력 중립적이라고 설정한다. 이 조직의 정체는 전세계 정보조직에게 비밀이다. 현재 국장은 채한준이다. 이 조직이 재미있는 점은 권력 관계가 부자관계로 불린다는 것이다. 국장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채한준은 2대고, 새로운 인물을 발굴했다. 그가 바로 장민우다. 장민우는 아이돌 젠틀맨의 멤버가 될 수 있었지만 계약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가 작사한 노래가 젠틀맨이 불러 대박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점점 은둔형외톨이로 변해간다. 그러다 장난처럼 적은 글 때문에 4국의 눈에 띈다. 그 글을 발견한 인물은 박기림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지대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후쿠야마다. 그는 소신사라는 정보조직 최고의 히트맨이다. 그의 곁에는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중국 첩보원 여통이 있다. 그리고 우연처럼 그에게 다가온 한 명의 전설적인 킬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마리다. 이들의 만남과 함께 총격과 폭탄이 날아다니는 액션이 시작한다. 이 짧지 않은 소설 속에서 이 세 명이 액션을 담당한다. 그 무대는 주로 일본이지만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묘한 관계는 빠르게 진행되는 액션으로 살짝 가려진다. 살인에 조금도 주저하지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 조금 놀랐다. 이 간결하고 재빠른 액션이라니.

 

미국은 존 스미스라는 이름이 먼저 등장한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한 터너라는 인물에게 거대한 부를 안겨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놀라운 음모가 숨어 있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존 스미스란 이름이 각 분야의 전문 에이전트에게 똑같이 붙어 있다. 그래서 빅 존, 서 존, IT존, 하바드 존 등과 같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존 스미스라는 정보조직을 운영한다. 그러다 빅 존의 딸을 둘러싼 음모가 진행된다. 이 때문에 빅 존은 터너를 죽은 사람으로 바꾼 후 터너와 새로운 인물 조나단의 결합을 만든다. 한 명은 천재 프로그래머이고, 다른 한 명은 한때 돌아이 취급을 받았던 지질학자다. 이 지질학자를 통해 일본 침몰 같은 거대한 음모가 가능해진다.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빠른 장면 전환을 만들어내었다. 쉴 틈 없이 변하는 장면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각각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의 만남은 유보된다. 그러다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또 하나 무리한 설정이 들어간다. 장민우와 같은 10대의 정보국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이 몰입도를 많이 떨어트린다. 너무 거대한 설정과 음모를 만들다 보니 많이 오버한 것 같다. 오히려 판을 키우기보다 조금 줄인 후 밀도 있는 관계와 상황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한 말들은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통쾌하겠지만 실제 자위대 출신이라면 금방 납득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조금 더 냉정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세운 가설과 논리 등은 비전문가 입장에서 놀라게 만든다. 너무 힘이 들어갔는데 조금 더 힘 뺀 후 이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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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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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십 수 년 전 너무나도 유명한 <멋진 신세계> 이후 처음이다. 그 사이에 다른 책을 한두 권 정도 더 산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헉슬리의 소설은 그렇게 쉽지 않다. 이번에는 더 그렇다. 얇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책소개를 먼저 읽은 탓에 나도 모르게 몇 가지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여기에 소설도 탤리스와 각본으로 나누어져 있어 일반적인 소설 읽기 방식으로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각본은 탤리스가 쓴 영화 각본을 의미한다.

 

간디가 암살당한 날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와 밥은 대본을 실은 차가 달리다가 흘린 대본 하나를 줍는다. 이 대본이 바로 탤리스가 쓴 각본이다. 둘은 이 각본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탤리스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의 몇 가지 정보를 얻는다. 여기서 이야기가 더 진행될 것 같았는데 각본으로 넘어간다. 탤리스가 쓴 각본을 그대로 실는다는 말로 탤리스는 끝난다. 이 부분을 읽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더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각본은 제목 그대로 영화 각본이다. 은밀하게 따지면 영화 시나리오와는 다르다. 그래서 더 집중해야 한다.

 

원숭이와 아인슈타인이 나올 때만 해도 나의 머릿속에는 <혹성탈출>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원숭이와 3차 대전이란 단어가 결합하면서 가장 낯익은 영화가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설정이 아니다. 이 원숭이들을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이면 3차 대전을 유발한 인류의 본모습이 된다. 실제 이야기도 3차 대전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미래를 다룬다. 흔하게 보는 미래의 풍경이 아니다. 감마선에 노출된 사람들은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고, 문명은 퇴보했다. 이 시대의 권력을 쥔 대주교는 기존의 신앙을 부정하고 벨리알을 숭배한다. 미래의 지금을 벨리알이 의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다. 이런 세계에 한 식물학자가 잡혀온다.

 

풀 박사는 일행과 함께 조사하기 위해 왔다가 납치된다. 그가 사는 곳은 아직 신이 존재한다. 그런 그가 감마선에 의해, 벨리알에 의해 뒤바뀐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와 함께 온 일행 중에는 그의 엄마가 결혼하길 바라는 여자도 있다. 그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잡혀 온 곳에서 룰라라는 소녀에게 빠진다. 이곳은 일 년에 며칠 동안만 성교가 허락되는 곳이다.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은 인간의 생존 방식이 변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아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바로 죽인다. 엄마의 머리는 대머리로 만들어 사람들의 놀림이 된다. 여자는 죄악의 원인인 곳이다. 종말을 향해 인류가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다. 종교가 지닌 폐단의 극단적인 모습 중 하나를 제대로 보여준다.

 

풀 박사와 룰라의 관계는 이 뒤틀린 세계에 한 줄기 문명의 빛을 내비친다. 인간의 특성이 소멸한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기형의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는 세상이지만 그들이 인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것을 풀 박사는 제대로 본다. 물론 난교의 밤에 욕망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악마의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신만 정신을 차린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용사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식물학자일 뿐이다. 인류에게 잠깐의 실수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었는데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각본 속 연출들이 시각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핵과 종말이 던지는 공포는 충분히 전달된다. 하지만 제대로 마무리가 된 느낌은 조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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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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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는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이자 미국 탭댄스 빌 로빈슨의 애칭이다. 이 노래는 화자의 부모님이 함께 춤을 출 때면 언제나 흘러나오는 노래다. 이 가족에게 춤은 즐거움, 기쁨, 행복, 신남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이 독특하고 낯선 가족에게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다. 평범하지 않기에 평범하게 살아온 내가 그 행동들이 이상하게만 다가왔다. 그러다 유치한 말장난이 기발한 단어 조합으로 다가왔고, 부모님의 사랑이 예전에 보았던 영화나 소설들을 떠올리며 비교하게 만들었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광란의 사랑>이 가장 비슷한데 이들의 사랑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소설은 아버지의 일기와 화자의 회상이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한 소년이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는 좀처럼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한다. 시계도 숫자가 나오는 전자시계만 볼 수 있고, 시침 등이 있는 시계는 보지 못한다. 그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런 사실은 교사와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소년을 세계 최연소 조기 퇴직자로 만든다. 틀에 박힌 교육을 견디지 못하는 소년과 그 가족에게는 아주 신난 일이다. 덕분에 소년의 시간은 많이 남아돌고, 부모와 함께 스페인의 별장으로 휴가를 언제나 떠날 수 있게 된다.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을 설명한 글을 보면서 아주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만 놓고 본다면 서로 농담을 하면서 장난을 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엄마에게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의 곁에 없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남편이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자 일을 그만두었다. 이후 이들의 삶은 행복과 즐거운 놀이로 변해 있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잠시나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신들의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세금납부 고지서를 놓친다. 세금과 가산세가 엄청나게 불었다. 결국 집 하나를 팔아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엄마가 보여준 행동이다. 자신이 만든 세상과 환상 속에서 사는 그녀에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기록들을 불태운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읽으면서 아빠가 분명히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아내에게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장단을 맞춘다.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다. 첫 만남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이것은 계속된다. 이런 사랑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런 이상한 가족에게도 친구는 있다. 쓰레기라고 불리는 국회의원이다. 가족과 함께 긴 휴가도 가고,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더부살이 아가씨로 불리는 커다란 두루미도 있다. 엄마가 책을 읽으면서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두루미가 함께 산다 것 자체도 특이하다. 이 다섯이 이 길지 않은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다.

 

경쾌하고 가볍다. 잘 읽힌다. 유쾌한 가족의 행동을 보면 즐겁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거워진다. 엄마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탈출한 후 은신한 스페인 성에서 보여준 이상증상이 이렇게 느끼게 만든다. 아빠가 보여준 정성과 사랑은 비현실적이다. 터무니없는 일 같다. 엄마의 현실 인식 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빠의 모습이 놀랍다. 그런데 부럽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주고 헌신하는 사랑이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한 맹세는 한국에서는 흔한 거짓말 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니다. 진심이다. 무거워졌던 마음이 이 문장 하나로 다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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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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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능파란 단어를 보고 공공장소에서 읽기에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극적인 성애 묘사를 연상한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했다는 문구가 이런 쪽의 상상을 더 부채질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관능적인 장면은 보이지 않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것도 남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이 청혼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한 것은 엄마를 찾아간 것이다. 결혼해도 되는지 묻기 위해. 엄마는 찬성한다. 이 놀라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오봉에 앗케시 마을의 스즈란긴자에서 한 여자가 분신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세쓰코다. 세무사와 엄마 집을 방문한 후 집에 둔 것이 있다고 말하고 갔는데 불이 났다. 완전히 타 신원 파악을 세무사와 몇 가지 단서로 했다. 세쓰코가 맞다. 몇 개월 후 남편 기이치로도 죽었다. 이 둘의 장례식을 주관한 것은 세무사 사와키다. 기이치로의 호텔 로얄을 담당하고, 한때는 세쓰코의 고용주이자 애인이었다. 물론 결혼 후에도 둘은 가끔 만나 몸을 섞는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면서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 일어난 사건과 일상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에로틱한 뭔가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뒤틀린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세쓰코의 일상도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아니고, 그녀가 참가한 단가 모임의 미치코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암을 앓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세쓰코의 일상은 강하게 소용돌이친다. 남편의 딸 고즈에를 찾고, 러브호텔을 직원에게 넘기려고 한다.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바람을 피는 그녀가 할 행동은 분명 아니다. 이 이상함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데 마지막에 한 방 크게 터트린다.

 

약간 평범하고 밋밋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단가 모임 동기인 미치코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아니 그녀의 딸 마유미를 세쓰코에게 맡겼다. 아이의 팔에는 꼬집힌 흔적이 있다. 분명히 아동 학대다. 마유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즈에에게 맡긴다. 돈을 조금 주고. 어린 아이를 돌보는 단순한 일처럼 보이는데 뒤에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과 이어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무섭다. 보여지는 표정과 감정 뒤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서늘한 느낌이 가슴 한 곳으로 파고든다.

 

유리 갈대는 세쓰코가 지은 단가집의 제목이자 단가의 제목이다. 그녀가 몇 번이나 자신의 단가를 인용해서 말한다.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그녀의 삶속에는 무엇이 흐를까? 이 허무와 공허함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치코와 함께 한 행동과 그 반응은 이것을 더욱 공고화시킨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후 예상한 반전이 나올 때까지는 더욱 더. 하지만 그 이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결국 알아채는 사람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와키 세무사 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사와키는 탐정 같은 역할도 하고, 경영컨설팅도 하고, 한 여인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그의 강한 책임감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한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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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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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베니언의 소설 중 번역된 것이 몇 권 되지 않는다. 운 좋게도 모두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이 예전에 장원에서 나온 <니콜라이>였다. 이때는 트리베니언이 누군지도 몰랐다. 굉장히 특이한 킬러가 나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이 재번역되어 새롭게 나올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다.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단 채로. 그 다음 소설은 헌책방에서 구한 <메인스트리트>였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우연히 들고 읽었는데 완전히 매혹되었다.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은 비채에서 <메인>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아이거 빙벽>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도 그 재미가 그렇게 줄지 않았다. 이때부터 트리베이언이란 이름이 완전히 내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말한 세 권의 소설은 각각 분위기가 다르다. 킬러, 경찰 등 직업이 다르지만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었다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은 사실 <카티야의 여름>이다. 이 책의 앞부분은 너무 정적이고, 움직임이 없어 과연 트리베니언의 소설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건은 언제 일어나고, 이 조용한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한 남자가 24년 전에 있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간단하게 담은 소설로 착각할 정도다.

 

구성은 간단하다. 24년 만에 바스크 지방의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가 24년 전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한 여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티야다. 본명은 다른 것인데 자신을 카티야라고 부른다. 때는 1914년 아직 1차 대전 전이다. 장 마르크 몽장 박사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이 당시는 아주 비쌌던 자전거를 타고 쌍둥이 동생의 부상 때문에 병원을 찾아왔다. 동생의 이름은 폴 트레빌이다. 둘은 성별만 다르지 외모는 아주 닮았다. 폴의 부상은 둘의 자전거 경주에서 비롯했다고 하는데 각자의 의견에 따라 원인이 달라진다. 이 만남과 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트레빌 가족은 파리에서 왔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살리다. 이 마을은 몇 가지 소문 때문에 환자들이 찾아온다. 그로 박사와 함께 의사로서의 생애를 이어가는데 그의 전공 분야는 사실 정신의학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의 정의감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은 간단한 현실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 즉 쫓겨난 것이다. 고학으로 힘든 의대를 마쳤고, 학창 시절 자신이 바스크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다. 태생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아직 그의 순진함과 순수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카티야의 등장과 트레빌 가족과의 만남은 의사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젊은 여자에게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다. 쌍둥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할 수 있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카티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미녀라기보다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다. 해부학과 프로이트의 책을 읽는 특이한 여성이다. 폴은 몽장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실 이 반응이 나올 때만 해도, 왜 그들이 살리에 왔는지에 대한 소문을 그로 박사에게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 나의 상상력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몽장은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 마을은 금방 소문을 퍼나른다. 이 소문을 그에게 전하는 역할은 하는 인물은 그로 박사다. 이 소문 때문에 폴은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카티야가 몽장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폴의 반응은 더 적대적이다. 몽장이 들은 소문을 말하면 더욱 화를 낸다. 약간 평범한 로맨스 소설 같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폴이 한다. 정신병이 있는 것 같은 아버지는 학문 연구에 정신이 없다. 암흑 시대에 대한 관심이 깊고, 풍부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바스크 지방 축제를 가게 되는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정적인 상황과 한 남자의 순애보 같은 이야기 전개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트리베니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지막 40여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차분하게 문장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작가에 이전에 깔아놓은 설정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 윤곽이 보였다. 왜 이 작품을 스릴러라고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이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과 더불어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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