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에프 그래픽 컬렉션
루이스 트론헤임 지음, 위베르 슈비야르 그림, 이지수 옮김 / F(에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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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애정하는 에프 그래픽 컬렉션 중 한 권이다. 이 그래픽노블은 도입부가 충격적이다. 휴가지에 도착하자마자 약혼자가 간판에 목이 잘려 죽는다. 바람 때문이라고 하지만 황당한 상황이다. 그의 죽음은 파비엔느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가 기댈 것은 약혼자 롤랑의 노트뿐이다. 노트에 기록된 숙소를 찾아가고, 투우장에도 간다. 롤랑은 노트에 함께 휴가를 보낼 계획을 꼼꼼하게 작성해 놓았다. 홀로 남은 파비엔느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그 노트의 일정을 혼자서 따라간다. 그러다 현지인 파코를 만난다. 얼핏 보기엔 술꾼 같고, 어떻게 보면 여행자를 유혹하려는 난봉꾼 같다. 유령처럼 부유하면서 일정을 따라가던 그녀에게 파코는 작은 침입자다. 실제는 친절한 현지인이다.


파비엔느가 롤랑의 일정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휴가를 즐기려고 온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강하게 대비된다. 아주 정적인 그녀의 모습에 변화를 던져주는 역동성은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서 온다. 걷고, 보고, 멈춰 있는 그녀가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우연히 날아온 배구 공이나 몰래 다가온 아이들이 이 정적인 풍경을 깨트린다. 그녀의 시선이 휴가를 즐기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녀가 느낀 상실과 혼란이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점으로 표시된 눈의 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다.


파비엔느와 파코가 만나고, 서로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다. 파코가 말한 어린 시절 불행과 그가 모으는 세계 각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수집이 타인의 죽음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란 사실이 드러나고, 롤랑의 사고 내역을 알게 되면서 둘은 한 발 더 다가간다. 죽음을 애도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정해진 일정을 따라 가는 그녀가 파코를 불러 저녁 식사를 하는 부분에서 죽은 약혼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녀가 들고 있던 노트의 의미도. 작가는 이렇게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고 알려주기 보다 이야기 속에 하나씩 녹여낸다. 무심코 본 장면이 다시 볼 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행용 가방 하나의 의미는 강렬하다. 처음에는 무거워서 차에 그냥 실어 두었다면 나중에 휴가지를 떠날 때는 그 가방을 차 밖에 둔다. 약혼자에 대한 애도와 관계를 암시한다. 그녀가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강하게 짖던 개는 케밥 하나에 조용해진다. 파코는 자신의 오줌을 부었었다. 그녀와의 동행 이후 파코의 대응 방법도 바뀐다. 작가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일상의 삶을 곳곳에 뿌려 놓았다.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과 그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사건이지만 타인들에게는 그 사건이 일회성 관심사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휴가를 즐기려고 왔다. 파코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파비엔느도 자신의 삶을 점점 찾아간다. 표정과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그렇게 두툼하지도 않고, 대사가 많지도 않다.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잠깐 멈춰 그림에 집중한다. 관광객의 표정과 여행 온 가족들의 모습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느낀다. 펜으로 그린 섬세한 그림은 사람들의 다양한 체형과 역동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듯하지만 무표정한 표정과 감정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채워지지 않고 남은 공백을 통해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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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i origin이었나 엘베.나오고 참혹한 씬이.겹쳐 떠오르네요. 도입부 소개해주시는.부분에서^^,,

행인01 2021-07-15 11:1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지 않아 이미지가 겹쳐지지는 않네요.
언제 기회가 되면 영화 한 번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