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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 임은정 장편소설
임은정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내용의 큰 줄기는 어느 날 갑자기 강간 살인범이 된 정원섭은 자신의 무죄를 벗기위해 거대한 사법부와 맞서 싸운다는 사실에 근거한 내용과 유부남인 자신과 무려 스무살 가량 차이나는 순옥과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룬다. 현재과 과거의 교차적 서술 방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사건 일지를 보는 듯하다.
팩션이라하기엔 진실의 무게가 너무 크고 사건이 지닌 의미 또한 깊다.
누명을 쓴 주인공이 39년이란 시간을 대한민국 사법부와 싸운 투쟁이 안타깝게도 소설적 재미를 위해 끼워넣은 사랑이야기로 빛이 바랜다. 무엇보다 '누명'이란 지독하고 끔찍한 상황을 자신이 사랑한 순옥에게 엮여 살인자로 복역중인 것으로 짜여진 스토리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였고 실제 사건의 본질이 옅어지는 아쉬움이 아주 컸다.
1972년 춘천경찰서 역전파술소 소장의 딸을 성폭행하고 목졸라 살해된 사건으로 당시엔 전국 4대 강력 사건으로 규정되었던 바 있다. 유신 개헌 선포를 앞두고 시한부 검거령이 떨어져 범인을 잡지 못하면 관계자들의 문책하겠다는 지시로 정확한 수사보다는 협박에 의한 위증, 증거 조작, 짜맞추기 식으로 범인을 몰고가는 등 결국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으로 삶이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힘없는 개인은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 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마지막 희망이라 할 법원마저 그의 호소를 귀기울여 들어주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록이라 할 몇몇 사건이었다. 그중 군부독재 시절 법관 임용제인데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강제로 내쫓은 재임용제는 판사들이 권력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이러한 억울한 사건들이 재심에서조차 해결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행히 노무현 정부에 와서 진실.회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고 여러 사건들이 바로잡 졌다는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이 사건이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당사자도 그렇지만 살인자의 아내로 자식들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나달나달해진 삶은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아직도 보상금 문제로 진행중이라한다.) 그것이 보상으로 해결된다고 보는가....
가장 끔찍하고 가슴 철렁했던 것은 책 뒤에 실린 '당신도 강간 살인범이 될 수 있다'는 정원섭씨의 글귀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그 순간 내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