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전쟁 - 금융 위기 이후 중국 경제석학의 미래 보고서
취엔위엔치.량치똥 지음, 김준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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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미국은 단지 경상을 입었을 뿐이고 유럽은 중상을 입었는데 중국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이책에 소개되는 관점이다. 중국의 입장에 치우친 견해이긴 하지만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긴 하다. 중국경제의 모델이 바뀌어야 하는 강요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예컨데 (원자재 공급원과 제품 판매 시장이라는) 양 끝을 밖에 두고, 크게 들어오고 크게 나가는 (대량으로 수입하고 대량으로 수출하는) 외향적 경제발전 모델로, 외수(외부 수요)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번 위기는 중국이 택한 모델 자체의 한계와 모델의 내재적 한계 두가지를 해결해야만 하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금융위기를 전환점으로 중국 경제는 고비용 시대로 들어섰다. 중국은 지금까지 값싼 원자재와 인건비를 비교우위로 삼아 성장해왔다. 그러나 더 이상 저비용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올라 베트남 등의 나라에 뒤지고 외수도 예전같지 않을 것이므로 성장을 이끌었던 투자는 예전 같은 속도를 낼 수 없다.

이젠 소비가 투자를 대신해 성장을 이끌어야 하지만 수요가 단기간 내에 성장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아마도 구조조정 시기에 들어설 것이다.”

기존 모델의 효율은 한계에 달한 듯 보인다. “중국은 국제시장에서 심각하게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 중국이 무엇을 사든 그것은 가격이 오른다. 중국이 무엇을 팔든 그것은 가격이 떨어진다.” 70%에 달하는 대외의존도 덕분이다. 경제의 외형은 커졌지만 그 덕분에 비용이 올라간다. 더군다나 그 외형은 실속이 없다. “미국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낮은 저축률로 70% 이상의 고소비를 지탱한다. 중국은 50%의 높은 저축률로 30% 내외의 낮은 소비를 유지한다.” 결국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으며 경제적 위기는 언제든 사회적 위기로 바뀔 수 있다.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적기라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교육, 의료, 양로, 주택, 사회보장 등은 경제발전의 기본 동력이 될 수 있다. 만일 이 문제들을 남겨두었다가는 사회와 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에 무거운 부담이 될 것이다. 지금 내수 확장을 이끌어내는 사회사업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으면 발전의 찬스를 잃어버릴 것이다.”

중국이 구조조정의 전환점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외향적 경제모델 자체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국제분업 측면에서 본다면 하이테크 영역과 기술집약형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경쟁력은 미국을 넘어서지 못한다. 전통적인 공업과 노동집약형 상품 분야에서 일본의 경쟁력이 신흥 공업국을 넘어서지 못한다. 21세기에 둘어선 일본은 어떤 영역에서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산업이 없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는 인터넷을 대표로 한 정보기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해 제조업을 대표로 하는 일본은 기존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본 기업들은 새로운 상품을 내놓을 수 없었고 일본의 공산품이 세계시장에서 1등을 독점하던 상황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정보산업을 주축으로 한 미국 경제가 다시 우뚝 솟았다. 정보 시스템에 대해 말하자면 미국의 산업과 상품이 세계를 주도하고 1등을 독점했고 일본은 정보혁명의 낙오자가 되었다.”

일본의 현재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버블붕괴의 후유증이기도 하지만 경제가 방향을 잃었다는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그들이 방향을 잃은 것은 대세를 놓쳤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정보화에 낙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모델의 문제이다. 일본의 캣치업 모델은 따라갈 방향이 분명할 때는 잘 작동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방향을 개척해야할 때는 헤메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면 일본의 모델을 따라했던 한국 그리고 중국은 어떨까?

일본의 현재는 일본을 따라갔던 한국 그리고 중국의 미래이기도 하다. 일본식 모델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이 한국은 물론 중국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문제였다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금융위기의 결과 “네 마리 호랑이는 모두 죽었고 네 마리 용은 두 마리 반이 죽었다. 수입대체와 수출주도는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을 가져온 모델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경제발전이 일정단계에 도달한 뒤에는 그 모순이 밖으로 드러난다. 경제발전이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생산원가가 높아져 수출이 억제되고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이 수출주도 전략이 수많은 나라들의 발전전략이 되면 각국 간의 상호 경쟁이 형성된다. 상품의 단계적 진보는 수출주도를 계속 실행하기 위한 필수조건인데 값싼 자원과 노동력에만 의존해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아시아 국가들은 고석 성장을 실현한 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지금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관점 하나는 바로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가 아시아의 수출주도형 발전모델이 철저히 끝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모델의 한계는 내생적인만큼 이제는 외생적으로 시효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 모델은 내생적으로 과잉투자를 부른다. “생산능력 과잉은 중국경제ㅐ의 고질병이자 난치병이다.” ‘고투자, 고소모, 고오염, 저산출’이라는 ‘3고 1저’는 대량의 과잉생산능력을 낳았고 자원의 낭비를 불러왔다. 그 낭비는 정부의 투자로 만들어진 것이다.

“계획경제 체제의 타성은 생산능력 과잉의 주원인이다. 이는 방대한 중공업 체계를 적절하게 전환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진입한 후에도 정부의 중심 작업은 여전히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운영 모델은 어느 정도 계획경제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었다.

계획경제 시기에 ‘협상가격차’ 정책을 실시해 농민의 이익을 박탈하고 도시의 발전과 공업 건설을 지탱했다. 현재 농민들은 요 몇 년 사이 자주 나타나는 경기과열로 여전히 손해를 입으며 농촌은 시장위축을 보이고 잇다. 동시에 기업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지나치게 낮아 소비능력을 떨어트리고 의료 주택 교육 분야에 대한 정부의 방대한 지출은 소비 전망을 불확실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히 소비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처럼 경제성장의 트로이카 가운데 소비라는 말 한 필이 힘이 없으면 결국 투자에 기대러 경제성장을 끌어당길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생산능력 과잉을 도리어 격화시켰다.

현행 관리체제의 결함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첫번째는 세금제도의 결함이다. 중국의 세수는 간접세를 위주로 하는데 이런 세수구조는 정부가 온 힘을 다해 경제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게 해서 특히 2차 산업을 강조해 재정수입을 확보하게 한다.

두번째는 관리승진 시스템이다. 관리승진 심사의 주내용은 아직도 GDP나 세수, 투자유치 등의 경제지표인데 현실절으로 이들 지표를 초과달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버은 바로 제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관리들이 공공자원을 사용해 제조업 발전을 가속화시키고 빠른 전시행정을 추구하게 하여 생산능력 과잉을 부른다.”

“국유자본은 생산능력 과잉을 억제한다며 민간자본을 억압한다. 대형 국유기업이 더 많은 융자와 토지점용, 특별금융, 정책적 우대특권을 누리며 더 많은 과잉을 낳고” 더 효율적으로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민간자본을 몰아내고 시장의 수요에 부합하며 더 높은 부가가치를 낳을 수 있는 하이테크 산업과 서비스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과잉생산능력 자체가 바로 일찌감치 도태되어야 할 낙후된 생산능력이라는 것이다.” 기초산업과 첨단산업이 지나치게 부족한데도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 과잉상태인 전통산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간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경제구조의 불합리는 무역구조의 불합리에 집중적으로 반영된다. 중국의 수출에서 가공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2008년 그 비중은 41.1%였고 많은 수출상품이 OEM인데 대부분의 이윤은 외국 브랜드업체가 가져가고 오염과 저원소모는 국내에 남는다.”

그러나 고비용구조로 중국경제의 체질이 바뀌면서 “ 이상 ‘로우엔드 제조 + 염가수출’의 모델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과잉투자가 자원의 낭비로 그친다면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지만 중국의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경제 대공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지금 중국이 직면한 것은 마치 1929년의 미국과 서방세계가 직면했던 문제와도 같다. 중국 경제는 세계 경기순환의 본질적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전 세계에 생산과잉의 위기가 출현한 것이다. 미국의 자산 불리기와 과소비는 중국을 대표로 한 ‘세계의 공장’에 매우 큰 생산력을 만들어냈고 이는 중국이 매년 수출과 무역흑자가 증가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경제위기로 미국의 소비수요가 위축되고 이어 더 많은 외부 수요가 사라져 버리면 중국의 과잉생산능력은 기업 도산이나 실업률 증가 등 심각한 문제를 양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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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보다 해법이 많다 - 못난 사람이 핑계만 찾는다
우간린 지음, 류방승 옮김 / 아라크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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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을 받아보고 든 생각은 ‘또 속았다’이다. 요즘 자기계발서로 나오는 책들의 특징은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이책과 같은 제목이라면 내용은 이런 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터에서 또는 경영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문제상황들을 제시하고 그 문제상황들에 대한 해법을 찾아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올해 나온 책들중에서 그런 식으로 쓰여진 책이 몇권 생각난다. 그리고 대개 그런 책들은 컨설턴트들이 쓴 것이다. 실제 컨설팅을 하면서 만난 클라이언트들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익힌 노하우를 쓰는 것이다.

이책도 그런 책일 것이라 생각하고 고른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엇다. 선택을 할 때 중국저자인 것이 불안하긴 했다. 지금까지 중국인이 쓴 자기계발서 치고 좋은 책을 못봤기 때문이다. 물론 평균은 된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예 번역도 안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중국저자들이 쓴 자기계발서는 몇 년전까지 쏟아졌던 미국식 성공학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미국식 성공학의 문제는 ‘하면 된다!’는 말 이외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도 않고 무엇을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다. 시작이 반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작 다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는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제가 잇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는 말만 하지 말고 해법을 찾으라는 것이 이책의 전부이다. 누가 모르나? 문제가 있으면 해법도 있게 마련이지. 문제는 그 해법을 어떻게 찾느냐 아닌가?

물론 그에 대해서 이책도 방법을 제시하긴 한다. 문제의 핵심을 찌르라는 말이나 안되면 장소를 바꿔봐라 라든가, 역발상을 하라든가… 말은 좋다. 문제는 그걸 누가 모르냐는 것이다. 다 들어본 말 아닌가? 그 내용이라는 것이 목차에서 볼 수 있는 단어 이상으로 전혀 나아가고 잇지 않다는 것이 이책의 문제이다.

결국 이책의 내용은 하면 된다!는 근성론 이상이 아니다.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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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오프 상하이
신동흔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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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시절 중국편승론이 유행한 일이 있다. 저무는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뜨는 중국에 편승해 대세를 따르자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 무렵 터진 동북공정으로 반중감정이 높아졌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사태로 반중감정은 최고치를 기록한다.

“일부 국가에선 중국 유학생과 교민들이 성화를 ‘보호’하자면서 맞불 시위를 벌여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만큼 극렬한 양상을 보인 곳은 없다. 이 중국인들은 서슴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돌과 보도블럭, 심지어 망치와 스패너까지 던지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퇴근길에 서울 광장을 뒤덮은 오성홍기의 물결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서울 시청 앞이 자기네 안방인가… 아니지 저들은 정작 자기네 안방에선 끽 소리 못하고 살지 않나’ 그날 서울 시내에 모인 중국인 군중의 숫자만도 1만명이 넘었다. 지난 1989년 이후 베이징에서 그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시위나 집회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가 보는 중국은 두 얼굴을 가졌다. 본국에선 입도 벙긋 못하면서 외국에선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천안문 사태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이나 일본, 대만의 정치현안에는 열변을 토한다.

중국인의 이중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이중성이 정상적일 수는 없다. 이중성의 이유를 저자는 화장실에서 읽는다.

“위화의 소설 ‘형제’에서는 화장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초자 허용하지 않는 당시의 중국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갑자기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집 안의 화장실을 폐쇄하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는 대목 등 다양한 일화가 등장한다. 화장실 칸막이가 낮은 것도 ‘사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엿다. 그러다 보니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입장에서도 완전히 밀폐된 것보다 약간 ‘열린’ 구조를 편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조금은 노출돼 있어야만 ‘나는 화장실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시절에 형성된 무의식 때문에 지금도 공중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놓고 일을 보거나 공개된 곳에서 스스럼없이 용변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이런 점에서 비춰봐도 지금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이 나라가 아직 억압적인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베이징에선 조용하면서 서울에선 마음대로 하는 중국인들. 저자는 그들의 이중성에서 억압을 읽는다. 그리고 그 억압이 풀리는 곳에선 마음대로 욕구를 배설하는 ‘무력감’을 읽는다.

“나는 그에게 대학생으로서의 비판의식 같은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저 멀리 참으로 ‘비정치적인’ 난쟁이 여인과 결혼한 장신 남자의 이야기로 도망쳐버렷다. 중국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함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 어차피 정치적인 부문에서 심한 무력함을 느끼지만 중국의 경제가 급물살을 타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을 ‘경제성장’이라는 ‘조증’과 정치적 무력감이라는 ‘울증’이 만나 사회적으로 조울증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스올 묘사하기도 한다.”

“중국 언론은 중국인들을 자신들의 나라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중국언론에는 화제를 끌 만한 엽기적인 이야기가 넘쳐난다. 나는 이것이 정치적 금기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포털에서는 일종의 ‘엽기 뉴스’ 코너의 콘텐츠를 중국 언론이 공급해주고 있다.

우리 집 아파트 출입구 근처에는 자동차 뒤쪽 번호판 범퍼에 부시(BUSH)라고 써놓은 뷰익승용차가 늘 주차돼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오는 길에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이게 부시가 아니라 ‘BULL SHIT”이었다. L자 두 개와 I, T자는 가까이 다가가야 보일 정도로 작게 표시해 놓아서 못봣던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과 영어 욕설을 교묘하게 연결한 것이다. 한데 그 차를 이용하는 것은 30대 중반의 상하이 남자였다. ‘왜 중국인이 미국 대통령에 대한 욕을 자기 차에 적어놓고 다니지?’ 이런 의문이 들엇다. 뭔가를 비판하고 싶긴 한데 중국 정부를 비판할 수는 없고 그래서 미국을 대체재로 선택한 것인가.

현재 중국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새장 속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그 새장의 존재를 모르거나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국 인민들이 돈벌이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80년 이후태어난 ‘바링허우(八零後)’ 세대들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럴만도 하다. 그들이 보고 자란 것은 ‘거대한 중국, 위대한 중국, 경제강국 중국’이었으니까.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은 외국인이 중국을 비판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잇는 중국은 어떤 중국인가? 그들은 수천년의 역사와 왕조, 황제에 대해선 무척 잘 안다. 그러나 부모들이 겪은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아픈 과거에 대해선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불과 몇십년 전에 자기들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람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청맹과니’ 같은 처지에 있다.

현재 중국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대국이 되었지만 덩치만 커져버린 아이처럼 아직 자신들의 경제수준에 맞는 정치적인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이 반성 없는 민족주의가 젊은 유학생들로 하려금 남의 나라 서울으ㅢ 한복판에서 망치와 스패너를 던지고 경찰관을 폭행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강해졌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미성숙’ 상태를 스스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앞으로 중국이 경제적으로 더욱 강해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북아 지역은 ‘신중화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신중화주의의 세계는 어떤 세상일까? 저자는 불안해 한다. “만약 중국이 지금보다 더 부유해진다면 노골적으로 주변 국가에 간섭할지도 모를 일이다.” 화평굴기를 말하고 조화와 화해를 말하지만 동북공정, 반일시위, 서울 한복판에서 폭력시위를 보면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본다.

“중국이 현재 수준의 의식을 갖고서 G2의 하나로서 세상을 호령할 만한 위치에 쉽게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덩치만 커져버린 사춘기 청소년은 아닐까 불안해진다. 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정보가 바로 지식과 연결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역사적인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잇다.”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미국과 붙어 중국을 경계한다’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안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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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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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역사가 있는가? 성경은 신의 말씀을 받아쓴 것인데 신의 말에도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이책은 그런 생각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는 입장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독선적이다 오만하다 심하면 미치광이들. 이런 말로 요약될 것이다.

얼마 전 결혼정보회사의 조사를 보면 그런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잇다.

“'배우자 조건 중 특별한 기피사항은 무엇인가?(기본적인 조건 외)'라는 질문에 남성 41%와 여성 50%가 '특정 종교'라고 답했다.

뒤를 이어 여성의 경우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21%),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18%), '특정 혈액형'(10%), '기타'(1%)의 순으로 답하였다. 기타 답변에는 '머리 숱의 많고 적음', '특정지역 유학 경험 유무' 등이 있었다.

남성의 경우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32%),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16%), '특정 혈액형'(9%), '기타'(2%)의 순으로 답했다.”

‘특정종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뻔하다. 교만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중세 기독교에서 지옥에 갈 7대 죄악으로 으뜸을 교만으로 꼽았다. 교만한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면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산상수훈’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하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믿음 자체가 ‘기적’이라 말한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결국 나의 주체적 삶의 신앙의 표현이다. 그것은 나의 일상성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에 대한 신념의 포기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아집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럼 그 교만한 자들의 믿음은 뭐란 말인가? 저자는 무지의 믿음이라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자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른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기독교에 관한 한 믿음의 근거는 성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서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기에 그 믿음은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별 것이 아니다. 신학대 학부과정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기초지식 조차 없기에 ‘개독교’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성서 역시 책일 수 밖에 없고 책인 이상 오자, 탈자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 또는 의도적인 변형, 전승 계통의 차이에서 오는 판본의 문제, 번역의 오류 등 셀 수 없는 오류에 노출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번역의 오류로 널리 알려진 경우를 보자.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근거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복음서에 인용된다. 그러나 이 인용은 그리스어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 인용구의 히브리 원문은 처녀가 젊은 여자였다. 복음서 저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을 몰랐던 것이다.

저자는 동정녀 잉태설은 문헌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복음서 기자의 픽션일 뿐이라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그런 예를 몇가지 더 든다. 동정녀 잉태설과 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억지로 끼워진 그런 픽션을 당시 예루살렘이 말살되고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햇던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사실에 접근하기는커녕 점점 그 본질로부터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들어가면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복음서의 기자들에게 사실의 기록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지 인간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그랫듯이 성서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주된 내용이다. 저자는 바울에서 요한까지 초기 기독교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외에도 밀라노 칙령을 전후하여 정경이 어떻게 선정되었고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 교회정치적 논리, 라틴어 번역의 성립과정, 구약의 번역과정, 판본의 문제, 외전의 의미 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주 내용은 신약의 주 텍스트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어떤 해석학적 틀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책의 주 목적이다.

저자는 복음서를 문학으로 다룬다. 효과를 기대하고 쓰여진 문학으로서 문학적 진실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소희 선생의 청아한 진양의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나 어린 도올은 매번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심청의 죽음은 나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 그만큼 감동은 크다. 그리고 그녀가 연꽃에서 부활했을 때 그리고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그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이 ‘기쁜 소식(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헬라세계에서 유앙겔리온(복음)이란 단어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곳은 전승의 소식장면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리그마의 핵심은 예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케리그마의 어떠한 양식을 통하여 어떠한 드라마적 배열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든지간에 그 말씀의 진실성은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최종적 소통이다.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여러자기 내러티브나 드라마적 장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는 케리그마의 핵심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저자는 복음서와 판소리를 비교하면서 복음서의 ‘진실’은 판소리의 진실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 마가복음이 처음 나온다. 마가복음 이전에는 바울의 서신들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바울의 예수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신(진리)이지 색신(역사적 예수)가 아니었다. “바울의 지평에서 예수는 매우 추상적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역사적 예수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의미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의 계시를 통해 직접 해후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 은혜와 믿음과 사랑과 정의의 예수였다. 따라서 그의 예수는 매우 추상적인 예수였다.”

저자는 복음서가 바울의 예수관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예수가 법신적 예수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색신적 예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 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그이 케리그마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수난극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복음서와 판소리는 진실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당시 교회에서 바울의 서한이나 복음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낭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와 같은 내용의 복음서를 낭송하는 것은 판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가복음은 빅 히트였다. 그 감동은 여기저기 교회마다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낭송자는 유랑극단처럼 여기저기로 순회공연을 다녓다. 70년에서 100년 사이는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복음과 동시에 기독교가 놀라웁게 팽창했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가 케릭스(낭송자)에 의해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엿다.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인토네이션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것은 거의 ‘판소리’라는 장르와 유사한 것이다. 낭송이 끝나면 성찬이 베풀어진다. 성찬이라는 것도 요즘처럼 쬐끔쬐금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먹고 마시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ㅏㄷ. 예수에게는 금욕주의라는 것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음악성 있는 메시지와 음식문화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때문에 초기교회에는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새로운 문화였다.”

그리고 그 문화를 완성한 것이 요한복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희랍의 신들은 술이나 처먹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질투와 음모와 살상을 일삼는 아주 퇴폐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나 상기시킬까, 전혀 인간의 구원과는 무관한 존재들이엇다.

희랍인들에게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유일신 신앙은 참으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만나온 신들은 전혀 도덕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 속의 하나님은 강렬하게 도덕적이었고 매우 체계적인 구원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마태, 누가 복음의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의 교양인들에게는 그런 이야기전승으로는 ‘그들의 지적, 종교적, 예술저그 문화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짙은 철학적 사색을 도배질하면서도 기실 공관복음서가 노리고 있는 모든 케리그마적 성격을 더 드라마틱하고 더 선명하고 더 실존적으로 듣는 이의 가슴에 와닿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위대성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는 요한복음 기독교라 해도 과히 어긋나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해석의 지평에는 (교리사에서 말하는 가현론이 아닌 헬레니즘 문화의 종합으로서) 영지주의라는 우주론이 깔려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철저히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어휘로써 새로운 복음의 해석의 지평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ㅜ역설적으로 기독교는 험난한 2,3세기를 살아남을 수ㅜ 있었다. 바울이야말로 기독교를 헬라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헬라세계에서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은 요한의 해석의 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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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속치마를 벗기다 - 구석구석 만져보는 인도이야기
오화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이책은 인도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로 쓰인 책은 아니다. 이책은 저자가 인도의 사회과학 명문인 네루대학에서 2년동안 강의를 하며 겪은 인도에 대한 단상들을 책으로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쏟아지는 인도여행기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 우선 저자는 전에도 인도에 관한 책을 냈었다. 이책이 처음이 아니고 저자가 인도를 알아온 세월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둘째 저자는 인도경제 전문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여행을 하며 스치는 인상을 적어놓은 다른 책들과는 차별된다. 과거와 달리 요즘 인도 서적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종교, 문화, 인도인/인도사회론 등 주제별로 차별화된 책이 많이 나온다. 이책도 그런 트렌드를 따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책이 다루는 주제는 인도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단상들도 나오지만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에 여러가지 주제를 다룬다. 가령 파키스탄과 인도는 같은 영국식민지를 겪었으면서 왜 인도는 군부 쿠테타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인도인들은 영어를 잘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가? 인도에서 운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인도에선 매춘이 정말 없는가? 온순한 사람들인 인도인들이 왜 군중이 되면 폭력적이 되는가? 와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대개 인도를 다룬 영미권 매체의 특집기사들에서 나올 법한 주제들로 가볍다면 가볍지만 나름 진지한 주제들이다.

여기선 맛보기로 독립 이후 인도의 경제사를 다룬 부분을 요약해보려 한다.

“”세계 10대 억만장자’ 순위에 가장 많은 갑부 명단을 올려놓은 곳도 인도이다. 미국도 다른 선진국도 아니다. 10명 가운데 4명이 인도인으로 미국92명0보다 2배나 많다. 큰 부자뿐 아니라 작은 부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 200년 연간 소득이 1천만 루비(약 2억 5천만원) 이상인 가구는 총 2만가우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3년 후 2005년에는 5만 3천가구, 2008년에는 10만 5천가구로 급증햇다. 금융소득 100만 달러 이상인 백만장자도 2008년 14만명에 달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인도의 국민소득이 1천달러에 불과한 것만 보고 인도에 와 돈 자랑을 한다. 이 돈이면 인도 시장을 흔들어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투자처를 문의한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인도 부동산 시장의 열기는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대도시에선 부동산 값이 한 해 몇 배씩 뛰는 곳도 많다. 바닷가인 뭄바이의 반드라웨스트, 말라바힐 등은 국내외 부자들의 최고 투자처로 각광받는다. 이들 지역 주택값은 서울 강남을 호가한다.”

인도의 성장률은 경제개혁이 시작된 90년대 연 5-6%, 2000년대에는 연 8-9%에 달했다. 그런 성장률이라면 위와 같은 결과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경제의 성장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예상한다. 이유는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4가지 변수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노동. 인도는 12억 인구대국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인구의 60%가 25세 이하라는 것이다. 물론 인도의 문맹률은 30%에 달한다. 문맹률이 높으면 노동인구 연령층이 자동으로 쓸만한 노동인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도의 굥육열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것에서 저자는 장래를 낙관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자본. 경제성장세를 타고 자본이 빠르게 축적되고 있고 해외자본의 유입도 급증하고 있다.

셋째 기술. 인도는 기술후진국이다. 그러나 인도는 해외기업을 M&A해 기술격차를 해소하는 전략을 택하고 잇다.

넷째 정책. 3가지 조건을 갖추어도 정책이 올바르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요원하다. 그러나 현 수상이 재무장관으로 있었던 91년 경제개혁을 주도한 이후 인도의 정책은 올바른 방향을 가고 있다.

그러면 91년 이전엔 어떠했다는 말인가? 인도경제를 언급하면 반드시 나오게 마련인 라이선스 라즈가 문제엿다. 저자는 라이선스 라즈로 상징되는 간디와 네루의 유산이 인도경제의 족쇄였다고 말한다.


간디하면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실제 간디의 삶도 철학도 그랬다. 독립운동 기간 내내 간디는 산업화를 비판하고 반대했다. “산업화는 인간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산업화는 농촌 사회에 치열한 경쟁을 초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농촌사람들에 대한 착취로 귀결될 것이다.”

“간디가 산업화에 반대한 이유는 인간의 이상적 삶의 형태가 목가적 시골생황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반 산업화, 반 테크놀로지, 반 도시화, 반 외국상품 운동은 인도인을 자각시키고 독립을 달성하는 힘이 되었다.”

네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루는 더 부정적인 유산을 남긴다. 그는 생각만이 아니라 수상으로서 국가정책 차원에서 인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간디의 반감은 결국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었고 그 제국주의가 상징하는 문명의 방식에 대한 반대엿다.

네루 역시 그런 반감을 공유햇고 간디의 목가적 농촌에 대한 이상도 공유했다. “네루는 간디의 ‘농촌이 인도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정책으로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인도 면화 산업을 부추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면화? 하품이 난다.

네루는 간디의 낭만적 이상에서 한술 더 떳다.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택하게 했고 시장경제를 온갖 규제로 조이고 간섭했다. “사업에 대한 극심한 규제로 빈곤자와 실업자는 더욱 늘어났다.”

독립 이후 91년까지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2-3%였다. 보통 힌두 성장률이라 비아냥댄다. 그러나 라이선스 라즈란 족쇄를 차고도 그런 성장률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술주정뱅이 남자가 있어 해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랫더니 그는 소송을 제기했고 우리가 이기기까지 15년 동안 경영진의 시간을 빼앗지요.”

“그래서 기업들은 기업을 확장하면서도 직원 채용을 꺼린다. 경기가 후퇴하면 직원 해고를 못해 파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물론 농민들조차 높은 세금과 규제정책으로 피해를 호소할 정도였다. 사업에 대한 극심한 규제로 빈곤자와 실업자는 더욱 늘어났다.”

농촌의 이상도 좋고 자립경제도 좋다. 그러나 가난은 어쩌란 말인가? “인도의 가난은 끔찍하다. 하루 500원도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극빈 인구가 자그마치 8억명이나 된다.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산업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산업화가 이루어져야 수천 년간 내려온 카스트도 해체될 수 있다.”

경제의 목을 죄는 라이선스 라즈를 벗기 까지 인도는 1966년과 1991년 두번의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고 IMF에 손을 벌려야 햇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무역과 재정, 자본수지의 트리플 적자 때문이엇다. 그리고 두번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인도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결국 2차례에 걸쳐 루비화를 평가절하했고 다시금 IMF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립경제란 자존심은 만싱창이가 됐다. 제2차 외호나위기를 계기로 인도는 자립경제정책을 벗어던지고 개장적 시장경제로 대전환을 시도한다. 네루 이후 40년간 이어져온 스와데시와의 결별이엇다.”

인포시스의 전 CEO 닌단 닐레카니의 말이다. “인도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농촌부락에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 중 아무도 농촌에 살고 잇지도 않으면서요. 인도는 지금보다 빠르게 그리고 바람직한 도시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잇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구의 모든 선진국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인도는 이런 역사적 추세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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