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 위대한정복자
폴 카트리지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캠브리지대 고대 그리스사 교수가 쓴 이책은 그가 한 강의노트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로 읽을 수 있다.

이책을 읽고 든 생각은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선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처럼 역사적 알렉산더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책에서 저자는 알렉산더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과 평가 신화 등을 소개한다. 알렉산더에 대한 평가만으로도 하나의 학문분야가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이다. 그가 살아있던 때부터 그에 대해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의 신정통론은 업적이 크다는 것은 이론이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별볼일 없다 라는 정도로 요약될 것같다. 저자의 논조도 대체로 이를 따라간다.

이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알렉산더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몽상가이다. 알렉산더가 좋아했던 책은 호머의 일리아드였다. 그가 꿈꾸는 것은 그리스 영웅이었고 그 영웅은 명성을 쫓고 자기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통치자라기보다는 전사이다. 이책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알렉산더의 생각을 통치자에게 어울리게 바꿔주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먼저 살았던  공자도 그랫고 당시는 고전고대 시대로 정치철학이 완숙된 시절이었다. 당시 완성된 정치철학에서 군주란 민심을 헤아리고 천명을 받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움직인 것은 그런 정치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야망과 허영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소수의 병력으로 쓰러트릴 정도로 유능한 전술가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권력을 다룰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가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룬 정복사업의 결과 위에서 그의 사후 중동의 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하나로 합쳐진 헬레니즘이란 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가능했고 로마제국 위에서 기독교가 일어나고 지금의 서구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알렉산더는 존경할만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자신의 명성과 새로운 도전 또는 모험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후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비전이 전혀 없었다. 물론 정치적 감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정복자체가 당기는 것이지 통치는 지겨운 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아이로 살았던 것이다. 게다가 술주정뱅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독재적인 기질이 있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저자의 평가로는 알렉산더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요즘으로 치면 개인의 제국을 만들려는 꿈에 사로잡혀 재벌왕국을 만들어가는 유능한 기업가 정도가 알렉산더와 가장 닮은 유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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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소금의 시대 2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 열림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대체역사소설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책을 구입하고 첫권의 첫 페이지를 보았을 때의 인상은 놀라움이었다. 서유기의 인용으로 시작되는 첫 페이지는 이렇다

삼장법사:
오공아, 부처님이 계신 서역까지는 얼마나 먼 게냐?

오공:
젊어서 길을 떠나 늙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젊음이 돌아올 때까지 걸어야 하며
이런 순환을 천번 거친 뒤에도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기가
어려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은 의지로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닫고
생각의 가지 하나하나가 기억 속 근원으로 돌아가면
그때 비로소 영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대해 이보다 더 시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솔직히 내가 아는 서유기는 어릴 적 아동용 만화 이상이 아닌 이상한 괴물이 나오고 모험이 있는 애들을 위한 이야기책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애들 이야기로 알던 책에 불교교리의 정수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읽고 이해한 다음 인용하는 '미국인' 저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인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책의 주제로 삼아 표현하는 저자의 능력이었다.

이책은  같이 시간을 떠도는 3사람이 10번 윤회하면서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윤회는 깨달음을 위한 구도의 여정이다. 그리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그 윤회는 나 혼자만 시간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지배를 받는다. 이책에선 하나로 묶인 3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윤회는 나 하나 또는 몇명의 도반이 같이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떠도는 것이 생각하는 것같다. 대승불교의 보살론이 말하듯이 깨달음은 해탈은 나 하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같이 깨닫는 것이다. 저자는 대승불교의  보살론을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깨달음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깨달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같다.

"신은 없다. 우주 자체가 신성하고 인간이 신성하고 모든 간각 있는 존재는 다 신성하며 힘써서 깨우칠 수 잇으므로 모두 일상생활과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 날마다의 행동으로써 감사하고 숭배해야 한다. 그야말로 가장 겸손한 종교예요, 사실 종교도 아니죠. 더 나은 삶의 방식일 뿐."

그렇기에 불교교리가 실현된 세상은 전쟁이 없고 불평등이 없으며 정의가 실현된 곳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인류의 역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역사는 여자들의 생기주기 같았죠. 삶의 일상적인 재료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의 작은 알, 그리고 아주 작은 야만인 군단이 쳐들어오고 찾으려고 애쓰고 실패하고 서로 싸우고 마침내 피투성이 찌꺼기가 그 가능성을 끝내면 모든 게 전부 다시 시작되는 거죠."

저자가 보기에 지금의 세계를 만든 서구문명은 그런 깨달음과는 반대에 있다. 서구문명의 기초를 만든 지리상의 발견은 신세계 원주민의 파멸이란 대가로 했고 경쟁을 최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며 지구를 파괴하면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서구문명이 존재하지 않앗다는 가정하에 역사를 다시 쓴다.

이책의 시작은 중세에 실크로드를 따라 페스트가 퍼져 팍스 몽골리아가 붕괴된 시점부터이다. 단 페스트로 유럽의 인구가 1/3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 멸종했다는 가정에서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재구성한 역사는 지금까지의 역사와 큰 줄기에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리상의 발견이 있고 끔직한 세계대전이 있으며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있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서구문명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사촌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대체한 역사는 지금의 역사보다는 좀더 불교적인 이상에 가깝다. 비인간적인 불평등은 지금보다 덜한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가 역사를 여자의 생리와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이책에서 윤회를 직접 몸으로 겪는 주인공들에게 한번 한번의 윤회는  깨달음으로 가는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매번 그들이 태어나는 세상은 역시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를 조리있게 만들려 하지만 매번 세상의 부조리에 깨져 나가면서 다시 윤회를 할 뿐이다. 그리고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라 저자 자주 인용하는 반야심경의 글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피안으로 우리 함께 가자 피안으로 영원하라 깨달음이여)'를 말하며 조금씩 이상을 향해 전진한다. 저자가 그리는 수백년의 역사란 큰 그림에서 인류는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의 경지로 가까워져간다. 물론 깨달음의 여정은 저자가 인용한 손오공의 말처럼 무한의 여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젠가는 인류의 역사가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면서 이책을 끝낸다.

평가

이상이 장대한 이책의 드라마를 플롯의 구조를 그리면서 요약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가 멋있다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읽을만하지는 않다. 그러면 이책은 읽을만한가? 재미있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읽을만했고 재미있었다.

1500페이지에 가까운 이책을 읽으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저자가 그리는 과거 중국과 이슬람의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그 사람들의 삶의 배경을 그리는 저자의 솜씨와 박식함에 놀랐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이해와 과거 이슬람과 중국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식들에 놀랐다. 그리고 저자가 이책 여기저기에 흩어놓고 있는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전체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불교의 이미지도 신선했다.

물론 이책은 원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겐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지적 상상력을 즐길줄 아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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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소금의 시대 1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 열림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대체역사소설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책을 구입하고 첫권의 첫 페이지를 보았을 때의 인상은 놀라움이었다. 서유기의 인용으로 시작되는 첫 페이지는 이렇다

삼장법사:
오공아, 부처님이 계신 서역까지는 얼마나 먼 게냐?

오공:
젊어서 길을 떠나 늙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젊음이 돌아올 때까지 걸어야 하며
이런 순환을 천번 거친 뒤에도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기가
어려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은 의지로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닫고
생각의 가지 하나하나가 기억 속 근원으로 돌아가면
그때 비로소 영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대해 이보다 더 시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솔직히 내가 아는 서유기는 어릴 적 아동용 만화 이상이 아닌 이상한 괴물이 나오고 모험이 있는 애들을 위한 이야기책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애들 이야기로 알던 책에 불교교리의 정수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읽고 이해한 다음 인용하는 '미국인' 저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인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책의 주제로 삼아 표현하는 저자의 능력이었다.

이책은  같이 시간을 떠도는 3사람이 10번 윤회하면서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윤회는 깨달음을 위한 구도의 여정이다. 그리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그 윤회는 나 혼자만 시간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지배를 받는다. 이책에선 하나로 묶인 3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윤회는 나 하나 또는 몇명의 도반이 같이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떠도는 것이 생각하는 것같다. 대승불교의 보살론이 말하듯이 깨달음은 해탈은 나 하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같이 깨닫는 것이다. 저자는 대승불교의  보살론을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깨달음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깨달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같다.

"신은 없다. 우주 자체가 신성하고 인간이 신성하고 모든 간각 있는 존재는 다 신성하며 힘써서 깨우칠 수 잇으므로 모두 일상생활과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 날마다의 행동으로써 감사하고 숭배해야 한다. 그야말로 가장 겸손한 종교예요, 사실 종교도 아니죠. 더 나은 삶의 방식일 뿐."

그렇기에 불교교리가 실현된 세상은 전쟁이 없고 불평등이 없으며 정의가 실현된 곳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인류의 역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역사는 여자들의 생기주기 같았죠. 삶의 일상적인 재료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의 작은 알, 그리고 아주 작은 야만인 군단이 쳐들어오고 찾으려고 애쓰고 실패하고 서로 싸우고 마침내 피투성이 찌꺼기가 그 가능성을 끝내면 모든 게 전부 다시 시작되는 거죠."

저자가 보기에 지금의 세계를 만든 서구문명은 그런 깨달음과는 반대에 있다. 서구문명의 기초를 만든 지리상의 발견은 신세계 원주민의 파멸이란 대가로 했고 경쟁을 최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며 지구를 파괴하면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서구문명이 존재하지 않앗다는 가정하에 역사를 다시 쓴다.

이책의 시작은 중세에 실크로드를 따라 페스트가 퍼져 팍스 몽골리아가 붕괴된 시점부터이다. 단 페스트로 유럽의 인구가 1/3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 멸종했다는 가정에서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재구성한 역사는 지금까지의 역사와 큰 줄기에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리상의 발견이 있고 끔직한 세계대전이 있으며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있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서구문명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사촌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대체한 역사는 지금의 역사보다는 좀더 불교적인 이상에 가깝다. 비인간적인 불평등은 지금보다 덜한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가 역사를 여자의 생리와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이책에서 윤회를 직접 몸으로 겪는 주인공들에게 한번 한번의 윤회는  깨달음으로 가는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매번 그들이 태어나는 세상은 역시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를 조리있게 만들려 하지만 매번 세상의 부조리에 깨져 나가면서 다시 윤회를 할 뿐이다. 그리고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라 저자 자주 인용하는 반야심경의 글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피안으로 우리 함께 가자 피안으로 영원하라 깨달음이여)'를 말하며 조금씩 이상을 향해 전진한다. 저자가 그리는 수백년의 역사란 큰 그림에서 인류는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의 경지로 가까워져간다. 물론 깨달음의 여정은 저자가 인용한 손오공의 말처럼 무한의 여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젠가는 인류의 역사가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면서 이책을 끝낸다.

평가

이상이 장대한 이책의 드라마를 플롯의 구조를 그리면서 요약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가 멋있다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읽을만하지는 않다. 그러면 이책은 읽을만한가? 재미있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읽을만했고 재미있었다.

1500페이지에 가까운 이책을 읽으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저자가 그리는 과거 중국과 이슬람의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그 사람들의 삶의 배경을 그리는 저자의 솜씨와 박식함에 놀랐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이해와 과거 이슬람과 중국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식들에 놀랐다. 그리고 저자가 이책 여기저기에 흩어놓고 있는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전체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불교의 이미지도 신선했다.

물론 이책은 원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겐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지적 상상력을 즐길줄 아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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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3 - 세상의 끝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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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전기의 마지막 권이다. 마지막권인 이책에선 당연히 페르시아 왕조의 완전한 정복부터 알렉산더의 요절까지가 다뤄진다.

마지막 권에 대한 서평이 되는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보다 3권전체에 대한 평을 하는 것이 적절할 것같다. 한마디도 이 전기에 대한 평을 하자면 맥아리가 없다 이다.

알렉산더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그는 성격적으로 매우 다채로운 인물이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군대만 잘 요리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다루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애증이 뒤석인 복잡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책에선 이러한 알렉산더의 복잡성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이 그리는 알렉산더란 인물은 평면적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자면 이책에는 전혀 언급이 없지만 알렉산더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업적이 아버지가 이룬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는 말을 증오했다. 알렉산더의 업적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업적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이런 태도와 여러가지 정황때문에 아버지 필리포스의 암살의 배후가 알렉산더라는 설도 무수히 제기되었지만 이책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예를 더 들자면 알렉산더는 과대망상적인 심리가 강했다. 남의 인정을 갈구했고 세계를 모두 정복하겠다는 몽상가였다. 병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심리였다. 그러나 이책에서 알렉산더의 그런 병적 심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동성애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랐을 때 테베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은 다분히 그의 모략이엇다고 볼 정황이 크다. 우선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스스로 퍼트렸을 가능성이 크다. 마케도니아가 사분오열될 것으로 본 테베나 다른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킨 것이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자 일벌백계로 쓸어버렸다. 잔인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시들의 고분고분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책에선 착한 이상주의자로서만 알렉산더를 미화한다.

이렇게 몇가지만 보더라도 이책이 알렉산더를 미화하는데만 몰두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이책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당시 그리스의 정세는 어느 정도 묘사가 되고 있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은 전혀 언급이 되고 잇지 않다. 게다가 왜 그리스계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반항했는가하는 역사적 맥락도 무시되어 있고 필리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 도시들간의 쟁투도 생략된다. 이책의 시간대는 오직 필리포스와 알렉산더로 땡이다.

결론적으로 이책은 알렉산더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의 시대를 이해할 수도 없는 분량만 많은 책이 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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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2 - 아몬의 해변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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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짜리 알렉산더 전기의 2권이다. 2권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러 가는 행군로를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행군로의 처음 오늘날 이스탄불이 된 지역의 터키쪽 도시에 상륙한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에는 트로이가 있던 곳으로 생각되던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시작된 알렉산더의 진군은 터키 해변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따라 진행되어 시리아 지역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를 격퇴시키고 이집트를 점령하는 것으로 2권은 끝난다.

2권에서 그려지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관대한 정복자의 모습이다. 당시 전쟁은 승자의 약탈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승자는 정복한 곳의 재물과 여자를 약탈하고 사람을 노예로 잡아 팔았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제국이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때 그랬던 것처럼 관대하게 세금만 받는다. 실제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가 진격할 때 도시들로 무혈입성했던 것처럼 영토를 확장했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관대한 영웅으로 보여주고 싶어했고 자신을 그리스의 대표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계 도시를 약탈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페르시아란 야만인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정복자로 나서게 한 것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으며 모험을 꿈꾸었던 소년의 꿈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를 움직였던 동기는 영토나 재물이 아니라 영웅주의적인 이상이었고 그렇기에 그를 움직인 것은 명예였다.

이상이 2권에서 그려진느 알렉산더의 내면이다. 한 인간으로서 알렉산더를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행군로를 따라 그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를 않다. 물론 전술적인 고려들을 알렉산더의 작전회의를 보여주면서 알려주고 있지만 당시 마케도니아군의 팔랑크스가 왜 무적이었는지 10배의 페르시아군대를 어떻게 무찌를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 잇지 않다. 그리고 왜 그렇게 도시들이 쉽게 항복햇는지를 잘 설명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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