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소금의 시대 1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 열림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대체역사소설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책을 구입하고 첫권의 첫 페이지를 보았을 때의 인상은 놀라움이었다. 서유기의 인용으로 시작되는 첫 페이지는 이렇다

삼장법사:
오공아, 부처님이 계신 서역까지는 얼마나 먼 게냐?

오공:
젊어서 길을 떠나 늙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젊음이 돌아올 때까지 걸어야 하며
이런 순환을 천번 거친 뒤에도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기가
어려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은 의지로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닫고
생각의 가지 하나하나가 기억 속 근원으로 돌아가면
그때 비로소 영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대해 이보다 더 시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솔직히 내가 아는 서유기는 어릴 적 아동용 만화 이상이 아닌 이상한 괴물이 나오고 모험이 있는 애들을 위한 이야기책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애들 이야기로 알던 책에 불교교리의 정수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읽고 이해한 다음 인용하는 '미국인' 저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인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책의 주제로 삼아 표현하는 저자의 능력이었다.

이책은  같이 시간을 떠도는 3사람이 10번 윤회하면서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윤회는 깨달음을 위한 구도의 여정이다. 그리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그 윤회는 나 혼자만 시간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지배를 받는다. 이책에선 하나로 묶인 3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윤회는 나 하나 또는 몇명의 도반이 같이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떠도는 것이 생각하는 것같다. 대승불교의 보살론이 말하듯이 깨달음은 해탈은 나 하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같이 깨닫는 것이다. 저자는 대승불교의  보살론을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깨달음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깨달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같다.

"신은 없다. 우주 자체가 신성하고 인간이 신성하고 모든 간각 있는 존재는 다 신성하며 힘써서 깨우칠 수 잇으므로 모두 일상생활과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 날마다의 행동으로써 감사하고 숭배해야 한다. 그야말로 가장 겸손한 종교예요, 사실 종교도 아니죠. 더 나은 삶의 방식일 뿐."

그렇기에 불교교리가 실현된 세상은 전쟁이 없고 불평등이 없으며 정의가 실현된 곳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인류의 역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역사는 여자들의 생기주기 같았죠. 삶의 일상적인 재료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의 작은 알, 그리고 아주 작은 야만인 군단이 쳐들어오고 찾으려고 애쓰고 실패하고 서로 싸우고 마침내 피투성이 찌꺼기가 그 가능성을 끝내면 모든 게 전부 다시 시작되는 거죠."

저자가 보기에 지금의 세계를 만든 서구문명은 그런 깨달음과는 반대에 있다. 서구문명의 기초를 만든 지리상의 발견은 신세계 원주민의 파멸이란 대가로 했고 경쟁을 최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며 지구를 파괴하면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서구문명이 존재하지 않앗다는 가정하에 역사를 다시 쓴다.

이책의 시작은 중세에 실크로드를 따라 페스트가 퍼져 팍스 몽골리아가 붕괴된 시점부터이다. 단 페스트로 유럽의 인구가 1/3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 멸종했다는 가정에서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재구성한 역사는 지금까지의 역사와 큰 줄기에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리상의 발견이 있고 끔직한 세계대전이 있으며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있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서구문명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사촌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대체한 역사는 지금의 역사보다는 좀더 불교적인 이상에 가깝다. 비인간적인 불평등은 지금보다 덜한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가 역사를 여자의 생리와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이책에서 윤회를 직접 몸으로 겪는 주인공들에게 한번 한번의 윤회는  깨달음으로 가는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매번 그들이 태어나는 세상은 역시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를 조리있게 만들려 하지만 매번 세상의 부조리에 깨져 나가면서 다시 윤회를 할 뿐이다. 그리고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라 저자 자주 인용하는 반야심경의 글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피안으로 우리 함께 가자 피안으로 영원하라 깨달음이여)'를 말하며 조금씩 이상을 향해 전진한다. 저자가 그리는 수백년의 역사란 큰 그림에서 인류는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의 경지로 가까워져간다. 물론 깨달음의 여정은 저자가 인용한 손오공의 말처럼 무한의 여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젠가는 인류의 역사가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면서 이책을 끝낸다.

평가

이상이 장대한 이책의 드라마를 플롯의 구조를 그리면서 요약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가 멋있다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읽을만하지는 않다. 그러면 이책은 읽을만한가? 재미있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읽을만했고 재미있었다.

1500페이지에 가까운 이책을 읽으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저자가 그리는 과거 중국과 이슬람의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그 사람들의 삶의 배경을 그리는 저자의 솜씨와 박식함에 놀랐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이해와 과거 이슬람과 중국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지식들에 놀랐다. 그리고 저자가 이책 여기저기에 흩어놓고 있는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전체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불교의 이미지도 신선했다.

물론 이책은 원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겐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지적 상상력을 즐길줄 아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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