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평전 - 근대인의 세상을 종식시키고 양자도약의 시대를 연 천재 물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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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시민단체의 안보리서한 발송이 문제가 되고 있다.  

천안함사건과 관련하여 밝혀지지 않은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조사단을 구성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인 것 같다.  여기까진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법하다. 하도 이런 저런 말도 많은 사안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평화가 걸린 문제이니 필사적이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는 이 시민단체의 행위가, 평화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언론과 우리 사회 일부의 대응이었다. 

국격과 국익이란 단어가 쉴새없이 오르락거린다. 국가 망신이다라는 말도 서슴하지 않는다.  

마침 이때 나는 막스 플랑크 평전과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었다.  

둘다 독일인이다. 이들은 모두 두고두고 독일사회의 컴플렉스가 된 나치의 광기와 나치시대 독일사회를 목도한 사람들이다. 

막스 플랑크는 양자시대를 연 현대 물리학의 시작이자 고전물리학의 마지막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평전류의 고리타분함을 예상하였지만, 책 소개란에 플랑크가 살았던 당시의 물리학 발전 정도며 세계적 현황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주저없이 샀다. 

평전이 줄 것이라 예상하였던 고리타분함과 어쩐지 한쪽으로 쏠림에 틀림없을 평가는, 그래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기며 단념하기로 하였다. 해서 그가 세개의 전쟁을 겪었고, 불행한 가족사를 가진 불운한 인물이었으나 정직하고 성실했던 학자였다는 주장에 오히려 감동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시큰둥하였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는 아련함은 무어지? 큰 아들이 베르덩 전쟁에서 전사하고, 두 딸이 출산하다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세번째 아들 에어빈이 히틀러 암살과 연관되어 총살당한 사실을 어떻게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한인간에게 벌어질 수 있는 비극은 그 총량이 얼마나 되어야 임계점에 도달하는 걸까? 

그는 아흔 여덟까지 살았다.  그 삶의 중심에는 늘 물리학이 있었다. 그는 이론가로서뿐 아니라 유능한 행정가로서, 다정한 스승으로서, 천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지닌 선각자로써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드높이 산 사람이었다. 나는 이 독일국민의 우수성에 따옴표를 한다. 그렇다. 내가 이 평전을 한 물리학자의 생애와 그가 기여한 업적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 점에서다. 

공교롭게도 나는 전쟁을 다룬 또 하나의 소설을 읽었다. 내가 개선문을 통해 경도된 레마르크의 소설이다. 엠비씨 주말의 영화에서 동명의 영화도 보았다.중학교 때 보았으니, 와우 십년도 더 넘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남아있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주인공이 끝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한 행위로 풀이 하였다.  인간성....인간성....그건 무엇인가.....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성의 경계는 어디인가...마치 정지장면처럼 그 마지막 장면은, 이제 해설까지 곁들여, 나의 기억속에 붙박히고 말았다. 

역자의 후기에 이런 대목도 있다. 원래 망명객이었던 레마르크가 영어로 먼저 책을 냈는데, 십 년인가가 흐르고 나서 독일사회에서 출간되었다. 헌데 출판사가 자기검열을 하여, 몇군데를 삭제하거나 수정하여 펴냈단다. 독일시민사회가 마비되어 올바른 이성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을 녹여낸 장면들과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독일인을 주인공이 사살하던 장면을 정당방위로 슬쩍 고쳤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원래의 작품이긴 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전쟁소설은, 지루하다. 사람이 죽어가고 이념이 있고, 국가가 있고, 삶과 죽음이 있다. 오래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쩐지 구닥다리 같다. 전쟁의 기억이 너무 멀어서라기보다 평화를 실감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평화를 너무도 자연스런 원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상태, 원래 그러한 상태..애쓰지 않아도 누리고 있는 그 무엇... 하지만 지금 우리는 평화로운가?

 막스 플랑크가 독일 시민사회가 이성을 잃고 히틀러에 경도되었을 때, 그가 학문을 지키기 위해서 하였던 행위는, 과연 충분하였는가? 그는 인종주의에 저항하였는가? 아인쉬타인이 매도당할 때, 그는 적절히 방어해 주었던가? 

그는 일개 물리학자가 아니라, 독일의 자존심이었고, 독일 엘리트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히틀러와 독대까지 하였던 당대의 영웅이었던 그는 과연 충분히 히틀러에 저항했고, 미쳐가던 독일사회에 이성을 되돌리기 위해 무엇을 하였던가? 

솔직히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도 아니하기도 힘들다.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그의 둘째 아들은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어 총살당했으니...   그가 상아탑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아직 존재가 밝혀지지도 않은 원자 세계에 몰두해 있었다고 하여도(실제로 그렇지 않았기도 하다).  시대를 비껴가는 개인은 없는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업적은 절망의 행위"였던가?

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가가 국익을 이유로, 국가가 제시한 것에는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말라고 하는 이 때,    

국가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펼 때, 매국노라고 칭하는 이 때,   

나는 오래 전 본 영화-영광의 탈출, 주인공은 커크 더글라스. EBS의 세계의 명화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보았다-의 주인공이 한 말이 생각난다. 

"애국심은 깡패들이 기대는 마지막 피난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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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꾸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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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소나티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면서 열역학 제2법칙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며 교양의 양극화를 우려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 자신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 보았다. 나는 세익스피어의 소나티네도 잘 모르거니와 열역할 제1법칙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라면 잘 못할 것 같다. 둘다 서양에서 이입된 이론이기는 하다.

이건 교양의 양극화가 아니라, 교양의 절대부족이라고 해야 되지 않나 싶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교양의 절대 부족 내지는 교양의 절대 양극화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에 최재천 교수나 도정일 교수 같은 분이 학문의 하이브리드 시대니 통섭이니 하는 시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나만 해도 인문계를 지원하고 나서는 물리나 수학의 또 다른 분야는 문닫고 살았으니 말이다. 

어느날 문득 내 생애의 어느 순간이든 이토록 매력적인 분야를 지나치지 않고 인지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역시 책이었지 않나 싶다. 그 책은 무엇이었을까? 기억하기가 솔직히 쉽지는 않다....최초의 인간이 누구인지 의견과 이론이 분분하듯, 내 최초의 책은 무엇이었을까....우리의 기억은 늘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기억은 완벽하게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허나 나의 편향을 부채질했던 책들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그동안 읽었던 사랑스러운 책들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런 기억들은, 행복하다. 어디에선가 행복은 죽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던 것 같다. 막스 플랑큰가? 모순적인 말 같지만, 이해가 되는 말이다.최근 좀더 알고 싶은 것은, 막스 플랑크의 양자도약,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파울리의 배타원리 그리고 리만의 가설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 따위다. 무엇보다 테드 창이 후속작을 썼는지 썼다면 언제 번역되어 나올까도 궁금하다.  

5월, 파란 많았던 한 계절이 오늘로서 끝이다. 오늘의 경계와 내일의 경계가 오로지 시계바늘이거나 시계침 하나인 세계에서 5월은 고단한 무대를 접고 퇴장하려 한다. 

나는, 5월이 힘이 들었다. 좌절과 환멸과 추억이 정신을 온통 흐트러지게 한 이 계절에, 꿈을 꾸었다. 꿈조차 꾸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했던 누군가의 말도 생각난다.  시간은 주단위로 빠르게 흘렀지만, 내 마음 속의 시간은 어느 순간 멈춘 듯하다. 차악의 선택-자살이라고? 그런 책 제목이 눈에 띄었으나, 펼쳐 보진 않았다. 나는 아침이면 눈을 억지로 뜨고 정해진 일과에 맞추어 버스를 타고 체육관에 가거나 출근을 하였다. 출근하여 기계적으로 맡겨진 일을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렸다. 

나의 감각은 내 몸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나는 내가 이 계절 한 동안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조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란 말인가? 

그런 초조감이 존재를 압도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물리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날로그적인 감각과 디지털적이 그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앨리스라면, 나는 도대체 나자신에게 무엇을 물어볼 수 있을까? 이 삶은 도대체 삶인가? 

마이크로적인 삶과 매크로적인 삶이 동시적으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곳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에어빈 슈뢰딩거의 전기라거나 그의 물리학 방정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막스 플랑크의 전기와 함께 배달된 이 책은, 아쉽게도 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과학 교양 입문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기대하기는 적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은유하는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결정적 차이에 대한 교양서라든가, 대중적이되 가볍지 않은 물리학 이론서이기를 기대했다. 물론 이 책에서 언급한 다양한 이론적 배경과 쟁점은 여전히 흥미롭긴 했다. 과학사에서 중요하거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들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그렇다, 물리학 역시 음악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영감을 주고, 아름다움도 주며, 존재에 대한 깊이를 더해 준다.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더 낫다라는 비교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면,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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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9-06-01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년 전 나는, 적어도 애는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과 달리 구멍이 나진 않았지..내 삶의 일부가...어쩌면 뼈대...틀..이었던 ..
 

우연이다. 

몇 일째 계속 화다스리는 법이란 제목으로 메일이 온다. 한국건강연대라는 곳에서 보내는 이메일이다. 화를 참지 못하는 성미라는 것을 특히 요즘, 화날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듯. 마치 지금 나는당신의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꼼짝말고 우리의 프로그램에 참가하십시오, 하는 듯하다. 

 점심때도 그런 말을 하였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허니 지금부터 화다스리는 법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 놓으란다. 그럴 듯하다. 나 역시 감정이 너무 과잉한 상태라. 아마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실망하고 실망하리라. 어느 신문칼럼에서 읽은 듯하다. 오로지 자신의 비판능력만을 믿으라는. 

자신의 비판능력이라......천암함사건도 그렇고 도무지 모든 것이, 이성의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끔 정의는 있는 건가. 진실이란 어디에 있는 건가. 정말 사필귀정이란, 신기루일 뿐인가 하는. 아니 이런 생각은 자주 든다.... 

이런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이며 나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한 슈뢰딩거의 방정식으로도 유명하고, 무엇보다 양자세계가 확률에 따라 움직인다는 새시대의 물리학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껴 거부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한 하이젠베르크에 반감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경멸했던 인물이다. 해서 사고실험을 통해 그것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여기서 나온다. 방사능물질이 흘러나오게 장치해 둔 상자속에 고양이를 함께 둔다. 실험자가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죽었을 수도 살았을 수도 있다. 관찰자가 문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에야만 그 상태가 확정된다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는 고양이는 죽었을 수도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가 어떻게 반 죽고 , 반 살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허나 양자세계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행해지는 세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 양자의 존재를 우리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사실 고양이가 죽었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든 말든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관찰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나.? 

암튼 잘 모르겠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도 실은, 원자가 어떤 상태변화를 겪더라도 그 원자이게 하는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실은 잘 모르겠다. 하나의 전위에는 꼭 하나의 전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인데....음...좀 어렵다... 

하지만 이런 물리학의 이론들을 읽고 생각해 보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보고 이해하는 재미랄까? 그건 또 묘한 즐거움을 준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주의 별빛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서 생명의 아주 미세한 근원이 있다는 것, 그런 사실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 못지않는 즐거움을 준다.....이런 것을 지적 즐거움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은 정신이 없어 사둔 책들이 쌓여 간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다 집어쳤다. 생각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만, 조지 오웰이 왜 그런 생활을 한 것인지, 감정이입을 하고 싶다. 나는 솔직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또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파리의 우아한 동경, 그러나 실은 어느 곳이든 밑바닥 삶이 있는 법인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먼 이국의 도시는, 그런 현실을 사장한채, 보고 싶은 면만 윤색한 도시일 뿐이다.  

허긴 여행이란, 동경이고 동경이란 낭만이 아닐까? 이 곳의 삶이 고달프면 더욱, 저 곳의 삶은 멋지리라는 기대, 아니 멋져야 한다는 바람. 

우리 동네를 돌면서, 새삼 우리 동네가 생각만큼 후지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살랑이는 나무들이 맑은 공기가, 어라 여기도 이런 게 있었네 하는 새삼스런, 발견이라고나 할까.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레마르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책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샀다. 

언제 읽을 지 모르지만, 그 책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마고였나? 개선문의 그 여자는 마두 였던가(조앵 마두였나보다, 남자는 라비크였던 것 같다)....어찌 되었을까...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네...이런....다시 읽어 보아야 겠다..아니다 그 책을 언니네 집에 두고 온 기억이 난다. 오페라의 유령도 함께 두고 왔지..그 5월의 어느날, 오스트리아는 눈부시고 환했지. 

언니네 아들은 어렸고, 귀여웠지, 사랑스러웠지.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꼬마를 본 적이 없었지. 

그 꼬마는 이제 다 자라, 어른이 다되었지. 그 때 좀더 사랑해 주었어야 하는데. 

왜이리 후회가 되는지. 사랑할때 옴팡 사랑해 주어야 하는데, 더욱 아끼고 귀여워 해 주었어야 하는데, 

비엔나의 조용한 점심때, 전차와 트람바이, 바나나, 카페들. 다시 언니와 그 카페에 가고 싶다.언니와 마주앉아 거품이 풍성한 달콤한 라떼커피를 마시고 싶다. 

언니...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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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5-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으로부터 10년전 나는 지금보다는 긴글을 쓸 여유가 있었구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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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늘 사소했다. 병원에서 정기검진 안내서가 왔고 순종적인 나는 순순히 검진을 하였다. 그런데 결과가 이상했나보다. 의사는 재검을 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혼을 조금씩 파먹었다. 재검결과 조직검사를 하였고 바이러스 검사까지 했다. 

10일 정도 뒤에 결과를 보러 오란다. 그 기다리는 10일 동안 나의 불안은 최대치를 경신하였다. 처음엔 우리 부모와 형제들은 그럭저럭 건강한 세포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왜 나만, 나만 이런걸까 하는 말도 안되는 분노도 치솟았던 것 같다.  

열흘 뒤 결과는, 대학병원에 가서 이상조직들을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 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암이구나...아 암이라니...수술이라니...그러고 보니 가슴께도 당기는 듯했다. 대학병원은 늘 돗데기 시장처럼 북적거린다. 예약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면서,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많은 불편한 사람들, 환자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수술은 무슨, 그냥 지켜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상한 세포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불안은 더이상 내 머리속을 떠다니지 않는다. 이제 불안보다 더 밀도감 있는 공포가 그리고 더 나아가 약간의 체념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또는 혼잣말로 기도했다. 암만 아니라면 열심히 살게요. 지금까지처럼 자살을 동경하거나 하지 않겠다고. 그날 2010년의 소원을 다시 썼다, 이전 것을 쫙쫙 찢어버리고. 

그 힘없고 맥없던 나날들 사이사이 나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위건부두가 어딘지도 모른채.  

한 자의식 강하고 진실한 사회주의자가,노동자의 적나라한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이었다.사실 르뽀르따쥐는 처음이다. 이런 류의 책을 그닥 쉽게 손에 잡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는 몽상가인 모양이다. 도무지 너무 현실적이거나 사실적인 것들은, 불편하게 생각되니 말이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하다면, 그건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작가의 진심때문일 것이다.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이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지 자각한 인간이며, 위선을 떨며 자신의 존재 이상을 넘겨다보는 척하지 않는다. 

로렌스에 대해 언급한 구절도 눈에 띈다. 로렌스는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는 출신으로 보자면 노동자계급인 셈이지만, 문필가로서 계급이동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건부두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휴식에의 은유다. 우리 모두는 노동한 후에 합당한 여가와 누림이 따라야 하는데, 세상은 그런가?   자신의 건강을 챙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과연 세상은 그런가? 병원복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도, 실은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다.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에 들 수 없고, 의료보험이 없으니 아파도 병원은 턱도 없다. 예방? 웃기는 소리다. 예방은 커녕 지금 든 병에도 돈 없어 꾹 참아야 하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병을 더욱 키우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못난 탓인가? 그들이 가난하고 게을러서인가?  

문득 왜 우리 모두 부르조아가 되면 안되는 거지? 그건 시장의 논리때문인가? 시장은 모두가 부르조아가 될 수 없기 때문일테지.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일테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표방하는 대의는 현실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왜인가? 대의가 선하기 때문에 그것을 좆는 사람세포들이 선할 것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은 대중들과 고립적이다. 관습에 젖어 있고 관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의 분리가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외면당한다. 

조지 오웰은 이 글을 쓴 후 작품세계의 전환을 맞이한다고 한다. 내게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를 꾀했던 사람,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했고 자의식 강한 사람, 무엇보다 인간세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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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왈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박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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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음악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그러나 어느날 음악이 소음이 되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도처에 넘쳐나는 음악, 길거리 어딜 가나 들리는 음악, 버스를 타도 원하지 않는 장르의 음악이 귀를 찌르고 있다. 심지어 지하철에서조차 옆사람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원하지 않는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지금은 음악의 포화상태다. 가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요의 상태에 있고 싶다. 무엇이든 과잉하면, 물리게 마련인듯. 그러나 매번 다시 음악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음악은, 이렇듯 물리다가도 다시 찾게 되고, 나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 있을 몇 안되는 존재 중 하나다.

나는 대개 슬플 때 음악을 듣는다. 슬픈 음악, 비장미가 느껴지는 그러나 청승스럽지 않은 음악이 좋다. 이때 음악이란 무엇일까? 정서의 폭발을 대리해 주는 무엇일까? 치유의 어떤 힘일까?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를 먼저 읽었다.  

호모무지쿠스가 음악이 인류의 진화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음악은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 음악이 우리 뇌에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대한 책이다. 

음악이 청각의 치즈케이크가 아니라 진화적 선택압에 의해 진화한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진화에 부수적으로 얻었다는 스티브 핑거의 주장과 반대로 음악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언어보다 더 먼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 놓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조건들, 섹스가 좋은 것은 섹스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우리 조상들 중  섹스가 즐거운 누군가 유전자 복제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한 음식에 구토를 느끼는 것 역시 상한 음식 자체가 역한 게 아니라 그것을 역하게 느끼는 조상 유전자가 복제에 성공했고 우리가 그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수백 수만종의 종들의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유리하지 않은 것들은 선택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인지과학의 관심사가 그러하듯 대니얼 레비틴은 뇌의 어느 부위가 음악에 관계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우리 뇌가 어떤식으로 음악을 인지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그에 따르면 뇌의 특정부위만이 음악이나 언어와 같은 특정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대상과 교류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라 우뇌와 좌뇌가 특히 더 관련되는 작용도 있다. 그렇기는 하나 도식적으로 우뇌는 감성적인 활동, 좌뇌는 이성적인 활동과 관련한다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악 역시 뇌의 특정한 부위만 관련하는게 아니라 소뇌에서부터 전두엽, 브로카영역 등 다양한 부위들이 상호 작용한다는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넘쳐나는 음악에 신물이 날 법도 하지만 어느 순간 또 라디오 앞에서 오디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누워 있거나 천정을 보는 행위는 자주 음악과 함께 진행된다. 내 어느 순간에 뉴런이 발화하여 음악에 감응할지는 사실 엄마의 뱃속에서, 열 한두살의 나이에 이미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기억은 매개가 얼마나 특징적이냐에 따라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 기억들이 모두 저장되지만 매개물의 특성에 따라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읽은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도 뜻밖의 기쁨을 주었던 책이다. 이 책 역시 음악의 기원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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