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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은 늘 사소했다. 병원에서 정기검진 안내서가 왔고 순종적인 나는 순순히 검진을 하였다. 그런데 결과가 이상했나보다. 의사는 재검을 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혼을 조금씩 파먹었다. 재검결과 조직검사를 하였고 바이러스 검사까지 했다.
10일 정도 뒤에 결과를 보러 오란다. 그 기다리는 10일 동안 나의 불안은 최대치를 경신하였다. 처음엔 우리 부모와 형제들은 그럭저럭 건강한 세포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왜 나만, 나만 이런걸까 하는 말도 안되는 분노도 치솟았던 것 같다.
열흘 뒤 결과는, 대학병원에 가서 이상조직들을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 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암이구나...아 암이라니...수술이라니...그러고 보니 가슴께도 당기는 듯했다. 대학병원은 늘 돗데기 시장처럼 북적거린다. 예약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면서,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많은 불편한 사람들, 환자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수술은 무슨, 그냥 지켜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상한 세포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불안은 더이상 내 머리속을 떠다니지 않는다. 이제 불안보다 더 밀도감 있는 공포가 그리고 더 나아가 약간의 체념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또는 혼잣말로 기도했다. 암만 아니라면 열심히 살게요. 지금까지처럼 자살을 동경하거나 하지 않겠다고. 그날 2010년의 소원을 다시 썼다, 이전 것을 쫙쫙 찢어버리고.
그 힘없고 맥없던 나날들 사이사이 나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위건부두가 어딘지도 모른채.
한 자의식 강하고 진실한 사회주의자가,노동자의 적나라한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이었다.사실 르뽀르따쥐는 처음이다. 이런 류의 책을 그닥 쉽게 손에 잡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는 몽상가인 모양이다. 도무지 너무 현실적이거나 사실적인 것들은, 불편하게 생각되니 말이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하다면, 그건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작가의 진심때문일 것이다.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이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지 자각한 인간이며, 위선을 떨며 자신의 존재 이상을 넘겨다보는 척하지 않는다.
로렌스에 대해 언급한 구절도 눈에 띈다. 로렌스는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는 출신으로 보자면 노동자계급인 셈이지만, 문필가로서 계급이동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건부두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휴식에의 은유다. 우리 모두는 노동한 후에 합당한 여가와 누림이 따라야 하는데, 세상은 그런가? 자신의 건강을 챙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과연 세상은 그런가? 병원복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도, 실은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다.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에 들 수 없고, 의료보험이 없으니 아파도 병원은 턱도 없다. 예방? 웃기는 소리다. 예방은 커녕 지금 든 병에도 돈 없어 꾹 참아야 하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병을 더욱 키우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못난 탓인가? 그들이 가난하고 게을러서인가?
문득 왜 우리 모두 부르조아가 되면 안되는 거지? 그건 시장의 논리때문인가? 시장은 모두가 부르조아가 될 수 없기 때문일테지.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일테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표방하는 대의는 현실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왜인가? 대의가 선하기 때문에 그것을 좆는 사람세포들이 선할 것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은 대중들과 고립적이다. 관습에 젖어 있고 관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의 분리가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외면당한다.
조지 오웰은 이 글을 쓴 후 작품세계의 전환을 맞이한다고 한다. 내게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를 꾀했던 사람,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했고 자의식 강한 사람, 무엇보다 인간세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