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왈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박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더 많은 음악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그러나 어느날 음악이 소음이 되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도처에 넘쳐나는 음악, 길거리 어딜 가나 들리는 음악, 버스를 타도 원하지 않는 장르의 음악이 귀를 찌르고 있다. 심지어 지하철에서조차 옆사람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원하지 않는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지금은 음악의 포화상태다. 가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요의 상태에 있고 싶다. 무엇이든 과잉하면, 물리게 마련인듯. 그러나 매번 다시 음악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음악은, 이렇듯 물리다가도 다시 찾게 되고, 나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 있을 몇 안되는 존재 중 하나다.

나는 대개 슬플 때 음악을 듣는다. 슬픈 음악, 비장미가 느껴지는 그러나 청승스럽지 않은 음악이 좋다. 이때 음악이란 무엇일까? 정서의 폭발을 대리해 주는 무엇일까? 치유의 어떤 힘일까?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를 먼저 읽었다.  

호모무지쿠스가 음악이 인류의 진화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음악은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 음악이 우리 뇌에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대한 책이다. 

음악이 청각의 치즈케이크가 아니라 진화적 선택압에 의해 진화한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진화에 부수적으로 얻었다는 스티브 핑거의 주장과 반대로 음악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언어보다 더 먼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 놓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조건들, 섹스가 좋은 것은 섹스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우리 조상들 중  섹스가 즐거운 누군가 유전자 복제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한 음식에 구토를 느끼는 것 역시 상한 음식 자체가 역한 게 아니라 그것을 역하게 느끼는 조상 유전자가 복제에 성공했고 우리가 그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수백 수만종의 종들의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유리하지 않은 것들은 선택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인지과학의 관심사가 그러하듯 대니얼 레비틴은 뇌의 어느 부위가 음악에 관계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우리 뇌가 어떤식으로 음악을 인지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그에 따르면 뇌의 특정부위만이 음악이나 언어와 같은 특정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대상과 교류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라 우뇌와 좌뇌가 특히 더 관련되는 작용도 있다. 그렇기는 하나 도식적으로 우뇌는 감성적인 활동, 좌뇌는 이성적인 활동과 관련한다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악 역시 뇌의 특정한 부위만 관련하는게 아니라 소뇌에서부터 전두엽, 브로카영역 등 다양한 부위들이 상호 작용한다는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넘쳐나는 음악에 신물이 날 법도 하지만 어느 순간 또 라디오 앞에서 오디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누워 있거나 천정을 보는 행위는 자주 음악과 함께 진행된다. 내 어느 순간에 뉴런이 발화하여 음악에 감응할지는 사실 엄마의 뱃속에서, 열 한두살의 나이에 이미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기억은 매개가 얼마나 특징적이냐에 따라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 기억들이 모두 저장되지만 매개물의 특성에 따라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읽은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도 뜻밖의 기쁨을 주었던 책이다. 이 책 역시 음악의 기원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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