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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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과 출국, 이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동화와 같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행을 사랑하고 즐기게 된 이후로 여행은 패션이 되어 버렸기에 거기에 무거움의 표상으로서의 진정한 단절이 언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빅브라더의 통제 시스템없이도 인간은 매우 자연스럽게, 언제나 모든 경우에 '연락 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그 증상은 조지 오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전제주의에서 멀어질수록 놀랍게도 더욱 뚜렷해지며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허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제 '닿을 수 있는 상태, 연락 가능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항생제나 방부제처럼 우리의 (사회적)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언제나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여행은 없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주 여행을 떠나는데, 어떤 종류의 단절도 끼어들 틈이 없고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으며 그야말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일이 없다.
 

  ... 그와 같이 간혹 약속된 부유함을 포기한 젊은이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나는 비슷한 결정을 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나곤 했다. 그런 젊은이들의 경우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결정이리라.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혹을 포기했고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서 멀고 먼 '여행'에 속하는 일이었다.

 

  ... 자신의 교육을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머리 좋은 소년들에게 그는 깊은 애정을 기울였고 방과 후에 그들을 남게 해서 라틴어를 비롯한 특별 과외 수업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아무도 아이들을 상급 학교에 진학시킬 마음이 없었고 마침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리란 공포에 미리 사로잡혀 버린 학생으로부터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만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 그는 황무지에서 이상의 광채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바로 황무지에 있기 때뭉에 더욱 빛나는 그 광채, 출신과 환경에 의해 훼손당하기 이전의 인간의 마음속에 별처럼 빛나는 지성과 숭고한 정신을 발견하기 원했다. ...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배수아, <당나귀들> 25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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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고 배수아는 쓰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아마 트라텐바흐에서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의 결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참담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데없는 이상주의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굳이 시골의 무지한 이들에게 간 이유가 있다. 그도 역시 존 로크의 '백지설'을 신봉한 것일까. 아니면 당시의 학문적 풍토와 문화적 분위기에 깊이 실망한 탓일까. 

 

  무지한 이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임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든 결국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기엔 모자람이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란 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함을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식의 결정은 그가 성 안토니우스처럼 사막으로 들어가거나 할 때에만 완벽히 그 의도가 실현되는 그런 결정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이 되겠지만, 우리 삶은 낭만성(이상)과 현실성이 상보적 계열을 이루고 있는 선분이며, 그 선분 어딘가의 지점에 우리들 각자가 위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낭만성(이상)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젊은 나이에 전재산을 포기하며. 그가 누렸던 모든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포기하며. 그리고 무식쟁이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을 동반한다.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추구되는 이상이란 없다(증거: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아니 그렇게 추구될 수 있는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이상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막으로 들어가야 했다. 깊고 깊은 동굴로, 갈라진 빙하의 틈새로. 그리고 고립된 그 장소들에서 그 나름대로의 꿈을 꾸어야 했다. 

 

  젊은 낭만주의자였던 그가 했던 것은 시골의 무식쟁이들의 자식들을 현혹하여 사막으로, 동굴로, 틈새로 같이 가자고 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가진 자였던 그가 못 가진 자들의 틈으로, 학문과 문화를 누렸던 그가 학문과 문화가 없는 (그에게는 사막처럼 느껴졌을) 불모의 공간으로 '하강'하기란 쉬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시골의 무식쟁이들이 도시로, 압도적인 문명과 문화의 공간으로 끼어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압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본능적인 공포. 

 

  전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특히, 젊은이로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위대하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과시하려 한 셈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교육자 노릇을 자처한 것은 이미 한 극단으로 기울어진 선분상의 자신의 지점을 수정하여 균형감각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던 그로서는(+100)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0)만으론 균형 감각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100 이상)에 짓눌린 사람들을 찾아간다. +100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갖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무게를 체감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배신감과 참담함, 마을 사람들의 미움이 뒤따라 온다.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래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내면의 균형 감각을 찾았으니까.

 

  그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의 세상은 모두가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받고 있다. 대중 매체란 게 생겨 모두들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책도 구하기가 쉬워 언제든지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마음만 있다면! 가공할 만한 건 인터넷이다. 이제 시골로 내려갈 때, 비트겐슈타인처럼 안이한 마음으로 내려갔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일류대 진학 비법이나, 재테크 요령이라도 숙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마을 노인들 컴퓨터 교본이라도 들고 가야지, '학문의 순수성'이라든지, '이상' 같은 걸 들이대면 미움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마을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정의하자면, 취향의 시대, 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과거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취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취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속물'. 더더욱 큰, 본질적인 문제는 누구나 취향을 가지고 있고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재도 역시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라는 것이다. 다 버리고 내려갈 시골도 없다. 어디든 네트워크가 깔려있다. 벗어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영웅적인 행위를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다. 그가 한 것처럼 깨달음의 과정을 천천히 밟아 나가 균형에 도달할 여유도 가질 수 없다. 그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시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복제하며 살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은 신해철에 의해 복제된 바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지 알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모두들 '창의성'과 '독창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 '신선한' 것들이 튀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루함을 느낀다. 어느덧 '창의성'과 '독창성'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냥 안방에 앉아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클릭만 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것도 결코 진정으로 새롭지 않다. 

 

  재밌는 것은 알고 보면 누구나 거기서 거기일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다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다만 주장하기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실제로 소통에 힘겨워하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차이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다니. 

 

  취향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남과 다른 나로 규정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그게 '정보'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국 선분상의 위치인 것인가? 내 안의 '우선 순위'의 문제인 것인가? 이상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현실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진정성이 상실된 현대에, 무슨 취향을 가졌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생각은 이미 누군가 했던 생각이고, 내가 하는 행동은 이미 누군가 했던 행동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만이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깨달음인 것 같다. 이 역시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부럽다. 뭘 어쨌건, 그의 결심은, 그의 이상은, 그의 환멸은, 뒤이은 그의 깨달음은 온전히 그의 것이니까. 이런 부러움도 현대인만이 가질 수 있는 부러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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