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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윅
존 카메론 미첼 감독, 존 카메론 미첼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 무엇이, 두려운가요.
거기, 이봐요, 뭘 그리 두려워하는 거죠?
이 사람들아........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냐구.

헤드윅은 토미에게 묻는다. “what are you afraid of......?!” 두려움.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까짓 ‘도덕’이 뭐라고. 도덕적 안도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헤드윅의 질문이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반면, 토미의 질문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어요? 구세주로서?” 헤드윅은 대답한다. “아니, 하지만 나는 그의 창조물들을 사랑해.” 우문현답.

그렇다. 구원이란 허상일 뿐이다. 스위스의 ‘잔인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존 캘빈(john calvin)의 <예정설>의 논리, 즉 “구원 받을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논리는 보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 그대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man-centered society에서, 이성애 중심의 사회heterosexual-centered society에서, 구원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토미, 이미 구원받은 그의 질문은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이미 구원받은 스스로의 처지를 자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이라는 그 관념(이데올로기)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어 우리를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한, 우리는 역설적으로 구원이라는 관념의 노예가 되고 만다. 혹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들게 되고 마는 것.

하지만, 과연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우리의 구원 여부를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구원에 대한 집착, 그것은 사람들을 둘로 가를 뿐이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유색인이든 백인이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몸이 약간 불편하든 건강하든, 그런 차이들이 무슨 상관인가? 한 인간과 다른 한 인간의, 그 상호간의 진실한 관계맺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인간과 인간, 그들 서로간의 사랑,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헤드윅의 노래 <the origin of love>의 가사와 그 노래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은, 태초에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 어땠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완벽함에 위험을 느낀 신이 인간을 ‘분리’시킴으로써 어떻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원인은 신에게 있다. 그런데 그 신이란 사실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선언한다.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deny me, and be doomed!’ 위협과 억압을 가하는 신, 질투와 오만과 폭력의 화신으로서의 신, 그것은 곧 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따위에 집착하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to be saved, or not to be saved
is not a question.’

권력은 (이분법에 기초한) 분리의 논리를 만들어내어 그것에 기생하여 먹고산다. 처음에는 단순히 ‘서로 다름’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했을 그 이분법은 근대를 관통하며 도덕적 윤리적 함의를 부여받게 되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가치판단에 관한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 ‘이분법의 체계’가 제시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 혹은 ‘인간적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거대한 체계에 말없이 적응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다.
성장한다는 것이란, 사회인이 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말없이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그에 익숙해지는 것.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체계 속에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존재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런데 그런 상태를 가리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능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이분법의 논리에 따라, 인간은 남과 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억압자와 피억압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등등, 어떤 식으로든 나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바로 ‘사랑’의 슬픈 기원이 비롯된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의 통합된 완전체로서 존재하던 저 옛날 태곳적의 기억, 그래서 신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때, 사랑이란 단어조차도 모르던 그때,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을 잊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에게 헤드윅은 두렵고 불편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존재이며, 곧 이분법의 도덕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헤드윅은 하나의 벽인 동시에, 하나의 다리이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헷갈리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존재다. 그/그녀를 만진 수많은 남자들(아버지, 미군 하사관, 토미, 이츠학)의 거짓된 욕망과 속임수, 배신,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원한 사랑이 아닌, 오직 ‘영원한 노래’ 속에서 자유롭고 완벽하다.

‘wig in a box'를 부를 때의 그 신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이제 불완전하나마 수술을 통해 여성의 모습이 된 헤드윅. 화장을 하고, 갖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의 가발을 씀으로써 헤드윅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들로 변한다. 물론 그는 그러한 외관상의 변화가 단지 순간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것임을 깨닫고 있으며, 이제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려 한다. 관객과 하나 되어 함께 노래하는 헤드윅의 천진한 모습, 음악에의 열정에 들뜬 모습을 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음악, 그리고 바로 그 표정, 바로 그 태도이다. 실패한 트랜스젠더로서 앵그리 인치의 흔적을 갖고 있는 헤드윅은 불구자로, 성적 장애자로, 저널리즘의 희생자로, 사랑하는 이에게 배반당한 버림받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사회의 통념에 물든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노래를 부를 때 만큼은 헤드윅은 도도하며, 거리낌이 없으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신나게 노래한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세상, 곧 타인들은 그를 타자 취급한다. 그는 일시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성적으로 농락당하고, 음악적으로도 착취당하며 이용당한다. 순수한 열정으로 토미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함께 노래할 때, 헤드윅은 토미에게 ‘지식gnosi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은빛 십자가를 이마에 그리주며 마치 유희하듯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완벽한 교감에 이르지만, 그것 역시 찰나적일 뿐이다. 헤드윅의 신체상의 비밀을 ‘알게 된’ 토미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곧 헤드윅의 노래들을 자신의 노래로 발표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헤드윅은 토미의 공연 스케줄을 쫓아다니며, 토미가 대규모 공연장에서 공연할 때, 그 옆의 작은 클럽에서 자신의 음악을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한다. 헤드윅은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일까. 상업적 성공? 토미에 대한 집착? 배신감 때문에? 뒤틀린 고집과 오기로 가득 찬 채, 헤드윅은 짜증을 내고, 결국 남편 이츠학과 매니저, 밴드들마저 헤드윅을 떠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뒷골목을 배회하다 헤드윅은 우연히 토미와 재회한다. 헤드윅에게 사과하는 토미. 일시적인 화해. 그러나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토미와 헤드윅의 스캔들이 터지고, 덕택에 헤드윅에게도 성공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성공의 순간, 헤드윅은 ‘한탄’한다. 자신을 배반한 사람들, 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네 명의 사람들, 그 이야기를 하며 헤드윅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우리는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모습들 뒤에는 그토록 아픈 상처가 숨어있었음을 본다. 찢겨지고 피흘린 모습, 항상 조각조각 난 채 콜라주와 몽타주처럼 존재하던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며 드디어 헤드윅은 모든 것을 벗어던진다. 가발을 벗어던지고, 화장을 지우고, 토마토로 만든 가짜 가슴을 깨부순다. 기타를 들어 무대를 내리치며 상처로 얼룩진 기억들을 깨부순다.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과장된 퍼포먼스로 세상의 시선과 맞서 싸우던 헤드윅은 그 스스로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마치 아이처럼, 그렇게 벌거벗은 채 걸어가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헤드윅. 중요한 것은 세상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닐 것이다.
 

낙타처럼, 모든 아픔과 상처를 짊어지고 인내심도 강하게 묵묵히 사막을 걸어왔던 그, 또한 마치 사자처럼, 과장된 몸짓과 과장된 절규로 세상에 맞서 싸우던 그, 그런 그가 이제는 아이가 되어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것은 결코, 사자같이 맹렬했던 의지가 세상에 의해 한풀 꺾여진 것이 아니다. 어떤 강박이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도 없이, 오로지 ‘창조라는 유희’와 ‘성스러운 긍정’으로 가득한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앵그리 인치를 지닌 채... 스스로 상처투성이인 반쪽인간이지만, 사람들에게 완벽한 인간을 꿈꿀 수 있도록, 이미 잊혀진 태곳적의 완벽했던 모습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차별과 아픔과 이기적인 태도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모든 이분법의 중간에 위치한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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