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죄와 벌>을 쓸 당시, '아마도' 노름 빚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탕한 행동과 그 일의 근본적 원인이랄 수 있는 내면의 탐욕과 방종은 가린 채, 초인에 관한 개똥철학을 내놓는다. 그는 물론 그 스스로의 입으로 직접 그 개똥철학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설파된다. 이는 그의 간교함 또는 소심함의 소치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을 지닌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얼마 간의 돈을 얻기 위해 짐승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른 논리는 꽤나 '매혹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흐음- 니체라... 니체를 들먹거려 나 자신의 저급한 매혹됨을 얼마 간이나마 숨겨보자는 속셈, 그래 인정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로잡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한 전당포 노파 같은 인간, 그리고 인간을 위한, 나아가 인류를 위한 어떤 위대한 철학을 지닌 젊은 청년 중 누구에게 더 돈이, 아니 한 끼의 따뜻한 식사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약값과 입원비가 필요한가? 누가 더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대답은 뻔한 것이다.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니까, 라는 개똥철학 앞에서라면 말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 그것이 쓰여진 19세기 중반이 부르주아 문화가 정점을 지나 타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역설적으로 타락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들이 정점이었다) 시기라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그러한 타락을 맨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화적으로 변두리에 속하는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이런 차이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대략 50여년 후의 릴케가 <말테의 수기> 첫 머리에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란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파리',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라는 이름 뿐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이윤추구'라는 동기 이외에 서로 같은 경험이라곤 단 하나도 공유하지 않은 온갖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정신적, 육체적 타락상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목격할 수도, 또 그들 스스로 경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한 바와 경험한 바를 '객관화'하여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이들, 소위 작가라는 이들이, 부르주아 문화의 몰락을 감지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19세기의 문학이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보게, 지금 우리 가라앉고 있잖나!" 그렇다고 해도 문학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있을 것이다. 첫째, 몰락의 핵심 요소를 찾아내는 것. 둘째, 문학이 몰락에 대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파악하는 것.

 

  작가는(혹은 문학이라는 추상명사는) 시대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것)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면 꽤나 일반적인 진술에 속할 것이지만 이 일반적 역설을 가만히 곱씹어 볼 필요는 있으리라.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어떤 위대한 통찰이라기보다 끈질긴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니체의 '초인'을 들먹이면서) '초월에의 의지'에 방점을 둔다고 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무모한 꿈' 같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을 결코 아니었을 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칼이나 도끼가 아니라 '종이paper'였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종이 말이다. '시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 방점을 둔다면, 그의 문학은 몰락에 대한 '(소극적 의미에서) 증언'과 '(적극적 의미에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자체 몰락을 촉진하고 또 피드백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몰락을 매혹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질을 매혹적이라 느끼는 근본적 이유다. 그 결과, 그의 소설에서 이를테면 '몰락에 대한 극복 의지'를 발견하기란 힘들게 되고 만다. 반대로 그는 몰락 그 자체의 과정에 집중한다. 몰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물론 이는 이후의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 등 유미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점일 터이나), 즉 몰락의 문학적 형상화는 몰락을 역사의 당위로 여기게 만든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점은 (당연하게도!) 아직도 인간의 몰락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죽음 내지는 종언'이 심심치 않게 회자됨에도 불구, 문학이 헤엄치고 뛰놀 물 웅덩이는 아직 깊고 넓다. 그것은 더러운 물 웅덩이가 아니라 넓고 깊고 푸른 대양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몰락'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한(그 몰락을 애도하든 반기든,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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