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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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결국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당치도 않은. 영화는 사회는 고사하고 인간의 관습, 고정관념마저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베르톨루치는 고전 영화를 삶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숭배하고 그것을 흉내냄으로써 현실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조롱하고 전복시키려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된다. 영화와 삶이 일치된 세계. 그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으로 이어질 행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방에 붙여진 마오의 사진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족적 세계를 구축해놓고 그 안에 머문다.

 

자족적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는 불안정한 세계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소울메이트이기도 한 쌍둥이 남매와 그들 사이에 초대된, 혹은 끼어든 미국인 청년. 이 셋은 안정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구축하지 못한다. 한편 그들이 구축한 자족적 세계란 사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서명이 담긴 수표가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세 청춘남녀들의 행동은 진정 급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화를 흉내낸 것, 혁명을 흉내낸 몸짓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가족주의를 깨지 못하고서야 공산주의란 게, 혁명이란 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근대적 가족 관념이 부르주아적 의미의 소유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때 유효할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가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여성(아내)까지 공유한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엥겔스가 회피한 이 문제는 1960년대에 다시 대두된다. 1960년대, 신좌파들과 히피들은 혁명과 사랑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채 키스한다. 그러나 두 남자가 한 여성을 공유하는 게, 혹은 그 반대 역시, 가능한가? 키스하는 커플은 질투심 가득한 눈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어제 나와 키스한 이가 오늘은 다른 이와 키스하는 것을 본 이들 역시 질투심에 휩싸였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질투를 내포한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랑은 근대적 관념이 확실하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 인간이 된다. '소유'는 근대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이다. '소유'가 없다면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만다. 이름, 재산, 여자, 명성, 각종 브랜드, 문화 상품들, 취향, 지식 등등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하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에 어떻게든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맞춰나가려는 의지가 없더라도, 오히려 그 관계망을 벗어나려 하더라도, 주체는 어느덧 관계망에 포섭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의 지포 라이터 장면을 통해 베르톨루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체를 규정하는,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이 사회적 관계망을 완전히 거부하려 들 때 인간은 혼란에 빠지고 희미해진다. 단적인 실례로 히피들은 마약을 상용했다. 혁명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잊을 때만, 몽롱한 상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공산주의는 약의 힘을 빌어 달성될 수 있다. 물론 농담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다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족적 세계에 날아들어온 하나의 돌. 이것은 세 남녀를 현실 세계로, 혁명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나 갈등은 남아 있다. 미국인 청년은 프랑스인 남매를 말리고 프랑스인 남매는 그런 미국인을 뿌리친다. 에뒤뜨 피아프의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가 어지러운 거리 장면 위로 들리면 엔딩 크레딧이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올라간다.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다. 몇 십 년 후 만든 영화 <몽상가들>에서 그는 그러한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혁명을 믿었던 젊은 시절의 행동들은 한때의 '치기'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몽상가들>이 말하는 것이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순진한 혁명가들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거리 앞에서 누군가는 망설이고 있고 누군가는 뛰어드는 장면에서 멈춘다. 여기서 크레딧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우리 선배들은 모두 실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당연히 섣부른 것이고 섣부름을 넘어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을 어린 시절의 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거리(혁명) 앞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사람과 망설임 없이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멈춤으로써, 그리고 크레딧을 거꾸로 올림으로써 감독은 우리에게 지금(혁명에 치기와 동일하게 여겨지는)이 바로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혁명을 자신의 볼거리로만 대하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 특히 울림이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재현한 영화, 혁명가를 다룬 책이 절찬리에 상영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오늘날, 혁명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영화는 그것이 무슨 소재를 다루고 있든, 하나의 오락거리이며, 잘해봐야 문화자본이다. 물론 몇몇 시네필에게는 숭고한 예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수집가에게는 소중한 수집 대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 영화의 존재 방식은 이 범주 안에서 구성된다. 오락과 자본, 예술과 취향 사이. 이런 시기에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혁명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낡은 오래된, 시대착오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영화를 통해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정확히 왜 불가능한지라도 우리는 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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