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CJ한국영화할인)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와이키키 브라더스>

 

감독 임순례

출연 이얼, 황정민, 박원상, 오광록, 오지혜, 박해일, 문혜원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벌써 8년 전 영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2001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 많은, 뭘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문학이 좋았고, 음악이 좋았다. 이것들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뭔가 그럴듯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리 재미있지 않았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삶에 찌들어 있었고 음악을 통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꿈꾸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아니 자발적으로 그만두어 버린 것 같았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했다.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무너져가면서 그러한 느낌은 강화되었다. 강수가 대마초에 취해 불안한 웃음을 흘릴 때, 정석이 칼을 맞고 신경질적 발작을 일으킬 때 그랬다. 그리고 성인 주점에서 성우가 손님의 강요에 의해 벌거벗고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때 그러한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왜 이런 비관적인 영화를 만든 걸까. 궁금했다. 2001년에 나는 이 영화가 꿈이 생활과 현실에 의해 압사당하는 필연적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던 것 같다. 쉽게 압사당하지 않을 거라고.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아마도 치기였으리라.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몰락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았다. 만약 압사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압사당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몰락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자신의 몰락에 대해 타인 혹은 사회 탓을 하면서 구차하게 불만을 늘어놓거나 하지 않는 몰락은 아름답다. 지하생활자나 다자이의 궤변과 수다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최대한 삼가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독백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령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아무래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낙오자들의 변명이 아니다. 그렇게 여겨질 확률이 높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독백은 주관이 섞인 불만이나 자기 변명이 아니라 놀라운 자기 반성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반성과는 다르다. 일반적 의미의 반성이란,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잘못과 오류를 뉘우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에게 반성은 자기 발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는 결코 뉘우치지 않는다.

 

사실 변명이나 반성은 어떤 논리적 비약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개인적 몰락에 대한 원인으로 사회(타인)라는 심급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변명과 반성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둘 모두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이 기질과 사회의 요구가 불일치한 데서 찾는다. 단지 전자는 사회 탓을 더하고 후자는 자기 탓을 더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자기 반성이 변명도 일반적인 의미의 반성도 아닌 이유, 더불어 그가 낙오자가 아닌 이유는 자신의 기질에 대해 말할 뿐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사회 모두를 객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꿈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타협하면서 꿈의 크기를 축소시켜야 한다. 그런데 꿈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아무래도 기질상 서툰 이들이 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그 말을 채우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실은 그런 심정에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첫머리의 "나는 병든 인간, 비열한 인간" 운운은 문자 그대로의 자기 고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몰락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당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몰락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취한 방법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펜이 아니라 단지 비춰지는 그대로를 포착할 뿐인 카메라를 도구로 삼는 영화는 소설과 달리 내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많은 영화들은 내면을 보여주는 척한다. 할리우드에서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전형적 실패담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세상에 도전하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 말미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남기는 식으로 말이다. '너희들의 도전은 비록 실패했을 망정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극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같은 영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새는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방에서 반쯤 벌거벗은 미녀들이 해변을 뛰어다니는 화면을 볼 때마다, (극히 드물겠지만) 버스를 운전하며 우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를 볼 때마다,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혹은 사는 게 힘들어 울고 싶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설프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는다. 그 방법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틀렸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 따윈 없다. 물론 아름답게 사는 방법도 없다. 삶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섣부른 단정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이도 많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짓고 절망하는 대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삶과 세상을 아름다움과 연결시키려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아름다움은 우리 주변 사소한 것들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만과 불평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기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름다움은 사소함 속에 깃들어 있다'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는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성우가 늦은 오후 좁은 하숙방에서 작곡을 할 때, 개장 전의 업소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때(그리고 그것을 인희가 지켜보고 있을 때)이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성우가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 이어지는 장면은 그러한 안도감에 균열을 낸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피칠갑한 정석의 난입과 뒤이은 발작에 의해, 친구 수철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에 의해 파괴된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역할--즉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이러한 장면 전개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만약 영화가 여기서 그쳐버렸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 역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영화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순간 비관의 정서를 탈피한다. 그것도 극도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말이다. 

 

노래방에서 탈의를 강요당한 성우가 노래를 부르다 화면을 응시하면, 나체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남녀가 희미하게 보이고, 화면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금발 미녀가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화면은 곧 어린 시절의 성우와 친구들 장면으로 바뀐다.

 

여기서 성우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지도 (만약 현실도피라면 회상 장면이 이어졌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회한이라는 정서로 물들이고 있지도 않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우리/내가 왜 이렇게 됐지?"라고 말하는 반면, 성우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나체일지언정, 노래에는 관심도 없는 속물들 사이에서일지언정, 그는 어쨌든 지금도 계속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때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쉽게 내던지는 데 익숙하다. 적어도 현실에,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또 그런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술이라도 취했다면 거기에 (아무도 믿지 않을,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믿지 않을) 기나긴 변명들이 덧붙는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그런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8년 만에 다시 보면서 얼마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취해있을 시간에 살아있으라. 말할 시간에 연주하라. 현실 탓을 하면서 꿈을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 꿈과 관련된 일을 단 한 조각이라도 실행에 옮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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