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영화가 개봉하면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좋은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일단 각 출판사들에서 가격 할인 행사를 하고 있어서' 꽤 저렴한 가격'에 3권 짜리 세트를 구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렴한 가격'이 유혹적이란 건 슬픈 일--뭐랄까, 우리 시대의 정신적 빈곤함을 드러내는 일이랄까요--이긴 합니다만.


책이 떨이로 팔려나가는 걸 보면 씁쓸합니다. 마트나 백화점 한 켠에 마련된 특설 할인 매대에 쌓여 있는 상품들을 이리 저리 함부로 다루는 것처럼 책을 다루고 사고 팔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무려 <안나 카레니나>를 말입니다. 뭐 책도 일단은 '상품'이긴 하죠.

 

옛날에 비하면 우리는 책을 엄청나게 '싸게' 그리고 '간편하게' 구해서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을 '빨리, 간편하게' 읽는 분위기가 조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라도, 책을 재빨리 읽고, 요약, 정리, 소화하지 않으면 마치 소화불량에라도 걸린 듯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패스트푸드를 흉내 낸 패스트북도 등장했죠. 한 번 읽고 버리는 게 대놓고 컨셉인 책입니다. 이런 분위기인지라 정독을 한다거나 이미 읽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건 시간 낭비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너 시간 많은가봐?'라는 비아냥 섞인 말을 듣기도 합니다. 딱히 누가 옆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의 또 다른 나'가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책을 덮고 '할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켭니다. 그러고는 곧장 '정보의 바다'로... 그리하여 책은 너무도 쉽게 덮히고 맙니다. 정보의 바다에는 책 내용을 간명하게 요약해주고 있는 글(소화제?)도 많아서 책 읽기를 대신해주기도 합니다.

 

싸게, 간편하게가 지배적인 소비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는 어떤 물건이 됐든 어떻게 하면 '싸고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상품의 가격(가성비)이나 할인율을 비교하는 것이 스마트한 소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하지만 실은 꽤 분주한, 핏발과 신경이 동시에 곤두서는 소비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결코 소비의 대상만으로 국한될 수 없는 책을 살 때도 마찬가지여서,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할인율을 비교한다든지 경품 제공 여부를 체크한다든지 하며 보내는 시간만해도 상당합니다. 씁쓸한 건 이걸 지금 쓰고 있는 저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려면 이 비교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합니다. 제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자고 마음을 먹은 건 작년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야 하냐는 것. 문학동네, 민음사, 펭귄클래식, 작가정신 등, 새번역본을 낸 주요 출판사만도 네 군데.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 4종 세트를 구비할 수도 없고.

 

 

 

 

 

 

 

 

 

 

 

 

 

 

 

 

 

일단은 문학동네판을 골랐습니다. 역자(박형규)가 낯익기도 했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 중 첫 번째 권이라는 점도 뭔가 만듦새의 충실함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읽어본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일단 내용에 푹 빠져서 읽느라 번역이 잘 됐는지는 거의 신경을 못 쓰고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게 훌륭한 번역이겠지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른 번역본은 또 어떨까, 가 궁금해지더라구요. 그래서 가장 최근에 나온 펭귄클래식 <안나 카레니나>를 골라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펭클판도 대체로 자연스럽게 읽혔습니다. 어떤 번역으로 읽어도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게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두 판본을 읽다보니 차이도 보이더군요. 일단 문동판은 문장 자체가 길고, 뭐랄까 조금 옛스러운 표현이 많습니다. 반면에 펭클판은 단문이 좀더 많이 보이는 편이고, 단어 선택에서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단어들을 택하거나 대화(독백)에서 문어체가 아닌 일상어, 구어체적 표현을 쓰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대목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모스크바에서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모두 올바르고 유쾌한 일들뿐이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렸다. 브론스키와, 그의 사랑에 빠진 듯 공손한 얼굴빛을 생각해보았다. 그와 자기와의 관계를 모두 떠올렸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회상이 이 대목에 오자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강해졌다. 마치 그녀가 브론스키를 회상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내부의 목소리가 뜨겁다, 굉장히 뜨거워, 타오르는 것 같다하고 그녀에게 얘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걸까?’ 그녀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결연한 어조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일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난 이 일을 똑바로 보는 게 두려운 걸까? 정말 어떻게 된 걸까? 그럼 나와 그 어린애 같은 사관 사이에 보통 친지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도 있다는 것일까, 아니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다시 책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도 조금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유리를 페이퍼나이프로 긁어보고, 이어 미끈하고 싸늘한 유리에 지그시 볼을 눌렀다. 그러자 별안간 아무런 까닭도 없이 환희에 사로잡혀 자칫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마치 음을 조절하는 나사에 걸린 악기의 현처럼 줄곧 팽팽하게 조여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129/ 문동 1: 200-1)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되돌아봤다. 다 좋았고 즐거웠다. 무도회를 상기하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이 떠올랐고 그와의 관계 역시 죄다 기억났다. 창피해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창피한 감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브론스키를 떠올렸을 때 마치 내면의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뜨거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고쳐 앉으며 결연히 말했다. ‘이게 뭘 뜻하지? 내가 이 일을 직시하는 걸 두려워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어째서? 정말로 나와 그 애송이 장교 사이에 뭔가 다른 관계가, 그러니까 여타 아는 사람들하고는 다른 관계가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경멸하는 웃음을 띠었고 다시금 책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에 종이 자르는 칼을 문지르고는 칼의 매끄럽고 차가운 표면을 뺨에 대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사로잡은 기쁨에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어떤 나사에 감기는 현처럼 신경이 점점 더 팽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펭클 1, 210)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번역에 있어서의 차이는 뚜렷이 드러나는 편이지만, 장단을 콕 집어서 둘 중 어떤 번역이 더 낫다, 라고 확언하는 건 좀 어렵습니다. 물론 세세하게 보면 각 번역본 간의 장단점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대목은 확실히 펭클본의 번역이 낫습니다. '태엽을 감는다'라는 표현에서 '일이 풀린다'로 이어지는 스테판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어떤 캐릭터--농담을 좋아하고, 대책없이 낙천적인 캐릭터죠--인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원문의 의도를 잘 살리고 있죠.

 

 

저 독일인은 한평생 시계태엽을 감도록 자기도 태엽이 감겨져 있다고 말했던 자기의 익살을 생각해내고 빙그레 웃었다.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재미있는 익살[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했다. ‘아마 모든 일이 깨끗이 수습될 거야! 근사한 말이다, 깨끗이 수습된다는 건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말을 어디다 써먹어야겠는걸.’ (14, 문동 1권 35면)

  

  

그래, 어쩌면, 알아서 잘 풀릴지도 몰라! 좋은 말이야. ‘알아서 잘 풀릴 거다.’ 이런 건 말해 줘야 해.’ 그가 생각했다. (펭클 1권 56면)

 

 

하지만 세세한 수준에서 본다면 문동본 번역이 펭클본보다 나은 대목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판본 선택에서의 관건은 역시 가격이 되는 것일까요. 가격 이외의 다른 요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가령 저의 경우엔 판형이나 표지 디자인 면에서 펭클 세계문학 전집을 선호하는 편이라 펭클본을 (할인 혜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골랐습니다.

 

하지만 할인 혜택 때문에 나중에는 결국 민음사본도 사두게 되더군요. 무려 반값 세일을 하는 걸 보고 바로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인 매대에서 '떨이'로 산 것 같단 느낌이 들어 좀 씁쓸하긴 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좀 시간이 지나고 민음사본으로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고민하고 있던 차여서, 다른 한 편으론 반색을 하며 바로 지른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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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나서 많은 점을 느꼈는데요... 여기서 '많은 점'이란 건 굉장히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고전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느낌, 감상이 생기게 되는데요, 저는 그것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그저 막연하고 모호한 형태 그대로 간직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느낌과 감상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바꿔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보코프의 책은, 제목은 <러시아 문학 강의>이지만 사실상 <안나 카레니나> 해설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안나>에 대한 분석과 언급이 유독 많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나보코프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보코프의 주관적 해석과 비평이라는 것입니다. (뭐 모든 비평이 그렇겠습니다만...) 나보코프가 소설의 구성이나 인물들에 대해 갖는 견해는 우리가 책을 읽으며 갖게 된 견해와 감상과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한데,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이 책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상찬을 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짧게만 다루면서 돌직구적 까대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게 도스토예프스키 팬으로선 아주 기분 나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끝판왕' 대접을 받았으면 받았지, 누구한테든 까인 적이 별로 없어서 매우 신선하기도 합니다... ㅋ) 뭐 도스토 선생이 나보코프에게 까대기를 당했다고 해서 일순간 무너질, 만만한 작가는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 책에서 나보코프는 자신도 결코 '만만한 독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냥 "내 취향이 아니야. 그래서 싫어"라는 식으로 까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책을 몇 십 년 간의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읽은 후에야 비로소, "도스토..는 이런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식입니다. 무척 성실한 독자죠.

 

마찬가지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도 취향을 앞세워서,"이런 이야기는 딱 내 취향이야."라는 식으로 상찬을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 하나 상세한 근거를 들면서 왜 <안나 카레니나>가 위대한 작품인지, 왜 안나라는 캐릭터가 '세계문학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인물'인지를 설득력 있게 잘 쓰고 있습니다. 성실한 독자가 애정을 갖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또는 읽기 전에) 바로 읽어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톤 체호프 번역으로 친숙한 이름인, 오종우 교수의 책 <백야에서 삶을 찾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이 세 작품을 다룬 책입니다. 러시아 문학의 최고 엑기스를 추출해서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의 표현에 따르면) "'자세히' 동시에 '친철하고' '편안하게' 해설해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무척 끌리는 책 소개입니다. 하지만 최근에(2011년)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절판이라는 게 함정... 도서관에서도 검색해봤지만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조차 별로 없습니다...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도 기회가 되면 읽어볼까, 하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로쟈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 생애 전반을 다룬 글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은 것은 바로 위의 책입니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필맥, 2005)라는 제목의 책으로,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입니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가 한 곳에 묶여 있다는 게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출판사에서 그냥 되는 대로 묶은 건가... 그건 아니고 원래 츠바이크가 이 세 작가를 묶어 썼습니다. 오히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 이 책이 톨스토이 & 도스토예프스키 = 대표적인 러시아 작가, 라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상식에 맞춰, 인위적인 구성을 한 경우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입니다.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의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유형. 그리고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한 사람들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들어, 세창출판사라는 곳에서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를 3권까지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두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에 들어간 작가들입니다. 9권까지 완간을 기대해봅니다.....

 

 

 

 

 

 

 

 

 

 

 

 

 

 

 

 

 

 

 

 

완간을 기대한다...... 라고 썼지만, 사실 위의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는 2009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나온 <천재, 광기, 열정>(전2권)이라는 책을 재편집해서 내놓은 것입니다. <천재, 광기, 열정>의 1권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클라이스트가 실려 있고, 2권에는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가 실려 있습니다.

 

원래 츠바이크의 구성과 비교하면 목차가 뭔가 혼돈의 카오스엉망이고, 횔덜린이 빠져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원래의 구성을 깨고, 순서를 뒤섞은 이유, 횔덜린만 왕따시킨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편집자나 출판사 측 나름의 의도가 있는 걸까요? 전설의 레전드에 해당하는 작가들을 다루느라 그런 건가... 어디까지나 제 짐작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구성을 바꾼다한들 판매고가 올라갈 것 같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넘어 톨스토이에 관심이 생겼다면, 더 나아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생겼다면, 다음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러시아 사상가>(생각의 나무, 2008)는 이사야 벌린의 저서로 유명한 글, <고슴도치와 여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우는 잡다한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굵직한 것 하나를 안다"라는 어떤 그리스 시인의 단장에서 출발하는 이 글에서 이사야 벌린은, 도스토옙스키가 고슴도치라면 톨스토이는 "천성은 여우지만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은 작가"라고 주장합니다.

 

고슴도치 유형은 하나의 중심적 비전, 때로는 광적인 내적 비전에 모든 것을 연결시키려드는 유형이고, 여우 유형은 폭넓은 체험과 다양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유형인데, 플라톤, 파스칼, 헤겔, 니체, 입센, 프루스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고슴도치라면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에라스무스, 괴테, 푸시킨, 발자크, 제임스 조이스는 여우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투르게네프를 재발견하게 되어 신선했습니다. 아무래도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 유명세나 중요도에서 밀리는 작가인데, 이사야 벌린은 '아버지와 아들' '투르게네프와 자유의 곤경'이란 글을 책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투르게네프에게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투르게네프가 갖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합니다.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톨스토이가 예술-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후자로 넘어가려 할 때, 투르게네프가 예술로 돌아오라고 진심으로 충고하는 대목입니다. 더불어 '비사리온 벨린스키' 장에서 다루고 있는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였던) 벨린스키-도스토예프스키 라인도 신선합니다. (벨린스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 <가난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에는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죠.)

 

 

마지막으로 두께나 가격(아마 난이도도 그럴 듯...)이 좀 엄두는 안 납니다만, 빅토르 쉬클롭스키라는 저명한 학자가 쓴 <레프 톨스토이>(전2권)(나남, 2009)도 있습니다. 저 역시 구매할 엄두도, 읽을 엄두도 안 나서 그냥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침만 흘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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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카사노바, 스탕달과 더불어) '삶의 세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은 톨스토이가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인 인물임을, 즉 세계보다는 자기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적'이란 표현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만, 이러한 삶의 태도에 담긴 긍정적 측면을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남을, 이 세상을 먼저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선 쉽게 위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톨스토이의 자기중심성은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면, 나아가 수치스러운 면까지를 '단순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연관이 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죠?” // “언제나 한 가지 일뿐예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녀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라고. 그래서 그가 찾아온 지금도 그녀는 어째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를테면 벳시한테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기에게는 왜 이렇게 괴로울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2부 22장 / 문동 1권 368면)

 

“난 말입니다” 하고 콘스탄틴 레빈은 말했다. “어떤 활동이라도 개인적인 이익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공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진리, 철학적인 진리입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자기한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철학적’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3부 3장, 문동 2권 27면)

 

“어째서 나리께선 그렇게까지 농부들을 걱정하시는 거예요?”

“난 그자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거야.” (3부 30장 / 문동 2권 214면)

 

 

그렇다고 톨스토이가 자기라는 협소한 틀에 갇혀버린 작가인 건 아닙니다. 그는 세계의 혁명, 인간의 구원, 인류애를 이야기합니다.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가, 현실의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한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절정에 위치한 작품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직후, 정신적 위기를 겪고 신과 구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자기 자신'과 '현실의 삶'은 단단한 기반이 됩니다. 그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톨스토이는 혁명과 구원, 인류애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가 작가(예술가)이기를 그만두고 설교가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설교가로서의 톨스토이 역시 웬만한 설교가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제 생각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 독자가 기억해야 할 점은 톨스토이가 '삶을 사랑한 작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명제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7명에게 모두 적용이 됩니다. 모두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삶을 사랑한다'고 표현했을 때, 이 표현에 가장 잘 들어맞는 듯한 인물은 레빈-키티입니다만, 안나-카레닌-브론스키, 스테판-돌리 역시 각자의 삶을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꼭 좋은 결실을 맺는 건 아닙니다. 안나-카레닌-브론스키의 관계는 불행과 파국으로 치닫고, 스테판-돌리는 위선적 관계를 유지하지요. 레빈 역시 삶의 본질적 허무에 대한 고뇌를 끝까지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바로 이러한 불행과 파국, 위선과 허무가 현실의 삶이 갖는 양상임을 보여줍니다.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삶의 양상 자체로 사랑할만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어떤 삶이든 충분히 사랑할 만하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선언이나 주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데 이 소설의 매력과 미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많은 인물들은 제 나름의 고민을 하는데(작가는 안나와 레빈뿐만 아니라 카레닌, 키티, 돌리, 스테판, 브론스키의 내적 고민을 모두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고민은 무척 섬세하고 다층적이긴 하지만, 어려운 말로 포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독자는 인물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는지를 자연스럽게 포착하고 그들의 고민에 깊이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독자는 인물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물들의 어리석음, 위선, 수치, 두려움을 발견하지만 그것이 제거하거나 극복해야 할 부정적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한 속성을 지닌 인물이라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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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 2013-05-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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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에게 가망이 없었다. 세 번째 졸도였기 때문이다. 매일 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때가 방학 때였다) 촛불이 밝혀진 정방형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면 밤마다 나는 그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죽는다면 어둠에 싸인 블라인드에 촛불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전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두 개의 촛불을 켜놓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가끔 '나는 오래 살지 못할까 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질없는 소리려니 생각하고 흘려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적중하고 만 것이다. 매일 밤 나는 창문을 응시하면서 마비(paralyisis)라는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은 언제나 내 귀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경절형(gnomen)이라는 말과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성직 매매죄(simony)라는 말처럼 생소하게만 들렸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나에게 그 말이 어떤 나쁜 짓을 일삼는 죄받을 존재의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그 말에 오히려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이 저지르는 끔직한 소행을 눈여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제임스 조이스, <자매>, <<더블린 사람들>>

 

<자매>는 <<더블린 사람들>>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위의 인용은 <자매>의 첫머리. 그러니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문단인 셈. 제임스 조이스는 무엇보다 <율리시스>의 작가로 유명합니다만, 조이스를 <율리시스>로 처음 접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분량이나 난이도가 모두 '최상급'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입니다(생각의나무에서 펴낸 번역본은 들고 다니면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판형이 크고 두껍습니다. 그래도 나름 '산책'에 관한 소설인데 산책 중에 읽을 수 없다니!!). 이래저래 독자들은 <더블린 사람들>(혹은 그 이름도 유명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조이스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된 문단은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조이스]인 셈입니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 여기저기에 떡밥(수수께끼)을 뿌려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떡밥 뿌리기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었던지 자신의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두고 "앞으로 반 세기가 지나도 문학연구자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지 못해 쩔쩔맬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후기의 일이고 작품 활동 초기에는 나름 친절함(?)이랄까,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랄까,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면모를 바로 위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촛불' 묘사는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합니다. 위 인용에서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이라는 묘사는 '죽음-마비-혼수상태'에 대한 탁월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며, 작품의 지배적 심상을 이룹니다. 죽음-마비-혼수상태는 조이스가 파악한 바, 당시 아일랜드의 정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은 빛이지만 주위를 온통 환하게 밝혀주거나 어떤 대상을 밝게 비춰주는 빛이 아니라, 단지 창문가에 어른거리고 깜박이는, 희미하고 뿌연 '촛불'의 빛을 통해 그러한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촛불'에 상응하는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젊은이가 인파를 뚫고 걸어갈 때, 콜리는 이따금 몸을 돌려 지나가는 처녀들에게 미소를 던졌지만 이중의 달무리에 둘러싸인 희미한 보름달에 고정된 레너헌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이 달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두 멋쟁이>, 92)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즐겁다 싶을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불안한 내색 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니 지난날의 기억들이 점점 미래의 희망과 비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망과 비전은 너무나 복잡하게 뒤얽혀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 하얀 베개도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숙집>, 120)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뒤덮고 있었다. 잔광은 또 너저분한 보모들과 벤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쇠한 늙은이들에게 온화한 황금빛 먼지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잔광은 말하자면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예를 들면 자갈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드리워져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리되듯이) 그는 슬퍼졌다. 그리하여 그는 잔잔한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구름>, 126)

인용문들을 잘 읽어보셨나요? 읽어보면 '촛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 복잡하게 뒤얽힌 나머지 인물의 시선이 고정된 사물조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희망과 비전,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위에 드리워진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 등이 바로 '촛불의 빛'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촛불의 빛은, 불안, 환멸, 우울감, 부질없음, 무기력, 마비 상태와 연관이 됩니다.

 

'마비'는 조이스 연구자들이 작품 해석의 키워드로 꼽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신적) 마비'니, '죽음'이니, '혼수상태'라고 해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아일랜드가 겪어온 식민의 역사라든가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쓴) 1910년대 아일랜드의 사회상, 대영제국이라는 체제 내에서 아일랜드-더블린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위 내지 입지와 결부시키면 언뜻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부에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이스-아일랜드-식민의 역사-변방성]. 이런 연결 고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소설 읽기를 재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조이스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고도의 상징을, '복잡하게 뒤얽힌' 해석 과정 없이,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힌트는 <자매>의 첫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힌트는 단순합니다. 뭔고 하면, 소설 속의 어린 화자를 따라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맥락도 없이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를 때가, 또한 그 단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발음해보고 싶을 때가, 그래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특정한 방식을 찾을 때까지) 실제로 여러 번 반복해서 중얼거려 볼 때가 있습니다. <자매>의 어린 화자에게 그것은 '마비' 즉 '퍼랠리시스'라는 단어였죠. 아마도 어린 화자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용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그 단어 자체의 '발음'에, 또는 발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을 단어 자체의 '생김새'에 매력을 느낀 것이겠죠. 어쩌면 죽어서 누워 있는 플린 신부에게 배운 단어일 수도 있겠네요.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이스가 아무 '맥락 없이' 떨궈놓은 이 '마비'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또 가로지르는 나름의 맥락을 독자 입장에서 추측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블린 사람들>을 읽는 재미라는.

 

어떻게 생각하면 조이스는 우리에게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중얼거려 보는 것’의 매력과 중요성을 알려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는 말들이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든가 '릴레함메르'라든가, 아니면 제가 종종 중얼거리는 말인 "아오, 빡세!"라든가. 덧붙여 '빡세'를 'baxe'라고 써놓고, '빡세'와는 다른 혀놀림으로 'baxe'라고 발음해 보기를 시도해보고 그 뉘앙스의 차이를 음미해본다든가.

 

참 쓸데없어 보이는 짓입니다(하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짓만큼 우리가 사심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몰두하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어떤 것,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극복의지를 갖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초조함과 불안과 거부감과 분노를 촉발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상태가 되게 하는지 도대체 표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이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머릿속에 맴도는 그 어떤 것을 '중얼거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억양과 어투로, 그리고 나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매번 다르게 중얼거려 보는 것'. 물론 그것은 여전히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명료한 발화가 아니라 중얼거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조이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조이스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억지 주장을 하지도, 진리에 해당하는 어떤 명제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모호하게,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고 그것을 애써 설명/해명하지 않고 그러한 형태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것들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는 ‘마비’라는 단어를 직접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갈색 눈썹이 달린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서로가 비슷한 것에 고통받고 있고 결박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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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을 읽다 발견한, '중얼거림'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꼭 '나직한' 중얼거림은 아니라는 게 함정?!). 여러분은 어떤 단어 혹은 문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곤 하시나요?

 

나는 그가 이미 외워둔 그 무엇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이 자기 말씨 중 어떤 낱말의 매력에 홀려 같은 궤도를 자꾸만 천천히 빙빙 돌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사실을 단순히 언급할 뿐이라는 투로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이 엿들어서는 안 될 모종의 비밀이라도 얘기해주듯이 신비스러운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 변화를 가하면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에워싸기도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뜻밖의 만남>, 41)

 

 

일행이 별실에서 나갈 때 그녀는 그의 의자에 스치듯 살짝 닿자 오, 죄송해요 하고 런던 억양으로 말했다. … 그는 자기 옆을 부딪고 지나치며 죄송해요! 라고 말하던 그 큰 모자를 쓴 여자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67, 169)

 

 

그는 아들의 단조로운 억양을 흉내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당에. 성당에 갔다, 이 말씀이지! (<맞수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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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습니다. 봄이라고 하면 저는 왠지 단편이 땡깁니다. 예비군 훈련의 추억 때문인지도. 왜 하필 예비군 훈련이냐 하면, 군복 건빵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틈날 때마다 읽기 좋기 때문입니다. 예비군 훈련 받을 때 읽기 좋은 봄에 읽기 좋은 단편집 몇 권 골라봤습니다.

 

 

 

 

 

 

 

 

 

 

 

 

 

 

 

 

1. 첫 번째 추천 작가는 안톤 체홉(체호프)입니다. '단편'이라고 했을 때, 에드거 앨런 포, 오. 헨리와 더불어 즉각 생각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체홉은 장편도 썼지만 단편에서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보코프 역시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체홉을 가리켜 장거리 주자라기보다 단거리 주자다, 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체홉 단편집은 아주 많은 판본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보든 큰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전집이 아니라 선집이기 때문에, 단편집에 따라 수록된 작품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필요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상자 속의 사나이>라는 단편은 (다음 세 판본 중) 펭귄클래식 출판사본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체홉의 단편이 마음에 드셨다면 세 개의 판본을 모두 구비해놓고 읽어나가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홉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추천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첫사랑>입니다. 베케트는 물론,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네 편의 단편이 실린 <첫사랑>도 읽어볼만한 작품집입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로 출간되어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제목은 물론, 내용도 (이의는 있겠지만) 왠지 봄과 어울린달까요.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의 물리적 속성이 그렇다는 것일 뿐,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베케트의 소설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재밌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또 쉽지 않다고 해서 쉬엄쉬엄 읽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써놓고 나니, 저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네요.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라고 하니, 플로베르의 단편 모음집인 <세 개의 짧은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3.. 세 번째로는 한국 작가의 단편집을 추천해봅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야말로 '단편 강국'이기도 하지요. '신춘문예'라는 오래된 제도적 전통, 그리고 단편을 위주로 공모를 해온 문학계간지가 문단을 주도해온 덕택에 한국에서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장려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플로베르가 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문제 의식을 갈고 닦아 길고 묵직한 대장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없고, 그때 그때 시의에 따라 순발력 있게 짧은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이 대다수를 이루게 되었다는 비판이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비판의 결과로, 최근 들어 장편만을 공모하는 '장편 문학상'들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단편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은 식민지 시대부터라고 하니, 그 연원이 꽤 깊은 셈입니다('신춘문예'라는 제도 자체가 식민지 시기에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문학 작품들 역시 단편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르치기에도 좋고, 시험 문제 출제하기도 편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어쨌거나 여러 작가 중에서도 일찍이 단편 소설에서 최고의 성취를 보인 작가는 아무래도 상허 이태준이 아닌가 합니다. 이태준은 '단편 소설의 명수'로 불렸고, 체홉에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태준의 단편은 <복덕방> <달밤>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다시 읽은 <밤길>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4. 1930년대에 이태준이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김승옥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추천 작품은 김승옥 단편집입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 평가되는, 그야 말로 톡톡 튀는 단편들을 통해 60년대라는 시기, 그리고 당대를 넘어 한국문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인 김승옥은, 그 다재다능함으로 인해(영화 시나리오를 썼음은 물론 영화 감독까지 했습니다) 한국의 '장 콕토'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김승옥 소설전집은 총 다섯 권으로 나와 있는데, 1권에 주요 단편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2-5권에는 중, 장편과 콩트들이 실려 있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다섯 권 모두 봐도 좋겠지만, 김승옥 역시 체홉처럼 장거리 주자라기보다는 단거리 주자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1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강변 부인> 같은 대중 소설도 읽어보면 꽤 재밌긴 합니다.

 

 

 

 

 

 

 

 

 

 

 

 

 

 

 

 

5. 일본 작가 중에서도 훌륭한 단편을 남긴 작가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래도 <인간 실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사양>과 같은 소설이나 단편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긴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던 것도 어느 덧 오래 전 이야기..... 네요.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20대 초, 중반에 푹 빠져 있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자이 오사무는 '문학 청년(소녀)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최적화된 작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승옥 역시 청년기에 다자이 오사무를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학적 감수성'이란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미성숙'의 증거이기도 할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문득, 뭐랄까,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감수성'을 앞세워) 마구 칭얼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이 돼서 칭얼거리면 주변의 빈축을 사기 쉬위니, 다자이 오사무의 주인공들이 마구 칭얼대는 걸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는 정도로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또는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구 칭얼대는 와중에도 매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을 다자이로부터 전수받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일본 작가의 단편집을 또 하나 고르자면,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역시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다음의 판본(<월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화폐 5000엔의 모델인 여류 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단편집 <키 재기 외> 도 읽어볼 만 합니다.

 

 

 

 

 

 

 

 

 

 

 

 

 

 

 

 

 

 

 

 

 

 

 

 

 

 

 

 

 

 

 

 

6. 다음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집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입니다. 고골의 단편은 19세기 초, 중반 무렵에 쓰여진 것들이라 '현대적인' 느낌이 조금 덜한 편입니다. 민담이나 우화의 요소, 환상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느낌이 덜하다고 해서, 구닥다리 냄새가 나거나 공감대 형성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외계의 것인 듯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들입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엔 굉장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상상력인데, 조금만 읽다보면 작품에 훅 빨려들게 된다는 치명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코>, <외투> 등 유명한 단편들은 물론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와 같은 단편들 역시 훌륭합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광인 일기>를 읽어보시면,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상상이 가능했는지 싶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 권의 단편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읽은 것 위주로 소개를 해드렸기 때문에 리스트의 밀도가 헐겁습니다. (하긴 어떻게 뽑더라도 완벽한 리스트라는 게 존재할 순 없겠습니다만...) 가령 중국 작가 루쉰이나 미국 작가들의 단편은 아쉽게도 리스트에서 빠졌습니다. 혹시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루쉰 소설 전집>을 추천합니다. 또한 미국 작가들의 단편들을 쭉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소설집으로는 창비에서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 외>가 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선]은 각 나라의 대표 단편들을 고루 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 대개 한 작가 당 한 편씩만 읽게 되어 있어서 감질맛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관심이 가는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찾아 읽으면 되겠지만, 국내 출간이 아예 안 된 경우가 많아 그렇게 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엔 [세계문학 단편선-미국편]에서 셔우드 앤더슨과 스티븐 크레인에 관심이 생겼는데, 셔우드 앤더슨은 다행히 단편집 <와인스버그, 오하이오>가 국내 출간되어 있으나 스티븐 크레인의 작품은 따로 출간된 게 없어서 매우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 아쉽다면 원서를 구해서 읽어도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봄에 가볍게 지니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애초의 컨셉에 맞지 않는 달까요... 하긴 뭐, 루쉰 소설 전집도 이미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을 만한 두께와 무게는 아닙니다...

 

 

***

단편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달려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마음을 놓고 읽으면 잘 소화, 흡수가 안 된다는 점! 잘 쓰여진 단편은 고농축, 고단백 음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름의 '식이요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소화불량, 영양과다를 피하려면, 하루에 몇 편을 연달아 읽는 대신, 한 두 편을 읽고, 내용을 천천히 곱씹어 보는 시간(=소화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와중에, 저는 그 동안 건성으로 한 두 편 씩 읽었던 체홉의 작품들을 하루 한 편 씩 읽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개인적 욕심이 반영되어서인지 첫 타자로 소개를 했네요.) 그렇습니다. 왠지 단편은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 말하자면, '건성으로' 읽게 되는데, 실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쓰는 것이 바로 단편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도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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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게 된 사실. 도서출판 b에서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총 10권으로 계획하고 출간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5권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작품이 쓰여지고 출간된 시기 순이어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집 10권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권 <만년>, 제2권 <사랑과 미에 대하여>, 제3권 <유다의 고백>, 제4권 <신햄릿>, 제5권 <정의와 미소>, 제6권 <쓰가루>, 제7권 <판도라의 상자>, 제8권 <사양>, 제9권 <인간 실격>, 제10권 <생각하는 갈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인간 실격>일 텐데, 중단편들도 읽어볼 만합니다. '훌륭하다'고 하지 않고 그저 '읽어볼 만하다'고 한 것은, 글쎄요, 아무래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한국에서 '문학 청년(소녀)적 감수성'의 기본 형태를 주조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문학 청년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최적화된 작가,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다자이 오사무에 푹 빠졌던 경험이 있는 이라면(드물지 않을 듯한데) 이 말에 공감하실 듯.

'문학 청년(소녀)적 감수성'은 '미성숙한 자아의 감수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주관적 감수성이 실제 세계와 실제 삶을 압도하는 경우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세계를 자기 위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나 입장보다는 내 존재와 입장이 우선이고, 또 절대적입니다. 요컨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문득,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감수성'(또는 순수함)을 앞세워 마구 칭얼대고 떼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20대 중반을 넘어선 이후로 자연히 멀어진 작가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자이 오사무는, "내 순수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런 세계 따위 필요 없어. 죽어버릴 거야!"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세계에 대한 경멸이 깔려 있고, 죽음, 그것도 자살을 무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에둘러 표현합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혀 사과로 여겨지지 않고, 칼날이 숨겨져 있는 듯합니다. 위악적입니다. 이런 식의 사과 아닌 사과는 받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을리 없습니다. '인간 쓰레기'--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스스로를 그렇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잘 타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경우엔 이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작품 자체가 발하는 고유한 매력이 있어서 읽다 보면 어느덧 설복당하기 십상이니까요. 가령 <동경 팔경>과 같은 작품에서는 항상 자살을 꿈꾸고 있는,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주인공이 그 '초긴장 상태' 속에서도 짐짓 여유를 부리며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데, 그 묘사에는 놀랍게도 유머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자신을 동경의 명물 중 하나로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까놓고 이야기 하기] 분야가 있다면, 다자이 오사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과도한 자의식'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성숙한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어른(요즘 유행하는 말로 '깨시민')이 된다는 것은, '나'라는 편협한 관점과 입장을 벗어나 '남'의 존재와 입장을 배려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우리는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상황과 입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고, 자기를 배려해본 적이 없는 이가 타인의 입장에 서보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내 입장 보다는) 남의 입장을 우선 배려하기'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취하기'가 하나의 정언 명령으로 자리 매김된 요즘입니다. '개념을 탑재'해야(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여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말 실수나 행동의 실수로 '초딩(=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개념 탑재'가 하나의 강박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편견과 고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다른 성별, 다른 인종, 다른 종(동물), 그리고 지구와 환경. 이 모든 것을 배려하라는 명령들 속에서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생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갖가지 '개념들'에 의해 '감수성'이 질식당하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다자이를 읽으면 숨통이 트인다"는 독자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해서, 앞서 그저 '읽어볼 만하다'라고 썼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특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가라고 수정해둡니다... (읽을 것들이 쌓여 있어 언제 전집을 읽을 시간이 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는 <인간 실격>보다는 <사양>이 좋았습니다.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에 실린 단편들도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위에 언급된 <동경 팔경>을 비롯하여, <후지 산 백경> <여학생>과 같은 단편들이 좋았습니다. 앞의 두 단편은 경치에 대한 묘사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자기 중심적 작가' 또는 '자기 자신의 (감수성에) 매몰된 작가'임에 틀림 없는 다자이 오사무이지만, 한가롭게 경치 얘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자기 얘기가 빠지지는 않습니다.)

삶에 대한 답은 누가 대신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각자 자신에게 절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가는 방법도 천차만별입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사회의 통념에 비춰볼 때) '바람직한' 방식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는 아주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문제를(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에 천착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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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주문한 <모차르트>가 도착해서 읽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평전으로, 부제는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무려 '사회학적 고찰'이다 보니 읽는 게 마냥 쉽지 만은 않습니다. 어째서 '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해,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운명, 유일무이한 인간이자 유일무이한 예술가로서 그의 운명은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즉 당시 음악가들이 궁정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례에서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장인적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면, 한 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이 아무리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후세에게 전기 형식으로 이해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를 이루려면 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를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이 경우엔 18세기의 예술가가--자기 시대의 다른 사회적 인물들과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만들어내는 결합태의 검증 가능한 이론적 모델을 완성해내는 일이다. (24-25)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에 대해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습니다. 논의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사회는 아직 '낭만적 천재'의 개념을 몰랐다. 따라서 천재를 천재로 대할 줄 몰랐고,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 역시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들의 궁정에서의 서열은 '과자 제조공' '요리사' 또는 '시종'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궁정 아첨꾼'에 해당했다, 고 엘리아스는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궁정 음악가'들은 그들의 '낮은 신분'에 맞게 "음악적 취향뿐만 아니라 의상이나 전체 인간적 특징에 이르기까지 궁정의 행동 규범 및 감정 규범에 맞춰야만"(26)했다고 합니다. 마치 승진 기회를 노리고 있는 대기업 직원이 상사의 규범에 맞게 행동(그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였던 셈인데,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엘리아스는 쓰고 있습니다.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었던 사회. 거기서 모차르트는 뭔가 공정하지 않음을 느꼈고, 분노를 터뜨렸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개인적인 투쟁"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투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엘리아스는 또한 쓰고 있습니다.

베토벤과의 비교도 (짤막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궁정-귀족적 전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반면, "베토벤은 이 전통을 박차고 나왔다"(48)고 서술합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속박한 '궁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유 시장'에서 '자유 예술가'로서 작업했으며,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일관성 있게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59)고 합니다. 물론 엘리아스는 이 ('자유 시장'이 보증하는 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예술가'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들 역시 다음과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보면 흥미롭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인적, 재정적 자원이 필수였던 탓에 (여차하면 유랑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던 연극과는 달리) 전적으로 궁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49)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과연 신의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은 천재일까요? 위대한 예술은 천재들의 전유물인 걸까요? 엘리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착상(환상, 상상)은 (예술의) 재료 및 사회(특히 양자가 지니는 한계)와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위대한 것으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자발적으로 발휘한 '예술가적 양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좀 길지만 다음의 인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술가의 착상이 재료 및 사회와 동시에 연관된다는 것은—첫눈에 그 관계가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결코 우연이 아니다. 각각의 예술 영역을 특징짓는 재료들은 무한히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가의 자의에 강하게 저항한다. 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려면 개인의 환상은 이 재료들 중의 하나 속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한다. 예술가가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환상과 재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환상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동시에 의사소통의 수단, 즉 반드시 예술가의 동시대인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들의 공감의 대상이 된다.

어떤 예술가도, 즉 모차르트조차도 힘 안 들이고 창작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강물처럼 흐르는 환상의 물결이 재료의 고유성과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융화되어 있고 음의 형태는 오랜 기간 동안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으며 그 음의 풍부한 독창성은 뛰어난 음 형태의 내재적 일관성과 무리없이 결합되어 있지만, 모차르트는 어떤 작품에서도 지켜보는 양심의 눈 밑에서 검토하고 개정하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훗날 "작곡하지 않는 것보다 작곡하는 일이 더 쉽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이며 그 신빙성도 상당히 높다. 언뜻 보기에 이는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이 내뱉는 말쯤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고뇌에 지친 인간의 고통에 찬 절규임을 알게 된다.

모차르트는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이 고통을 때론 장난기 어린 우아한 작품들을, 때론 깊이 심금을 울리는 작품들을 창조함으로써 극복하였다. 그가 이 작품들을 통해 추구했던 성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양심 때문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재능을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의무를 배반했더라면 한결 수월하게 지나갔을 경우에조차 그는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순전히 그의 결정만은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강제였지만, 다른 한편 하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별다른 자기 성찰 없이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가 필요로 했던 청중의 사랑과 갈채를 상실할 정도로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후세의 감탄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모차르트와 같이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의 인격 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인간 모차르트와 예술가 모차르트를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양 나누어 말하는 습관이 자명성을 상실케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이다. (88-90)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는 그가 이전에 했던 작업들, 특히 <궁정사회>나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논의됐던 점들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롯한 18세기의 음악적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궁정 사회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나, 모차르트의 죽음을 '사회적 실존의 좌절' 즉, '사회적 죽음'으로 본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여겨져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어 '스스로를 포기'하다시피 죽어 간 모차르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 개인의 드라마로 내버려두지 않고 한 편의 '사회학적 드라마'로 서술한 것이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어나 설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교적 부담없이 사회학적 논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내킨다면,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읽어나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http://youtu.be/rfeoBc4f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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