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블린 사람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이번에는 그에게 가망이 없었다. 세 번째 졸도였기 때문이다. 매일 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때가 방학 때였다) 촛불이 밝혀진 정방형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면 밤마다 나는 그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죽는다면 어둠에 싸인 블라인드에 촛불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전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두 개의 촛불을 켜놓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가끔 '나는 오래 살지 못할까 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질없는 소리려니 생각하고 흘려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적중하고 만 것이다. 매일 밤 나는 창문을 응시하면서 마비(paralyisis)라는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은 언제나 내 귀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경절형(gnomen)이라는 말과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성직 매매죄(simony)라는 말처럼 생소하게만 들렸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나에게 그 말이 어떤 나쁜 짓을 일삼는 죄받을 존재의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그 말에 오히려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이 저지르는 끔직한 소행을 눈여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제임스 조이스, <자매>, <<더블린 사람들>>
<자매>는 <<더블린 사람들>>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위의 인용은 <자매>의 첫머리. 그러니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문단인 셈. 제임스 조이스는 무엇보다 <율리시스>의 작가로 유명합니다만, 조이스를 <율리시스>로 처음 접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분량이나 난이도가 모두 '최상급'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입니다(생각의나무에서 펴낸 번역본은 들고 다니면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판형이 크고 두껍습니다. 그래도 나름 '산책'에 관한 소설인데 산책 중에 읽을 수 없다니!!). 이래저래 독자들은 <더블린 사람들>(혹은 그 이름도 유명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조이스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된 문단은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조이스]인 셈입니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 여기저기에 떡밥(수수께끼)을 뿌려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떡밥 뿌리기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었던지 자신의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두고 "앞으로 반 세기가 지나도 문학연구자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지 못해 쩔쩔맬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후기의 일이고 작품 활동 초기에는 나름 친절함(?)이랄까,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랄까,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면모를 바로 위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촛불' 묘사는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합니다. 위 인용에서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이라는 묘사는 '죽음-마비-혼수상태'에 대한 탁월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며, 작품의 지배적 심상을 이룹니다. 죽음-마비-혼수상태는 조이스가 파악한 바, 당시 아일랜드의 정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은 빛이지만 주위를 온통 환하게 밝혀주거나 어떤 대상을 밝게 비춰주는 빛이 아니라, 단지 창문가에 어른거리고 깜박이는, 희미하고 뿌연 '촛불'의 빛을 통해 그러한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촛불'에 상응하는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젊은이가 인파를 뚫고 걸어갈 때, 콜리는 이따금 몸을 돌려 지나가는 처녀들에게 미소를 던졌지만 이중의 달무리에 둘러싸인 희미한 보름달에 고정된 레너헌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이 달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두 멋쟁이>, 92)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즐겁다 싶을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불안한 내색 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니 지난날의 기억들이 점점 미래의 희망과 비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망과 비전은 너무나 복잡하게 뒤얽혀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 하얀 베개도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숙집>, 120)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뒤덮고 있었다. 잔광은 또 너저분한 보모들과 벤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쇠한 늙은이들에게 온화한 황금빛 먼지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잔광은 말하자면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예를 들면 자갈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드리워져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리되듯이) 그는 슬퍼졌다. 그리하여 그는 잔잔한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구름>, 126)
인용문들을 잘 읽어보셨나요? 읽어보면 '촛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 복잡하게 뒤얽힌 나머지 인물의 시선이 고정된 사물조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희망과 비전,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위에 드리워진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 등이 바로 '촛불의 빛'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촛불의 빛은, 불안, 환멸, 우울감, 부질없음, 무기력, 마비 상태와 연관이 됩니다.
'마비'는 조이스 연구자들이 작품 해석의 키워드로 꼽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신적) 마비'니, '죽음'이니, '혼수상태'라고 해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아일랜드가 겪어온 식민의 역사라든가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쓴) 1910년대 아일랜드의 사회상, 대영제국이라는 체제 내에서 아일랜드-더블린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위 내지 입지와 결부시키면 언뜻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부에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이스-아일랜드-식민의 역사-변방성]. 이런 연결 고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소설 읽기를 재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조이스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고도의 상징을, '복잡하게 뒤얽힌' 해석 과정 없이,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힌트는 <자매>의 첫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힌트는 단순합니다. 뭔고 하면, 소설 속의 어린 화자를 따라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맥락도 없이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를 때가, 또한 그 단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발음해보고 싶을 때가, 그래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특정한 방식을 찾을 때까지) 실제로 여러 번 반복해서 중얼거려 볼 때가 있습니다. <자매>의 어린 화자에게 그것은 '마비' 즉 '퍼랠리시스'라는 단어였죠. 아마도 어린 화자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용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그 단어 자체의 '발음'에, 또는 발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을 단어 자체의 '생김새'에 매력을 느낀 것이겠죠. 어쩌면 죽어서 누워 있는 플린 신부에게 배운 단어일 수도 있겠네요.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이스가 아무 '맥락 없이' 떨궈놓은 이 '마비'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또 가로지르는 나름의 맥락을 독자 입장에서 추측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블린 사람들>을 읽는 재미라는.
어떻게 생각하면 조이스는 우리에게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중얼거려 보는 것’의 매력과 중요성을 알려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는 말들이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든가 '릴레함메르'라든가, 아니면 제가 종종 중얼거리는 말인 "아오, 빡세!"라든가. 덧붙여 '빡세'를 'baxe'라고 써놓고, '빡세'와는 다른 혀놀림으로 'baxe'라고 발음해 보기를 시도해보고 그 뉘앙스의 차이를 음미해본다든가.
참 쓸데없어 보이는 짓입니다(하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짓만큼 우리가 사심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몰두하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어떤 것,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극복의지를 갖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초조함과 불안과 거부감과 분노를 촉발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상태가 되게 하는지 도대체 표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이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머릿속에 맴도는 그 어떤 것을 '중얼거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억양과 어투로, 그리고 나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매번 다르게 중얼거려 보는 것'. 물론 그것은 여전히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명료한 발화가 아니라 중얼거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조이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조이스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억지 주장을 하지도, 진리에 해당하는 어떤 명제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모호하게,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고 그것을 애써 설명/해명하지 않고 그러한 형태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것들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는 ‘마비’라는 단어를 직접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갈색 눈썹이 달린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서로가 비슷한 것에 고통받고 있고 결박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
<더블린 사람들>을 읽다 발견한, '중얼거림'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꼭 '나직한' 중얼거림은 아니라는 게 함정?!). 여러분은 어떤 단어 혹은 문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곤 하시나요?
나는 그가 이미 외워둔 그 무엇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이 자기 말씨 중 어떤 낱말의 매력에 홀려 같은 궤도를 자꾸만 천천히 빙빙 돌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사실을 단순히 언급할 뿐이라는 투로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이 엿들어서는 안 될 모종의 비밀이라도 얘기해주듯이 신비스러운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 변화를 가하면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에워싸기도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뜻밖의 만남>, 41)
일행이 별실에서 나갈 때 그녀는 그의 의자에 스치듯 살짝 닿자 오, 죄송해요 하고 런던 억양으로 말했다. … 그는 자기 옆을 부딪고 지나치며 죄송해요! 라고 말하던 그 큰 모자를 쓴 여자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67, 169)
그는 아들의 단조로운 억양을 흉내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당에. 성당에 갔다, 이 말씀이지! (<맞수들>,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