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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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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181981일생. 1891928일 사망. <모비 딕>의 저자. 그는 무지 큰 흰 고래가 나오는 좀 이상한, 그리고 쓸데없이 무지 두꺼운 소설을 1851, 그의 나이 만 서른둘에 출간한다.

 

 

멜빌은 <모비 딕>을 쓰기 전에도 많은 소설들을 썼다. 데뷔작인 <타이피>(1846)<오무>(1847), <마디>(1849), <흰 재킷>(1850) . 모두 선원 경험을 토대로 한 모험 소설들이었다. 이렇게 제목과 출간년도를 써놓아도 구해서 볼 길도 딱히 볼 일도 없는 이 소설들은 출간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모비 딕>은 아니었다

 

 

서른셋의 나이에 그는 끝장났다고 느꼈다. 그 자신이 특별한 것이 되리라 믿었던 책은 망했다. 미국과 영국의 평자들의 혹평을 받은 <모비 딕>은 출간 후 18개월 동안 2,300부가 팔렸다. 후속작 <피에르>는 출판된 후 35년 동안 단 2030부가 팔렸고, 평자들의 조롱을 받았다. 죽기 전까지 이 책으로 멜빌이 번 돈은 157달러에 불과했다.

 

그는 돈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돈이란 세계가 작가의 작품에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것일진대, 멜빌은 자신의 의심스러운 어두운 비전을 독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1아마도 <모비 딕> 출간 직후에호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멜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돈은 날 엿먹이고 있고, 악마는 날 비웃고 있어요. 전 지쳐 쓰러지고 말겁니다. 너무 오래 써서 너덜너덜해진 육두구 강판처럼 말입니다. 제가 가장 쓰고 싶은 건 돈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쓸 수가 없어요. 제 작품들은 잡동사니 범벅이고 제 모든 책들은 이리저리 짜깁기한 누더기죠.”  - <빌리 버드 외>, 펭귄판 인트로덕션에서

 

 

생전에 멜빌이 얻은 문학적 명성은 초라했다. <모비 딕> 이후 그의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1857년부터 그는 실질적인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35년 동안, 그는 지방 세관에서 일용직(=일당을 받는 날품팔이)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린다. 독자의 계속된 외면 속에서 그는 독자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하지만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 두지는 않는다. 멜빌은 세관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장편 서사시 <클라렐>을 썼다(난해하고 방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중편 소설 <빌리 버드>의 초고가 발견되었다. 죽기 직전까지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셋의 나이에 끝장났다고 느꼈다라고 했는데, 멜빌의 나이 서른 셋이면 1852년이다. <모비 딕>이 출판되고 1년이 지난 시점인 것이다. <모비 딕>보다 한 해 앞서 출판된 것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였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두 권의 작품이 1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연달아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두 작품이 받은 대우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1804년 생인 호손은 멜빌보다 15살 연상인데, 멜빌은 그를 문학적 스승이자 친구로 생각했다. 호손 역시 상당 기간 동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세관에서 몇 년 간 근무하기도 했지만, 나이 마흔여섯에 출간한 첫 장편소설 <주홍글자>의 출간과 성공 이후 나름 일이 잘 풀린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주홍글자>는 잘 팔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화제작이 되었고, 호손 역시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이다. 1853년 호손은 영국 영사로 임명되어 리버풀에서 4년 간 머물렀으며, 이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멜빌과 호손의 관계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멜빌은 호손을 경애해마지 않았지만 호손은 그만큼의 경애를 멜빌에게 표현했던 것 같지 않다. <빌리 버드 외>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은 이웃이었고 만나기도 했지만 멜빌이 바란 것만큼 자주는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호손은 (유럽으로) 떠나버리고 둘은 편지와 작품(<블라이드데일 로맨스><피에르>)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컨대 멜빌과 호손은 이웃이었지만 돈독한 이웃은 아니었던 듯하다.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땠는지를 알려면 서간집을 보면 될 일이겠지만, 그것까지 구해서 살펴볼 여력은 없다... 해서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호손은 자신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틈나는 대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멜빌을, 자신이 분류하기에 애송이 대중 소설 작가에 지나지 않은 멜빌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부유한 외가 덕택에 (생활은 어려웠으나) 나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좋은 교육을 받은 호손이 보기에 멜빌은 바다와 적도의 섬들에서 제멋대로 굴러 먹다가 그 경험담을 팔아 작가랍시고 설치는 놈쯤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멜빌은 호손의 소설들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고, 호손 소설들이 내뿜는 '다크 포스'에 감동했고, 그런 감동을 호손에게 어필했고, 나아가 호손을 셰익스피어와 비견하기도 하는 등,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어떻게 보면 호들갑을 떨었지만, 호손은 멜빌을 그냥 친구정도로만 생각했지 친한 친구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홍 글자>를 읽고, 또 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보고 <모비 딕>을 써내려가는, “나도 뭔가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에 불타 종이 위에 글씨를 휘갈기는 멜빌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제로 멜빌은 <모비 딕>을 쓰는 동안 셰익스피어를 탐독했으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또 묘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중들이 멜빌에게 기대한 것은 해양모험소설이었다. (그가 이전의 소설들에서 아직 써먹지 않은 소재인) 포경선에서의 생활을 다룬 <모비 딕>은 개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험담과는 다른 기묘한 작품으로 변모했는데, 여기에 평자들과 독자들은 모두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해할만도 한 것이 만약 <삼총사>를 읽는데, 갑자기 검술의 방식과 규칙에 대한 긴 설명이 튀어나오고 그게 또 다시 형이상학적 고찰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십중팔구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책을 펴든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포경과 고래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 길게 이어지는 <모비 딕>은 당대 독자들이 보기에는 처음 몇 챕터를 읽다가 덮어두기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멜빌은 <모비 딕>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상업적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작품을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품을 허투로 썼는지 정말 공들여 썼는지는,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에 작가 스스로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모비 딕>을 외면했고 멜빌은 대중작가로서 자신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220)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라고 멜빌은 <모비 딕>에서 쓰고 있다.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라는 이슈메일의 말은 소설 <모비 딕>이 대중들 앞에서 처할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비 딕>을 두고, 이게 과연 소설인지, 그리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미심쩍어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걸작 <모비 딕>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모비 딕>이 고등학교 과정 필수 도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국의 학생들 대부분은 이 작품을 지겨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결국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멜빌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광기였으리라. <모비 딕>에서 멜빌은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에 기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246)

 

 

오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252)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반문하는 것, 그리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인식하고 증오하는 것, 이것이 멜빌이 죽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흰 고래=모비 딕을 코앞까지 닥쳐온 벽으로 느끼고 그것을 넘어서려는/넘어선다기 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꿰뚫으려는 저 절실한 마음, 곧바로 광기어린 집착과 증오로 이어지는 그 절실함은, 그러나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집착남들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멜빌이 붙들린 것과 유사한 광기에 불들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모비 딕>에 뒤지지 않는 길고 긴 글을 써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절감했고 쉬지 않고 뭔가를 써댐으로써,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자기 식대로 묘사하고 표현하고 또 주장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아니 최소한 견뎌내고자 했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집착남들은 결국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한 미국의 외로운 집착남보다는 동시대인들, 그리고 나아가 후세인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아마도 짐작건대, '덜 외로웠을' 거란 점이다.

 

 

 

오늘날에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많지만 멜빌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소설가나 문학인들은 거의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모비 딕>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약 <모비 딕>은 거대한 괴물 흰 고래를 추적하고 잡는 모험이야기가 아니라, ‘포경과 고래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를 통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훌륭한 고찰이라고 설명한다하더라도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고작 포경수술운운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시도할 것이다.

 

 

끝장났다고 느낀 1852년을 멜빌은 어떻게 보냈을까. 2013년 현재, 1852년의 멜빌과 비슷한 나이이며, 역시 나는/우리는/우리 모두는 끝장났다고 선언하고 싶은 유혹에 자주 시달리는 요즘의 나로서는 그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멜빌이 서른셋에 느꼈을, 그 이후에 점점 자주 느꼈을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멜빌들을 떠올리면 더욱 할 말을 잃게 된다.

 

 

 

<모비 딕>의 비평적, 대중적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장났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 해인 1853, 그는 <필경사 바틀비>라는 비극적이지만 유머로 가득 찬,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꽤 매력적인 중편소설을 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백오십 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재조명된다. 1857년, 마침내 그는 모든 대외적인 글쓰기 활동을 포기하고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포기한 이후에도 그는 35년을 더 살았고 혼자서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내게 멜빌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인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장나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도 생의 말년 35년 동안을 무명작가로 산 사람으로,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담담히 살아간 사람'으로서 더 각별해졌다. 멜빌이 몸소 실행하고 보여준 '종말 이후의 삶과 글쓰기'를, 종말론적 서사와 공멸의 상상력이 널리 퍼진 이 시대에 어찌 각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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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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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라도,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우연한 기회에 <우체국>을 읽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한 마디 내뱉지 않을까 싶습니다.

 

쩔어!”

 

(앞에다 요즘 학생들이 강조를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속어를 한 마디 덧붙이면 부코스키가 좀 더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쩔어!”라는 짧은 독후감상은 여러 모로 적절한 감상인 듯합니다.

 

일단 <우체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으로 보이는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굉장히 쩌는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쩐다'라는 표현은 일단 매력적이다, 멋지다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부코스키는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도 있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독자라도 쩔어!’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저속함을 한없이 노골적이고 뻔뻔한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헨리 치나스키란 인물은 여느 소설에서 흔히 마주치기 힘든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항상 요즘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쩔어 지내는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세 가지에 대해 그렇습니다. 여자, , 경마. 아차, 한 가지를 빼먹을 뻔했네요. 그건 바로 ’입니.

 

여기 한 편의 저속한 소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읽은 게 과연 소설인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딴 게 소설이라고!”라는 반응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소설이라면 개나 소나 다 쓰겠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찰스 부코스키의 매력을 아주 잘 드러내는, 왜 그가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들 거느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좌우명(정확하게는 묘비명이지만 좌우명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노력하지 마라인 사람도 썼으니 말입니다. 소설의 이론을 섭렵하지 않아도, 오늘날 인기 있는, 혹은 주목 받는 소설들을 훑어보고 참조하지 않아도, 글쓰기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오로지 여자, , 경마뿐인 부코스키라는 작자도 썼는데요 뭘. 그러니까 부코스키가 소설 마지막에 적고 있듯, 어느 날 문득, 아침이 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식했다면, 그리고 때마침 아마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쓸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아도, 마라톤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반드시 몇 매 이상의 글을 쓴다는 프로 작가적 마인드가 없어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인권 감수성에 대한 개념은 개를 줬어도, 현실에 대한, 소외 받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없어도, (욕은 좀 먹겠지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혹은 뻔뻔하게) 쓰면 되는 겁니다. 뭐랄까, 안심이 되고 조금쯤 자신감도 생깁니다. 어쩌면 어쭙잖은 힐링 효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소설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를 읽었습니다. 여성 잡지에 실린 싸구려 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 돈과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읽어버리고 만 지금도 헷갈리는 것도, 고백건대, 사실입니다.

 

의의를 부여해보죠.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현대의 물질·기계문명에 대한 반항과 비판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그리스인 조르바1950년대 미국의 비트(Beat) 제너레이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6-70년대 히피 세대의 감성이런저런 사회운동들성혁명 또는 성해방비타협적 정신일체의 권위에 대한 저항80년대 한국에서 시도된 민중문학 노동자문학…… . 그만 두겠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7-8.

 

한 작가를 가로지르는 종횡의 맥락, 역사적·장소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작업에 의의를 부여하고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작가와 그의 작품을 어떤 한계 속에, 안전장치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책장에 가둬버리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자면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일입니다.

 

 

문학은, 읽고 쓴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해로운 것입니다. 진지한 독서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어설프게 읽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장치입니다. 책에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줄 안전장치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곧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책'이라... <우체국>에 적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생 동안, 우리를 보호해줄 안전장치를 보장 받자면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해치지 않아요.”)이 되어야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합니.

 

존스톤 씨는 우체국에 30년이나 근무했어!”

그게 대체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말했잖아, 존스톤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15)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들 모두 한 번 정도는 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G.G.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54)

 

, 그럼 이제 여러분은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안전장치가 생기는 겁니다.”

안전장치라니? 감옥에 가도 안전장치는 있다. 27제곱미터 넓이의 공간을 쓰면서 집세나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득세도 없고 양육비도 낼 필요 없다. 자동차 번호판 요금도 내지 않고 교통 범칙금도 내지 않고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지도 않는다. 의료 진료는 무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동료애도 쌓고. 교회도 다니고. 호모들도 만나고. 죽으면 장례도 공짜. (83)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란 곧 무해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게 ‘훌륭한 직업=안전장치라는 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따르자면, 훌륭한 직업을 갖고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로 설정될 법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치나스키는 안전장치는 감옥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만도 한 것이 평생보장 안전장치를 갖게 되는 대신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치나스키의 우체국 시절 동료 G.G.는 자신이 집배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랫동안 봉사에 헌신해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G.G.20대부터 60대 후반까지 일했지만, 결국에 남는 건 일에 대한 혐오’밖에 없습니. G.G.를 보며 헨리 치나스키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어느 날 갑자기 멈춰 버린 낡은 차를 떠올립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 멋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예 똥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53)” 똥덩어리라니, 치나스키 이 사람, 이거... 남의 삶을 너무 함부로, 과장해서, 단정해서 말하는 건 아닐까요?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난 못 버틸 거야.” 지미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녹아 버리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 특히 엉덩이와 배가 비대해졌다. 줄곧 스툴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같은 동작과 걸음걸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됐다. 어지럼증이 생기고 팔, , 가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일하려면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종일 잠만 잤다. 주말에는 일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 팔만 움직일 뿐이니까. (219-220)

 

그래요,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치나스키에 따르면, 일은 사람을 갉아먹고 흐늘흐늘 녹아내리게 만듭니다. 일은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저녁인지 점심인지 먹은 후(열두 시간씩 근무를 한 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말했다.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안 돼, 행크. 우리는 보여 줘야만 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고…….” // 텍사스 시골 촌년이 할 만한 말이었다. // 나는 포기해 버렸다. (93)

 

공정을 기하기 위해, 치나스키의 근무 조건과 일의 특성을 잘 분석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밤에, 12시간(+3H)을 근무합니다. 배달 업무든 우편 사무든, 쉴 틈이 거의 없는심지어 식사할 시간도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애가 싹틀 여지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감시하거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면서 때로 은밀한 쾌감도 느끼지만, 결국은 다 같이 녹아내립니다. 보다 높은 효율성과 정확성을 위해 배달 구역 구분표를 외우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택배 업무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다면 모든 직업에 대해 일반화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치나스키가 스펙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체국'에 취직하기 전, 헨리 치나스키는 직장을 백 개는 넘게 거친’ ‘떠돌이 막일꾼(=팩토텀)’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11년 동안이나 우체국에 붙어 있었던 건 그나마 우체국 일이 쉬운 편에 속한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좀 예민한 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아프고 환각에 들뜬 채 숙취에 찌든 몸(19)” 상태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미친 사람들—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미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어디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든 간에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늦게 왔네요?”

매일 오는 집배원 아저씨는 어디 있우?”

안녕, 우체부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이거 여기 오는 우편물 아니에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좋은 집에서 살았고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뭘 하면 그렇게 먹고 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기 우편함에 편지를 넣지 못 하게 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차도에 서서 내가 오는 것을 두세 블록 전부터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순로를 배달해 본 적이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가 누군데?”

그들도 다들 목소리가 똑같았다. (38-39)

 

 

치나스키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미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분표를 외운답시고 모든 걸 섹스와 나이에 연관시켜외우는 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죠.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의사는 종이를 돌려준다. ‘이런 걸 외우고 싶지 않다는 게 미친 건 아니죠. 외려 이걸 외우고 싶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 겁니다. 상담료는 25달러입니다.’ (132)

 

실제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가 분석이라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치나스키가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나스키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발언은 되는 대로 살아온 인생’ ‘존재 자체가 잉여인 처지에 대한 (어디까지나 자기입장에서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대로 <우체국>에서 뭔가 교훈에 해당하는 걸 끄집어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해설을 참조하면 반복적 노동에 대한 혐오’,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빌어먹을. 귀에 닳도록 들어온 소리. 들을 때마다 한 귀로 흘러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간 소리.

 

여기서 한 가지. 치나스키가 ○○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혁명가도 노동운동가도 아닙니다. 그는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은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을 비판하거나 제도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욕을 실컷 해주거나 무단결근을 하거나 아예 회사를 그만둬버립니다. 앗차, 사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노동 조건이나 관료주의에 물든 사회 분위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방식혼자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방식이어서는 누구라도 편들어주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치나스키는 이런 저런 주의운동에 대해 경멸어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합니다. ‘작가 워크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그 자신 작가이면서도). 중요한 점은 부코스키는 신념에 차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많은 문학종사자들처럼) 글쓰기 자체를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의 글쓰기에는 어떤 것이든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건 술과 섹스 때문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작가의 모습입니다. 그의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주변부의 잉여로서 그는 그저 혼자서 마냥 쩔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요즘 소설들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연대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자기반성도, 어떠한 종류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게, 언제나 변함없이 술과, 여자와, 경마에 쩔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그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여자들에게 한 눈을 파는데, 가만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럼 애 아빠는?”

로이랑은 이혼했어. 쓸모 하나 없는 개새끼. 빈둥빈둥 놀면서 술이나 마시고 경마밖에 안 했지.”

저런.” (151)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192)

 

저런이라고 치나스키가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뻔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예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라고 뭔가 심금을 울릴 듯한 표현을 써놨지만, 잠시 후 그는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간호사에게 한 눈을 팝니다....... ‘저런!’

 

부코스키의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생활글쓰기에 가깝습니다. 사생활의 단면들과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생활글쓰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코스키 식 글쓰기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있어 보이려고노력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문학이나 소설에 걸맞은 글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원래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잉여적인 것이라지만, 부코스키의 글은 문학중에서도 잉여에 속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기분이 잘 안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통쾌함도 느낍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코스키가 자신의 시선을 사회로 돌리지 않고, 어떤 (작가라면 모름지기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공평무사한 시선,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생활과 관심사에 집중된 시선이고(그 관심사란 건 앞서 말했다시피 여자(섹스), 술, 경마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된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한계가 뚜렷한, 협소하고 편향된 시선입니다. 부코스키는 뭔가 의미 있는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글을 좋은 글이라고 말해줄 것을 바라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치부를 건드리고 거기에 뼈아픈 일침을 가하기 위해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글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드러내 놓은 것들조차 딱히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뻔뻔하게 쓰고 자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묘한 통쾌함과 안도감을 줍니다.

 

이러한 통쾌함과 안도감이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통쾌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뭔가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규정에는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라는 일종의 '의미에 대한 강박'이 스며든 것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부코스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어나가든, 뭔가 새로운 것으로 잇든 간에 말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뭐가 됐든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것 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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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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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에게 가망이 없었다. 세 번째 졸도였기 때문이다. 매일 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때가 방학 때였다) 촛불이 밝혀진 정방형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면 밤마다 나는 그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죽는다면 어둠에 싸인 블라인드에 촛불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전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두 개의 촛불을 켜놓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가끔 '나는 오래 살지 못할까 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질없는 소리려니 생각하고 흘려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적중하고 만 것이다. 매일 밤 나는 창문을 응시하면서 마비(paralyisis)라는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은 언제나 내 귀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경절형(gnomen)이라는 말과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성직 매매죄(simony)라는 말처럼 생소하게만 들렸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나에게 그 말이 어떤 나쁜 짓을 일삼는 죄받을 존재의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그 말에 오히려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이 저지르는 끔직한 소행을 눈여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제임스 조이스, <자매>, <<더블린 사람들>>

 

<자매>는 <<더블린 사람들>>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위의 인용은 <자매>의 첫머리. 그러니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문단인 셈. 제임스 조이스는 무엇보다 <율리시스>의 작가로 유명합니다만, 조이스를 <율리시스>로 처음 접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분량이나 난이도가 모두 '최상급'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입니다(생각의나무에서 펴낸 번역본은 들고 다니면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판형이 크고 두껍습니다. 그래도 나름 '산책'에 관한 소설인데 산책 중에 읽을 수 없다니!!). 이래저래 독자들은 <더블린 사람들>(혹은 그 이름도 유명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조이스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된 문단은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조이스]인 셈입니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 여기저기에 떡밥(수수께끼)을 뿌려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떡밥 뿌리기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었던지 자신의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두고 "앞으로 반 세기가 지나도 문학연구자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지 못해 쩔쩔맬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후기의 일이고 작품 활동 초기에는 나름 친절함(?)이랄까,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랄까,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면모를 바로 위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촛불' 묘사는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합니다. 위 인용에서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이라는 묘사는 '죽음-마비-혼수상태'에 대한 탁월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며, 작품의 지배적 심상을 이룹니다. 죽음-마비-혼수상태는 조이스가 파악한 바, 당시 아일랜드의 정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은 빛이지만 주위를 온통 환하게 밝혀주거나 어떤 대상을 밝게 비춰주는 빛이 아니라, 단지 창문가에 어른거리고 깜박이는, 희미하고 뿌연 '촛불'의 빛을 통해 그러한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촛불'에 상응하는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젊은이가 인파를 뚫고 걸어갈 때, 콜리는 이따금 몸을 돌려 지나가는 처녀들에게 미소를 던졌지만 이중의 달무리에 둘러싸인 희미한 보름달에 고정된 레너헌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이 달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두 멋쟁이>, 92)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즐겁다 싶을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불안한 내색 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니 지난날의 기억들이 점점 미래의 희망과 비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망과 비전은 너무나 복잡하게 뒤얽혀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 하얀 베개도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숙집>, 120)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뒤덮고 있었다. 잔광은 또 너저분한 보모들과 벤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쇠한 늙은이들에게 온화한 황금빛 먼지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잔광은 말하자면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예를 들면 자갈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드리워져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리되듯이) 그는 슬퍼졌다. 그리하여 그는 잔잔한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구름>, 126)

인용문들을 잘 읽어보셨나요? 읽어보면 '촛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 복잡하게 뒤얽힌 나머지 인물의 시선이 고정된 사물조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희망과 비전,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위에 드리워진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 등이 바로 '촛불의 빛'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촛불의 빛은, 불안, 환멸, 우울감, 부질없음, 무기력, 마비 상태와 연관이 됩니다.

 

'마비'는 조이스 연구자들이 작품 해석의 키워드로 꼽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신적) 마비'니, '죽음'이니, '혼수상태'라고 해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아일랜드가 겪어온 식민의 역사라든가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쓴) 1910년대 아일랜드의 사회상, 대영제국이라는 체제 내에서 아일랜드-더블린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위 내지 입지와 결부시키면 언뜻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부에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이스-아일랜드-식민의 역사-변방성]. 이런 연결 고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소설 읽기를 재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조이스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고도의 상징을, '복잡하게 뒤얽힌' 해석 과정 없이,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힌트는 <자매>의 첫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힌트는 단순합니다. 뭔고 하면, 소설 속의 어린 화자를 따라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맥락도 없이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를 때가, 또한 그 단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발음해보고 싶을 때가, 그래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특정한 방식을 찾을 때까지) 실제로 여러 번 반복해서 중얼거려 볼 때가 있습니다. <자매>의 어린 화자에게 그것은 '마비' 즉 '퍼랠리시스'라는 단어였죠. 아마도 어린 화자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용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그 단어 자체의 '발음'에, 또는 발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을 단어 자체의 '생김새'에 매력을 느낀 것이겠죠. 어쩌면 죽어서 누워 있는 플린 신부에게 배운 단어일 수도 있겠네요.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이스가 아무 '맥락 없이' 떨궈놓은 이 '마비'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또 가로지르는 나름의 맥락을 독자 입장에서 추측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블린 사람들>을 읽는 재미라는.

 

어떻게 생각하면 조이스는 우리에게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중얼거려 보는 것’의 매력과 중요성을 알려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는 말들이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든가 '릴레함메르'라든가, 아니면 제가 종종 중얼거리는 말인 "아오, 빡세!"라든가. 덧붙여 '빡세'를 'baxe'라고 써놓고, '빡세'와는 다른 혀놀림으로 'baxe'라고 발음해 보기를 시도해보고 그 뉘앙스의 차이를 음미해본다든가.

 

참 쓸데없어 보이는 짓입니다(하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짓만큼 우리가 사심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몰두하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어떤 것,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극복의지를 갖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초조함과 불안과 거부감과 분노를 촉발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상태가 되게 하는지 도대체 표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이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머릿속에 맴도는 그 어떤 것을 '중얼거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억양과 어투로, 그리고 나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매번 다르게 중얼거려 보는 것'. 물론 그것은 여전히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명료한 발화가 아니라 중얼거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조이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조이스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억지 주장을 하지도, 진리에 해당하는 어떤 명제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모호하게,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고 그것을 애써 설명/해명하지 않고 그러한 형태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것들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는 ‘마비’라는 단어를 직접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갈색 눈썹이 달린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서로가 비슷한 것에 고통받고 있고 결박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

<더블린 사람들>을 읽다 발견한, '중얼거림'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꼭 '나직한' 중얼거림은 아니라는 게 함정?!). 여러분은 어떤 단어 혹은 문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곤 하시나요?

 

나는 그가 이미 외워둔 그 무엇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이 자기 말씨 중 어떤 낱말의 매력에 홀려 같은 궤도를 자꾸만 천천히 빙빙 돌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사실을 단순히 언급할 뿐이라는 투로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이 엿들어서는 안 될 모종의 비밀이라도 얘기해주듯이 신비스러운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 변화를 가하면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에워싸기도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뜻밖의 만남>, 41)

 

 

일행이 별실에서 나갈 때 그녀는 그의 의자에 스치듯 살짝 닿자 오, 죄송해요 하고 런던 억양으로 말했다. … 그는 자기 옆을 부딪고 지나치며 죄송해요! 라고 말하던 그 큰 모자를 쓴 여자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67, 169)

 

 

그는 아들의 단조로운 억양을 흉내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당에. 성당에 갔다, 이 말씀이지! (<맞수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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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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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소설)들을 읽다보면, 문득 짜증이 치밀 때가 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우연의 개입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대목이 그렇다. 예를 들자면 사고무친에 굶어죽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착한 신사가 나타나 돕는다든가 하는 설정 같은 것(디킨스 씨 죄송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런 우연(행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비현실적 우연, 죽이는 타이밍, 사람 냄새 안 나는 천사 캐릭터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계속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기도 하다. 선한/순수한/근면성실한 주인공이 맥없이 죽어버린다면, 큰일이다. 세상이 그렇게 미쳐 돌아간다면 누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설의 초반부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미덕을 지녔는지, 닥치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미덕을 어떻게 꿋꿋이 지켜내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미덕이 나름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지를 자못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정당한 대가라는 당위가 앞서다 보니, 어느 정도의 우연은 용서가 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이러한 소설 구성의 암묵적 공식을 무참히 깨는 소설이다.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환경적 요인과 우연한 사고 앞에서 순식간에(또는 서서히) 빛이 바랜다. 충격적인 점은 주인공이 내적 깨달음을 얻거나 자기반성을 하기도 하고, 숱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심지어 천사 캐릭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정된 몰락과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밀물 때의 파도가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하지만 서서히 해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몰락은 필연적이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세상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 오직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된삶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의지도 수단도 신념도 없기에 그저 죽음을 조금씩 연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된파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빅토르 위고마저 졸라가 노동자들의 비참하고 비천한 삶의 흉측한 상처를 제멋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며 유감을 표명했을까.

 

타락과 몰락의 과정을, 그 비참함을 묘사함에 있어 <목로주점>은 갈 데까지 간다. 때문에, 문득 짜증이 치민다거나 하진 않는다. 디킨스 류의 소설에 지친 독자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소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디킨스 류의 소설이 그리워진 달까. 짜증을 냈던 스스로의 오만을 돌이켜보게 된달까.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우연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연과 환상에 의한 희망은 거짓 희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거짓 희망이 만연한 사회일까요, 아직은 진짜 희망이 존재하는 사회일까.

 

잘 팔리는 소설이나 시청률 높은 드라마(또는 예능 프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경우가 잦았다면 그 역시 어떤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과 환상의 도움이 없이는 희망을 구성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지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늘날 우리 대다수의 실제 삶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치미는 짜증을(혹은 분노를) 감내해가면서, 말도 안 되는 우연과 개드립들을 용서해가면서 책과 드라마에, 예능 프로에 하염없이빠져든 경험이 있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많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스로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 중에 바닥을 친다는 표현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매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바닥을 치고다시 올라간다는 위로 내지 자기 위안의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다. 하지만 <목로주점>은 그러한 위로가 기만임을, 바닥 밑에 또 다른 바닥이, 끝 모를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한 마음으로도 굳센 의지로도 근면 성실로도 이 바닥/심연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기억할 점은 에밀 졸라의 이야기는 <목로주점>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스무 권에 달하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거대한 별자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목로주점>에 이어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자손들이 등장하는) <나나> <작품> <제르미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제르미날>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제르미날>,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하여 민중-노동자들의 비난을 받은 <목로주점>과 달리, 민중-노동자들의 진심어린 환호를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목로주점>에서 가까스로의 삶의 밑바닥을 보여준 졸라가 <제르미날>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만적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구성해냈을지가 궁금하다. 읽을 만한 번역본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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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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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리 오가이(1862-1922)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굵직한' 작가다. 그런데 ‘근대문학’에서 ‘근대’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아베 일족>과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스러운 표현과 구성이 그렇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없고 내면 묘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점은 현대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이건 근대소설이라기보다 '역사 소품'에 더 가까운 작품이 아닌가?

 

<아베 일족>은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위와 녹봉, 그리고 명예율에 따라 질서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세계는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넘쳐나는 인력과 에너지를 발산할 외부-바깥이 없으므로, (잉여)인력은 (잉여인력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되며, 에너지는 내부를, 내부 구성원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은 명예(체면)라는 가치로 수렴되고 숭고함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 그 절차가 중요하다.

 

주군이 죽으면 따라죽는 ‘순사’라는 죽음의 형식에는 현실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순사는 구세력와 신세력 간의 권력다툼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노인을 부양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또한 집안의 자손에게 지위와 녹봉이 고스란히 상속된다는 점에서 보면, 순사는 상속 제도이자 일종의 ‘생명보험’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한 폐쇄적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통제된다.

 

그러나 아무리 폐쇄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틈은 생기게 마련이다. 이 틈을 우리는 ‘개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아베 일족>에서 ‘개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서술한다. 일견, 위계질서가 확고하고 그에 따라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 및 각자가 행해야할 행동이 명확히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성’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순사’라는 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억압이자 폭력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도 ‘순사’ 자체의 대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사회 질서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틈은 발생한다.

 

틈이 발생할 여지는 ‘(할복)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과 거기에 뒤따르는 가치인 ‘명예(체면)’에 내재해 있다. 이로부터 개인성이 싹튼다. 왜냐면 명예는 사회적인 가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족의 수장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일단 사회적으로(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없게 되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를 추구한다. 그의 아들 곤베에 역시 사회적 차원에서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느끼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회복을 노리고 상투를 잘라 선대 주군의 위패 앞에 바치는 돌출 행동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사회에 맞서 자기 자신을—개인성을—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군 다다토시의 ‘심정 묘사’다.

  

… 다다토시의 마음속에는 후계자인 아들 미쓰히사를 위해서 그들이 살아남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또 이런 사람들을 자신을 따라 죽게 하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허락한다”는 말을 한 것은,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22)

여기서 주군 다다토시는 ‘순사’라는 개념을 개인들 각각의 죽음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죽음에 대해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그 자신, 죽음을 앞둔 상태이기도 하다). 순사는 일종의 사회 제도지만 그것이 구축되는 데 일조한 건 수많은 개인의 죽음들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 역시 사회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을 지닌다. 물론 죽음이란 결국에는 당사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고 겪어야하는 사태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 또한 (용산, 쌍용차의 경우에서 보듯) 죽음을 둘러싸고 상징 투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다른 한편 주목할 점은 모든 죽음 중에서도 자살에는 개인의 선택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할복은 겉보기에는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아베 일족>에서 묘사되는 할복의 구체적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결정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동시에 확실히 죽이기 위해—뒤에서 할복자의 목을 베는, 뒷마무리담당 무사인 것이다. 요컨대 할복이란 개인의 의지와 사회적 요구가 이상적으로 합치된 죽음의 형식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베 야이치에몬의 할복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그 스스로 배를 가르고 목을 베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누가 봐도 순사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순사를 허락받지 못했다. 왜 그만 다른 대우를 받은 걸까. 이에 대해 모리 오가이는 다음과 같이 암시를 남기고 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30-31)

다다토시는 아베 야이치에몬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복무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하는,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30) 예외적 개인이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의 한 특징이 ‘개인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베 일족>은, 모리 오가이가 옛 역사 이야기에서 개인성이 발현된 사례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베 일족>은 개인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극히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독자는 작가의 암시를 쉽게 눈치챌 수 없다. 더군다나 등장인물 누구도 (예외적 개인이긴 할지언정) 영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개 역사 속 인물들이 소설에 등장할 때면 초인적인 영웅이거나 온갖 미덕을 다 갖춘 성인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모리 오가이의 독보적인 성취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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