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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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역시 그 여행 중의 일이었는데, 대양을 횡단하는 동안, 매일 똑같은 밤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는 밤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중앙 갑판의 큰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 퍼졌다. 그 곡은 그녀가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알고 있던 곡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그 곡을 배우려 애썼지만 한 번도 정확하게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어머니도 그녀가 피아노 치기를 포기하는 것을 승낙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밤과 밤 사이에 흐릿해져 버린 그날 밤에 대해, 갑자기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 배 위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133-134.


 
소설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쇼팽의 왈츠를 찾아서 들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이제서야--두어 달이 지나서야 실행에 옮기게 됐다. 나는 쇼팽을 그닥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피레스가 연주한 이 왈츠곡들은 생각보다 좋다. 꽤 좋다.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쇼팽을 좋아하게 될 거 같진 않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쇼팽을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좋아질 듯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는 쇼팽과는 별개의 이야기로, 나는 <연인>의 위 대목이 꽤 신경 쓰인다. 오역인 듯 오역 아닌 오역 같은 한 문장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 문장을, 화자가 예전 소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훗날 대양 횡단 여행 중에 쇼팽의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된 시점에, 그때 그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라는 식으로 읽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쓰여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란 또 무슨 말일까?


오역일까? 사실 이 소설엔 오역이나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과 문장이 꽤 있는 편이이서('남동생'을 '둘째 오빠'라고 번역해 놓은 게 대표적) 그냥 오역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가능하다면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다. 프랑스어를 좀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프랑스어를 못한다.


오역이 아닐 거라고, 복잡한 문장 구조와 (번역이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의 단어와 표현들로 쓰여진 원문을 번역자가 최대한 정확히 번역하려 노력한 것이라고 믿어 보자.


좀 애매모호한 대목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다('이런'이 뭘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을 통째로 빼고 문장을 재구성해보면,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가 된다. 문장 구조가 좀 단순해졌다. 그렇다면 해석이 잘 안 되는 부분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부분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뭔가 미묘하고 혼란스럽다. 일반적으로는 "훗날 나는 쇼팽의 음악을 듣고 당시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알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쓸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썼다. 나는 '익숙한' 언어 습관에 따라 위 문장을 오독한 셈이다.


소설의 화자는 소녀 시절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에 값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게 사랑에 값하는 어떤 감정이었기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어린 시절 콜랑의 남자와 했던 경험을 '사랑'으로 자리매김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정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대개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사랑으로 미화하고 넘어가거나 뿌연 안개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위 문장은 꽤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화자의 정직함이 돋보인다. 내 감정은 내 거니까 내 맘대로 처리하고 내 맘대로 의미를 (대충 좋은 쪽으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아니면 굳이 정확히 정리하려고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상처를 들쑤시지 않기 위해 과거를 윤색(또는 망각)하는 이런 태도가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의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날것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때로, '현재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치열함을, 심적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하고 정확하고 무사공평한 분석이 반드시 미덕인 것은 아니라고, 요즘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연인>을 쓸 무렵, 70세의 뒤라스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녀 시절 중국인 남자와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히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의 그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건 사랑이었어." "아니 그건 사랑과는 다른 무엇이었어."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대신, 거짓이 섞인 확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유하는 대신,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쓴다. 이 문장이 오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말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쇼팽의 왈츠가 들리는 그 순간 불현듯, 사랑인듯 사랑아닌 사랑 같은 그 감정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번역에 대한 불만을 들을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색함이 남는 직역보다는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의역을 선호한다. 번역자를 두고서, 이 사람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도 자주 듣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해서 '번역을 참 잘했군!'하고 칭찬만 할 일은 아니닐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대가로 희생되고 삭제되는 요소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은 복잡한 문장을 필요로 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표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역자나 편집자가 깔끔하고 명확하게 다듬어 버리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깃든 중요한 뭔가를 놓쳐버리는 셈이다. [...]


일단은 이렇게 써둔다. 나중에 위 문장이 엉터리 오역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럼 좀 민망할 것 같기는 하다. 이런 글은 어쨌든 원문을 확인하고 나서 써야 하는 글인데, 확인도 하지 않고 불확실한 사실들을 가지고 제멋대로 추측해서 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의 힘이란 고작 우리의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는 것일 테고 우리 능력이란 기껏해야 우리의 수단들을 저울질하는 정도인 것이다."(장 그르니에, <담배>, <<일상적인 삶>>)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 노력해봤으니, 달리 말해 (프랑스어를 모르고 원문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약점을 약점으로 남겨둔 덕분에 저 인용 대목을 여러 모로 곱씹어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0125

막독13기 레이디 / 첫 번째 책  

 

*

영화 <연인>(1992)에서도 저 장면을 다뤘고, bgm으로 쇼팽의 왈츠를 쓰고 있는데, 이때 쓰이는 곡은 왈츠 10-2번 / 작품번호 69-2번(Op.69 No. 2 in B minor) 라고 한다. 위 영상에서는 35:16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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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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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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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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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8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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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군 2015-10-08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어떤 글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덧글 남깁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남동생`과 `작은 오빠`를 같은 표현으로 쓰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영문판에는 younger brother라고 되어 있다지만, 그 영역이 오역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남동생`이라고 100%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아 이게 자전적 소설이었지`라는 생각에 연보를 보니, 뒤라스는 `2남 1녀의 막내`였군요. 이 전기적 사실을 소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영문 번역이 오역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고보니 영어도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younger brother가 남동생과 작은 오빠 둘 다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군요...
 
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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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 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
우리 집에는 잔치도, 크리스마스트리도, 수놓은 손수건도, 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묘지도,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다. 오직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69; 71면.

 

*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로 유명한 <연인>을 읽었다. 내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소녀와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자전적 소설이니 이 모녀 관계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불행에 빠진 여인(lady in distress)'은 여러 19세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진부한 모티브인데, 이를 참고하자면, 20세기 소설의 흔한 모티프로 '불행에 빠진 엄마(mother in distress)'를 제시할 수 있을 듯도 하다.

 

* 작가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나 자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행에 빠진 엄마'를 가진 이, 그러한 엄마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며 자란 사람은 사회의 한 편에 비켜서서 사회를 증오하는 사회부적응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 집단성을 거부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은 듯하다. 

 

 

 

 

이 모든 것(가족들 사이의 폭력, 증오)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첫 번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의 연인들이다. 근무지 밖에서 만날 때, 처음엔 사이공 거리에서, 다음에는 정기 여객선에서, 기차에서, 그 후에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는 속내 이야기를 무한정 풀어 놓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75면.

 

* '고백' 역시 흥미로운 키워드이다. <인간 짐승>의 여주인공 세브린은 고백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인에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불행의 씨앗이 된다. 한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도 두 연인이 각자 자기의 속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속내를 풀어놓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소설에 비추어 어떤 교훈을 얻기란 어렵다. 아, 세상만사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남을 뿐.   

 

 

 

베티 페르낭데즈
나는 그녀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그녀를 잊기엔 너무 때가 늦었다. 아무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 상황도, 시대도, 추위도, 배고픔도, 독일의 패배도, 죄악의 폭로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 그녀는 아주 낡고 초라한 유럽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루 가죽 조각이나, 낡은 구식 양복, 오래된 커튼감, 낡은 바탕천, 낡은 옷감 조각, 낡은 고급 기성복 누더기, 또는 좀먹은 여우 털, 오래된 수달피를 걸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찢기고, 추위에 떨고, 오열하는, 유배당한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그래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헐렁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생김생김으로... 인하여, 그녀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라몽 페르낭데즈
라몽 페르낭데즈는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완전히 잊혀서 그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지식이었다. 그는 정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견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발자크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인 양, 자신이 발자크가 되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라몽 페르낭데즈는 지식에서까지도 숭고한 고상함을 지니고 있었고, 본질적이고도 확실한 방식으로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의 의무나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대독일 협력자 & 공산당 당원
페르낭데즈 부부는 대독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일, 똑같은 연민, 똑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같은 미신이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82-84면. 

 

<연인>의 중반에는 좀 뜬금없는 대목이 있다. 화자가 ‘(독일 점령 하의) 파리 시절’(자전적 소설임을 고려하면 뒤라스가 작가로서 막 명함을 내민 시기다)을 회고하며, 당시 교제하고 지냈던 두 명의 여인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인데, 이 대목은 줄거리 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종의 군더더기다. (이 대목을 기준으로 작품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라스가 묘사하는 두 레이디의 우아함과 고상함은 그 자체로 독자의 눈길을 끈다. 위 인용은 베티 페르낭데즈에 대한 묘사인데, 뒤이어 그녀의 남편인 라몬 페르낭데즈의 고상함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들이 '대독일 협력자'였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뒤라스 본인이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한 인간의 됨됨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매력은 그 사람이 견지하는 정치적 신념과 별개일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발자크를 언급하는 센스.) 그렇다고 정치나 사회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개인적 미덕만을 앞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 화자는 베티 페르낭데즈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화자는 베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끔찍한 것들을 뒤로한 채 길을 걷는다. 상처를 완벽히 극복할 수 없다면, 관건은 상처나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우아하게 걷는 법을 터득하는 것, 혹은 다른 것들은 뒤로한 채(외면한 채) 우아함만을 기억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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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34
찰스 디킨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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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억압자 혹은 피억압자이던 사람들은 혁명의 순간에 제 위치를 어떻게 의식하며 또 어떤 행태를 보이는가, 위기의 순간에 우애나 애정은 어떻게 변하고 또 어떻게 지켜지는가, 인간의 미덕과 사악함은 어떤 상황에서 발휘되는가, 삶의 가치란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가로서, 또 중년 남자로서, 여러모로 ‘격변’과 ‘위기’에 처한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위기에 처한 개개인이 어떻게 하면 가치있게,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위기를 성찰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디킨스의 작품 중 가장 ‘종교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수함 때문이 아닐까.”


역자 성은애의 한 마디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미 지난 7월에 나왔네요). 기존의 펭귄클래식 번역도 괜찮았습니다만, 이번 번역본은 창비에서 나온 것이라 기대를 품어봄직합니다. 일단 '역자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오네요.

 

 

"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두고 '역사적 격변의 순간'이자 '위기의 순간'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굳이 세계적인 석학들의 진단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격변'이니 '위기'니 하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도 많을 줄로 압니다. (일단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이 위기의 연속입니다.) 

 

이런 시대에 나는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이딴 식으로 생겨먹은 세계에서의 삶이 전적으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가치는 과연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뭐 이런 문제에 대해 디킨스가 무슨 뾰족한 답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답을 준다하더라도 그 자신만의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그가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택의 문제, 삶의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 것, 역사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제가 쓴 것이지만)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역사-시대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별로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디킨스의 주인공들은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에 합당한 그런 선택들을 하지만... 그러니까 소설이겠죠.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망을 전적으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착취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서 '가차 없는 착취자'로 존재한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고 또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짐짓 모른 척 승인하고 있다, 아니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승인할 수밖에 없다, 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해소불가능한 모순, 치유불가능한 모순을 상처처럼 우리 양심에 새겨 넣은 채, '병리학적 주체'로서 우리는 이 가혹한 역사의 흐름을, '네 이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착취하라'는 게 절대명제로 자리한 이 세계를 가까스로 하루 하루 버텨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뭐...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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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위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ephigraph)이다. 서너 차례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는데, 그렇게 읽고 난 한참 후에서야 책의 맨 앞머리에 위의 제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출처는 <로마서>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서 구절의 출처는 <신명기>(32장 35절)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를 펭귄클래식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민음사판에서는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인데 별 차이는 없다. 문학동네판 번역과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내가 갚아주겠다'와 '내가 갚으리라'의 차이.

 

('복수는 나의 것'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때문에 가장 친숙한 문구여서 즉각 와닿는 데가 있다. 해서, 이 글의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라 붙여보았다.)


읽었을 때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가 갚아주겠다'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신과 같은 절대자가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복수심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복수심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자기 자신의 가장 어둡고 교활한 면을, '내 안의 괴물(!)'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결국 복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내가 갚겠다'는 태도로 나서다가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이다. 한편 또 다른 복수 3부작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Lady Vengeance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가문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무슈'의 대사다. 조상신들로부터 호출을 받고 소환된 '무슈'는 이렇게 말한다. Anybody's who's foolish enough to threaten our family, vengeance will be mine! 마지막 말을 해석하면, 곧 "복수는 나의 것!"이다.


Vengeance will be MINE...!!! GRRRRRRR......!!!


그런가 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복수심에 시달리는, 아니 단순히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복수심의 충족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건 한 사내의 마음 상태를 잘 묘사한 바 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복수를 완벽하게 마치고 귀가했다."
-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 93.


 

 

 

 

 

 

 

 

 

 

복수심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복수심 같은 것과는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마음 속에 찾아들어온다. 뿌리를 내리고 급속도로 자라난다.


<안나 카레니나>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같은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복수심이야 말로 무기력한 상태, 불활성의 상태에 반대되는,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게 해주는 어떤 '활력', 또는 '인간 의지'의 원천이 아닌가? '평정심'을 추구하는 레빈의 모습은 별반 매력이 없고 뭔가 현실감도 떨어져서 공감이 가지 않지만,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안나 카레니나'의 모습은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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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는 모두가 매일 밤 복수심에 불타는 세계다. 그러는 게 자연화된 세계, 당연시되는 세계다. 억울함, 모멸감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도토리들이 서로에게 품은 원한의 양과 질을 따지고 누가 원인제공자인지를 따진다. 그렇게 복수심에 시달리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정도의 일로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죽일 놈이)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심이 싹트면 일단 그 복수심을, 복수심의 그 불타는 갈증을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켜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간혹,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지식인과 논객들이 말한다. 진짜 복수심을 품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공고한 결속을 자랑하고 있어서--게다가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그 공고한 결속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결국 다시금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성서는 경전이다. 경전은 한 사회의 윤리 감각을, 그것과 연관된 사법 제도의 실제(적어도 지향점)를 반영한다. 바울이 저 말을 인용했을 때, 바울은 신에게 무턱대고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 복수심을 내려놓고 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대신 갚아주는 어떤 실제적인 권위(권위의 체계, 이를테면 공정한 사법 제도 같은 것)가 예전 유대인 사회에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형태로 회복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한 게 아니었을까.


권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박찬욱은 성서 구절을 앞뒤 맥락을 빼고 인용함으로서 복수를 인간의 것으로 제시해놓았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의 극단적 양상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보여주고 있다) 만약 복수의 과업이 내 역량을 초과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갚아줄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톨스토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의 맨 첫머리에 로마서에서 따온 문구를 제사로 집어넣은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당연히 인식되고 있는 세계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성서 구절 따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야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마음 수양'을 할 수 있겠지만, 성서의 권위는 (이런저런 이유들, 굳이 시시콜콜 언급해봤자 피로감만 가중되는 이유들로 인해) 이 땅에서 떨어진지 오래다. 경전이 개인적인 힐링에만 기여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경전은 한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경전 읽기는 그와 관련한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줍잖은 TV 프로그램조차 하는 '힐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되어야 할까? '괴물'로 전락하는 게 싫다면, 안나를 모범 삼아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를 지향해야 할까? 이건 뭐 하나마나 한 말일 수도 있다. 복수 자체가 쉽지 않으며,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복수심을 억누르고, 참고 또 참는 가운데, 서서히 (영혼 없는) 괴물-기계 혹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로 변해가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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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초판본 완역판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후이늠들Houyhnhnms의 언어에는 사악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데, 다만 야후들의 추한 모습이나 못된 성질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인들의 어리석음, 어린 자녀의 게으름, 자기 다리에 상처를 낸 날카로운 돌, 사나운 날씨나 이상기후 같은 것들을 표현할 때 ‘야후 같은’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흐늠 야후hhnm Yahoo 우흐나홀름 야후wh-naholm Yahoo 이늘흐믄드위흘르마 야후ynlhmndwihlma Yahoo라고 하고, 설계가 잘못된 집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한다.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느낌이있는책, 2011.

 

 

 

* 문예출판사본(2008)에서는 후이늠들의 말을 '흐은 야후', '흐나홀름 야후', '은름나윌마 야후', '은홀믄론 야후’라고 표기했다. 

 

 

스위프트는 분절되지 않은 소리인 말 울음소리를(책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아닌 말들의 ‘언어'이지만)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표기하는 데는 난점이 있음을 위 두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다. 스위프트는 h와 n을 많이 사용하면서 후이늠들의 말을 길게 늘여 표기했지만(이럴 경우, 후이늠도 후이흐느흠으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h와 n, (w)를 묵음으로 간주하면 한국어 표기는 훨씬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스위프트의 알파벳 표기가 가져다주는 시각적 호소력이 반감된다. 

 

발음이야 h와 n을 묵음으로 간주하고 '은홀믄론 야후'라고 하더라도 표기는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후이늠들이 야후라는 존재에 대해 품고 있는 착잡한 경멸감--그것은 스위프트가 인간 존재 전반에 대해 품고 있는 경멸감이기도 한데--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라 표기할 때 더 잘 표현된다는 생각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쓴다. "단지 언어를 사용하고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후이늠 나라에 사는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무수히 많다." 

 

또 걸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타락한 야후의 왕국에서 그들을 개선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실현 불가능한 시도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감이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단언하며 책을 끝맺는다.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아니 실은 매일같이) 만난다. 스스로에게서 야후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일도 별로 없다. 다만 흐늠hhnm 이라거나, 우흐나홀름wh-naholm이라거나, 이늘흐믄드위흘르마ynlhmndwihlma라거나, 인흘름흐늠로흘른누ynholmhnmrohlnw라는 식으로 뜻모를 신음을 흐느끼듯 내뱉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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