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연순.박희석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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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당신 외에 더 유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고 레거는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지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바로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 장본인이라는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3.

 

 

베른하르트는 작중 인물 레거의 입을 빌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나는 저 대목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저 대목이 계속 기억에 남아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베른하르트의 의도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뻔뻔스럽다는 느낌은 전적으로 자기 감정이다. 곧 자의식의 감옥에 감정을 가둬두는 것이다. 듣는 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뻔스러움을 무릅쓰고 입 밖에 꺼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 상대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저 대목이 소설 <옛 거장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어제 폭풍 소나타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오늘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오늘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곧 이미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정말 무의미하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무의미한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모든 이야기가 조만간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능한 한 최고의 열정으로 확신에 차 말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1.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정말 그러하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항상 다짐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정신없는 헛소리이거나 상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기 위한 아첨이거나,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이고 아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스스로와 대화 상대자, 그리고 나아가 세상 전체를 조소하는 말이거나 하기 때문이다.(아니면 세상 전체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자들만을 조소하는 것으로 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안전한(=같잖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줄여야겠다는 다짐을 매 순간 하더라도 결국은 지껄이게 되고 만다. 바로 그 이유를 베른하르트의 저 문장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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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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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마시자 마음속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길고 육중한 프레디의 시신 밑에 폴로 코트가 구겨져 있었지만, 시신을 내려다보던 톰은 코트를 똑바로 펴 줄 기운도 마음도 없었다. 톰은 짜증이 났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고, 서툴고, 어리석고, 위험하고, 불필요한가! 그리고 프레디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부당한가! 물론 프레디를 싫어할 수도 있었다. 디키는 분명 그의 절친한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었고,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을 성적인 일탈이라는 이유로 조롱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친구였다. 톰은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에 웃음이 났다. 성은 무엇이고, 일탈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프레디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고 씁쓸하게 말했다.
프레디 마일즈, 넌 너 자신의 더러운 생각에 희생된 거야.”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157.

 

 

 

 

-

위 인용 대목에서 우리는 리플리가 프레디를 죽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사고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안소니 밍겔라의 영화 <리플리>(1999)에서는 각각 맷 데이먼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역할을 맡았다. 영화와 소설은 디테일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짜증이 났다"는 표현이다. 리플리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데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게 불필요하고 서투른 살인이었다는 생각에 '짜증'을 낸다. 물론 프레디 입장에서도 생각을 하긴 하지만, 이후 곧바로 합리화할 빌미를 찾아낸다. “친구를 조롱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친구니, 죽을 만도 하지”라는 논리다.


이어서 리플리가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것, 나아가 그것을 쪼개서 그 본질적 의미를 따져보는 건 무척 의미심장하다. 성이란 무엇이며, 일탈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알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따질만한 문제도 아니다. 프레디가 디키를 놀린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과연 죽을만한 이유가 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문제다. ‘성적인 일탈’이라는 표현도 프레디가 쓴 게 아니고, 리플리가 방금 생각 중에 떠올린 표현에 불과하다. 그래서 톰은 웃는다. 자신의 생각이 일견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실은 웃기는 자기합리화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성은 무엇이고, 일탈은 무엇인가?”하는, 눈앞의 상황과 어긋나는 이 '한가한 생각'은 ‘자신이 지금 사람을 죽였다’는 사태를 회피하고 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생각이다.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그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을 죽여놓고 그 시체 앞에서 이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리플리라는 인물의 핵심이자 그가 지닌 재능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그는 연기의 달인답게 한 마디 멋진 대사를 날림으로써 자기정당화에 마침표를 찍는다. (아마도 자기 확신에 찬 단호한 어조로 말했을 것이다.) “프레디 마일즈, 넌 너 자신의 더러운 생각에 희생된 거야.”


자신이 저지른 범죄 앞에서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정신분열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 이게 단지 리플리라는 예외적 개인의 재능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성적인 일탈'이라는 개념적 표현을 떠올리고, 그러한 '더러운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남을 비난, 혐오, 경멸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하여 차분함과 평온을 되찾는 리플리의 이 자기합리화 프로세스는 뭔가 굉장히 익숙해서 공감이 되는 한편 섬뜩한데, 어쩌면 이것은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정치인이나 재벌 3세지만) 이 사회에서 정신분열을 겪지 않고 정상과 상식의 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누구든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고 과정이 아닐까? 



20150905
#막독15기 #상남자들 / 네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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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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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독서 모임을 하느라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를 한 3년여 만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시드니 카턴이 아니라 은행원 자르비스 로리 씨였다. 보통 숫자를 다루거나 계산에 능한 인물, 합리성의 화신, 규범과 규칙의 화신 같은 인물들은 디킨스 작품에서는 엄청난 까임의 대상이 되는데, 자르비스 로리 씨는 앞서 언급한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도 풍자 대상이 되지 않고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흥미로왔다.

 

뼛속까지 은행원인 자르비스 로리 씨. 인간 관계보다는 은행의 업무를 최우선시 하는 인물로서 사랑이나 결혼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늙어버린 인물이다. 그의 말버릇은 "이것은 업무일 뿐입니다, 아가씨." 그런데 그는 은행원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든 고객의 재산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앙시앵 레짐의 폭정''혁명의 맹목적 폭력', 이 두 가지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물리적, 정신적 위기를 겪은 사람과 그의 가족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게 되고 만다. 시드니 카턴처럼 한 순간 폭발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진 않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가족들 곁에 있으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어떤 한 은행원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다보니 '사람'을 구하게 된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랄까, 논리적으로도 필연성을 띤 귀결이랄까...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에서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할 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업무'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행동할 때, 뭐랄까... 진부한 말이지만 세상은 좀더 아름다운 곳, 살 만한 곳... 뭔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멋진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게 아닐까?

 

 

 

-

<두 도시 이야기>는 펭귄클래식 말고도 창비(2014)와 홍익출판사(2015)에서도 출간이 되어 있는데, 시간 부족으로 각 판본을 비교하지 못한 채로 읽은 게 아쉽다. 애써 구해놓고서도 말이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증이 이는 대목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찾아볼 여유가 없어서 넘어갔더니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또 이 작품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디킨스가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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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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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메넬라오스여! 축복 받은 불사신들은 그대를 잊지
않았도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우스의 딸인 전리품을 가져다주는
아테네가 그대 앞에 서서 날카로운 화살을 막아주었도다.
마치 어머니가 단잠이 든 아이에게서 파리를 쫓아버리듯
아테네가 그대의 몸에서 화살을 살짝 빗나가게 했도다.
그리고 그녀는 혁대의 황금 죔쇠가 채워져 있고
가슴받이가 겹쳐진 곳으로 그 화살을 손수 인도했도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화살은 단단히 매어져 있는 혁대에 가 꽂혔다.
화살은 정교하게 만든 혁대를 지나 온갖 솜씨를 다하여 만든
가슴받이를 뚫고, 그가 투창들을 막아줄 울이 되게
몸에 두르고 있던 넓은 동판 배띠까지 뚫었다.
그를 가장 잘 보호해주던 배띠조차 화살은 뚫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살이 전사의 살갗을 스치자
상처에서 곧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마이오니아나 카리아의 여인이 말의 볼 장식을 만들고자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할 때와 같이―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전차를 타고 싸우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의 말에게는 장식이요 그의 마부에게는 영광이었다―
꼭 그처럼 메넬라오스여! 그대의 잘생긴 넓적다리와
정강이와 그 밑의 고운 복사뼈가 피로 물들었도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4권 127-147행.



 

* <일리아스>를 다시 읽고 있다. 모임에서 읽는 것인데, 전체 분량을 나눠 다섯 차례에 걸쳐 읽는 모임이다. 첫 모임에서는 전체 24권 중 1권부터 4권까지를 읽었다.


 

* 나눠서 읽으니 아무래도 꼼꼼히 읽게 되고,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에 눈이 간다.

4권까지의 분량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3권, 헬레네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현남편 파리스의 대결이 펼쳐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 파리스...는 미남자이긴 한데 싸움 캐는 아니어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못 된다. (오죽하면 형인 헥토르는 파리스를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 미친 유혹자"라고 부른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에게 3단 콤보 공격을 가한다. 1) 처음에는 창을 던지는데, 아슬아슬하게 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2)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칼로 파리스의 투구를 내리친다. 그런데 이번에는 칼이 박살난다. 3) 거기에 아랑곳 않고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의 투구에 달린 말총 장식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간다. 투구끈이 파리스의 목을 죈다.


 

꼼짝 없이 죽을 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바로 아프로디테가 개입한다. 아프로디테는 안개를 일으켜 파리스를 감싸고 그를 구해 그의 침실에 데려다 놓는다. 이어서 노파로 변장하고 헬레네를 부르러 간다. 파리스가 침실에 있으니 가서 그의 곁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목과 매력적인 가슴과 반짝이는 눈' 때문에 곧바로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대로 신인데 참 어설프다고 해야 할까... 아님 노파로 변장하더라도 목 주름과 가슴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일부러 변장을 하다 만 혐의가 짙다. 참 미의 여신 답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헬레네가 아프로디테를 질타한다. 지금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터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남편 잠 시중(=동침을 의미...)을 들라니 그게 대체 말이냐 똥이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나 파리스 옆에 가 있으라고. 너나 파리스를 잘 지켜주라고. 그러면 파리스가 너를 언젠가 아내나 노예로 삼아줄지도 모른다고. 감히 신한테 이렇게 말한다. 시건방진 헬레네로다...


 

당연히 아프로디테는 열 받는다. 그런 식으로 내 성질을 건드리면 조만간 혼구멍을 내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헬레네는 조용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남편의 침실로 간다...


 

침실에서... 헬레네는 파리스에게 (신에게 다 못한) 막말을 한다. 결투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돌아오다니 찐따도 이런 찐따가 없다고 개무시...아니 비난한다. [...] 하지만 싸움은 못해도 멘탈만은 트로이 최강인 파리스는 전혀 동요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나를 이겼지만 다음에는 내가 이길 것이오. 우리 편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 그러니 자, 우리 잠자리에 누워 사랑이나 즐깁시다. 일찍이 이렇듯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소." [...] 이런 사랑꾼이 없다.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우리의 미남자 파리스의 특징은 아무리 주변에서 자기를 개무시하는 막말을 한다하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몰라라 하고 사랑꾼으로서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다. 어떻게 보면 본받을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무턱대고 본받아서는 안 될 일일 것도 같다. 조금만 상처가 되는 말을 들어도 끙끙 앓는 나 같은 멘탈 약자가 파리스의 저런 태도에서 얼마간 매력을 느끼는 건 괜찮겠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 책임을 지닌 정치인... 예를 들어 박그네가 그래서는 안 될 일이리라... 하여튼 아 몰랑~ 파리스... 참 흥미로운 캐릭터다.

 

 

* 여기서 3권이 끝나고 4권으로 넘어간다. 4권의 첫머리에서는 신들이 파리스-메넬라오스 1 대 1 결투 결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황금 사과 전설에 따라 헤라와 아테네는 그리스 편이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편이다. 제우스는 대체로 중립...이라기보다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인간들이 제물을 많이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즉흥적으로 서약한 쪽 편을 들거나, 사태가 헤라가 좋아할만하게 전개되면 어깃장을 놓기 위해 트로이 편을 들거나 하는 식이다.) 


 

하여튼 4권 첫머리에서는 제우스와 헤라의 감정 싸움이 그려진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었는데도 아프로디테가 그를 구해낸 것을 두고,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메넬라오스는 아르고스(=그리스)의 헤라와 아랄코메나이의 아테네, 이렇게 두 여신을 후원자로 가졌으나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저 구경이나 하면 즐기는데 웃음을 좋아하는 아프로디테는 늘 알렉산드로스(=파리스)의 곁을 지키고 서서 죽음의 운명을 잘도 막아주는구려. 이번에도 죽는 줄 알았던 그를 구해주었소." 아프로디테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파리스의 목숨을 구하는 동안 헤라, 아테네 니들은 뭐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제우스의 이런 말에 기분이 팍 상한 헤라는 어째서 트로이를 멸망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거냐고 짜증을 낸다. 그러자 제우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자기한테 제물도 많이 바치는참 좋은 왕인데,  헤라 너는 왜 트로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더 짜증을 낸다. [...] 이에 헤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도시는 트로이가 아니라 아르고스와 스파르테와 뮈케네라고 응수한다. (참 애들처럼 싸운다...) 하지만 최고신 제우스의 짜증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서로 양보를 좀 하자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상호 합의 하에 아테네를 트로이의 장수 판다로스에게 보낸다. 신의 전갈은 이렇다. 자자, 지금이 좋은 기회다. 지금 가서 메넬라오스한테 화살을 한 방 먹이는 거다. 그러면 파리스가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화살을 날리기 전에 아폴론에게 큰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아폴론이 도와줄 것이다. (신이 인간을 꼬드길 때 잊지 않고 하라고 시키는 것이 바로 제물 서약이다... 이런 신발들... 아니 신들...)


 

이 같은 신의 꼬드김에 넘어간 판다로스는 메넬라오스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판다로스가 날린 화살은 메넬라오스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부상을 입힌다. 맨 위 인용이 바로 그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 인용 대목에서 인상적인 것은 메넬라오스가 화살에 맞아 흘린 피에 대한 묘사다. 호메로스는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 검은 피는 '마치 무엇무엇과 같았다,' 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마치~처럼', '마치 ~과 같았다'의 비유(직유)는 <일리아스>에서 무척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그 비유가 지나치게 참신하달까 핀트가 미묘하게 안 맞는달까... 예를 들어 호메로스는 그리스군이 싸우러 나오는 모습을 두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쓴다.


마치 봄철에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면
수많은 파리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목자의
외양간 주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듯이, 꼭 그만큼 많은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을 향해 들판에
버티고 섰다.  (2권, 469-473행)


음식물 쓰레기를 오랫동안 방치해뒀다가 파리 떼는 물론이고 쓰레기 봉투 안에 구더기[...] 음... 굳이 상상하자니 괴롭지만 [...] 구더기 떼가 들끓고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저 비유에 공감할 수 있을 것... 아니 아니 그럴리가! 군대와 파리 떼는 뭔가 많이 달라! 다르다고!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천연덕스럽게 군대와 파리 떼를 연결시키는 저런 4차원적이고 하이 개그스러운 비유들을 쓰고 앉았다... 호메로스가 시를 낭송하는데 마침 계절이 봄이었고, 낭송 장소 근처에 우유통이라도 하나 놓여 있었던 것일까.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메넬라오스의 검은 피 묘사 대목을 보자. 보자니... 여기서도 호메로스는 뭔가 4차원적 비유를 구사하는데, 이번에는 말의 볼 장식이다. '말의 볼 장식' [...] 이건 대체 뭔가. 경마장이라도 한 번 가볼 걸 그랬다. 뭐 실제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다. 상상력을 동원해보자. 여튼 말에 볼 장식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마이오니와나 카리아의 여인이 만든 것... 그렇다. 이것은 핸드메이드다. "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말의 볼 장식이 아니다. 말의 볼 장식을 만들려면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해야 한다. 재료는 값비싼 상아이며 색깔은 왕의 혈통을 뜻하는 자주색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실 전용 명품, 로얄패밀리가 쓰는 명품인 것이다. 호메로스 이 사람... 시 낭송 잘했다고 말 볼 장식이라도 하나 하사받은 것일까. 아니면 하나 갖고 싶다는 바람을 낭송 중에 은근 피력한 것일까. 명품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지 싶다.


* 하여간에 [...] 이렇듯 호메로스가 4차원적 비유를 사용한 덕택에 메넬라오스의 부상은 잠시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근데 이건 부상을 입은 것이어서 그나마 낫다. 사람이 죽어도 호메로스는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가 먼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아스가 그의 오른쪽 가슴 위
젖꼭지 옆을 맞혔다. 그래서 청동 창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가자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맨 꼭대기에만 가지들이 나 있는 이 포플러나무는
어떤 수레 제조공이 훌륭한 수레의 바퀴 테로
구부려 쓸 양으로 번쩍이는 무쇠로 베어 넘겼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강둑에 누워 시들어가고 있다.
꼭 그처럼 고귀한 아아아스는 안테미온의 아들 시모에이시오스를
죽였다. [...] (4권, 480-489행)


아니, 적어두고 보니 마찬가지가 아니라 [...]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메넬라오스는 그리스군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자 신분상 로열패밀리이며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고, 시모..뭐시기는(미안 시모...) 이 장면에만 등장하는(그리고 등장과 동시에 죽어나가는...지못미...) 엑스트라라고 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한가하게 강둑의 포플러나무로 수레 바퀴 테를 만들었느니... 그래서 강둑에서 시들어가고 있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포플러나무의 시듦과 인간의 죽음을 같은 레벨에 놓고 비유한 건 좀 심하다는 생각, 아무리 참신한 비유를 추구한다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호메로스가 줄기차게 구사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 익숙해진다. 하도 자주 나오다보니 나중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일리아스>가 또 워낙 긴 작품이지 않나. 그 긴 작품에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뭐랄까... 그냥 포기하게 된달까... 호메로스식 하이개그를 인정하게 되고 만달까... 그러다 달관하게 된달까... 그런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는 느낌이다. 하기는 뭐 사람이 죽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포플러나무가 죽는 거나 사람이 죽는 거나 따지고 보면 매한가지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일리아스>는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일찍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일리아스> 1권에는 아킬레우스가 엄마 테티스에게 투정부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를 단명하도록 낳아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시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만이라도 주셨어야죠.(흑흑)"


처음에는 이렇게 투정...(진상)을 부렸던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헥토르와의 결투,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으려는 프리아모스 왕과의 교섭 등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일찍 죽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리아스>는 결국 이런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아킬레우스가 달라졌어요!



 

* 인간은 죽는다, 라는 사실에 대한 고민을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든 인간은 결국 죽을 존재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리고 죽음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 각각 따로 떼어놓아도 어려운 이 두 질문을 호메로스는 한 번에 다룬다. 음. 일단 시도가 좋다. 패기 있다. 우주의 힘... 아니 고대 그리스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호메로스가 내놓은 답안은 <일리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답안이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들 거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거의 3000년전에 작성된 답안이고 너무 길어서(요즘 사람들 긴 글 참 싫어한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라고 한다면 논술 심사위원들이나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은 아마 십중팔구 안 좋아하면서 낮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구전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답안이라 신경숙 만큼이나... 표절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호메로스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구사하는 지나치게 신선한, 저 4차원적 비유들부터가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위원 같은 게 아니니까 <일리아스>를 꼼꼼히 읽고, 그냥 재미 삼아 호메로스가 제출한 답안에 각자 주관적 감상에 따른 점수를 매겨보는 것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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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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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기도한 뒤 청동 창을 번쩍 들어
뒤로 물러서던 그의 목구멍의 아랫부분을 찔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거운 손을 믿고 힘껏 밀어 넣었다.
창끝이 그의 부드러운 목을 곧장 뚫고 나가자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의 위에서는 무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카리스 여신들의 머리털과도 같은 그의 머리털이,
금띠와 은띠로 단단히 땋은 그의 머리털이 피에 젖었다.
마치 물이 넉넉히 솟아오르는 탁 트인 장소에
농부가 올리브나무의 튼튼한 묘목을 심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나 온갖 바람의
입김에 흔들려도 흰 꽃을 가득 피우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풍이 세차게 불어 닥쳐
그것을 구덩이에서 뽑아 땅에 길게 뉘듯이, 꼭 그처럼
판토오스의 아들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에우포르보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쓰러뜨려 무구들을 벗겼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468-9.



*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서는 개차반 악당 왕으로 나오지만, 호메로스의 묘사를 보면 메넬라오스 역시 아킬레우스 못지 않은 짱짱맨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구를 벗기는' 등 약탈자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이란 약탈이 주목적인 행위였다고도 하고... 전장에서의 '탁월한' 활약을 묘사함에 있어 호메로스는 인물의 도덕적 면모나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는다.


* 힘들 때, 특히 (불특정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일리아스>의 하드고어물을 연상케하는(하지만 훨씬 간결 담백한) 잔인하고 리얼한 살상 장면을 읽는 건, 솔직히 큰 위로가 된다. 이런 표면적 맥락에서도 고전 읽기는 힐링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 메넬라오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에우포르보스는 오직 이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메넬라오스의 무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짧게나마 에우포르보스라는 인물의 내력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서정적인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에우포르보스의 내력은 "농부에 의해 심어져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난, 온갖 바람의 입김을 이겨내며 흰 꽃을 가득 피워 낸 올리브 나무"에 비유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란 나무라도 어느 날 큰 폭풍이 한 차례 불어 닥치면 뿌리가 뽑혀 죽고 만다.

* 이런 장면들은 ‘인생은 속절없고, 운명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같은 주연 배우들 역시 동일한 파토스를 전해주지만, 에우포르보스의 죽음은 그가 '엑스트라'이기에 한층 더 절절한 구석이 있다.

* 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위와 같은 묘사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답다. 고도로 이상화된 영웅의 행위가 가장 일상적인 비유와 어우러져 있으며,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드라이한 묘사와 가장 서정적인 묘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그렇다. 위 대목은 살육의 '순간'을 건조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호메로스는 그 순간적 사건을 자연의 섭리라는 입지에서 조명한다. 잔인함에 경악한다거나 무상한 죽음에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허용되지 않지만, '올리브나무' 비유를 통해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가 영원성을 얻는다. 호메로스의 묘사는 마치 차원 이동을 방불케 한다. 작품의 핵심을 요약한다거나 청소년용 축약본을 만들 때면 빠질 게 분명한 게 이런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이겠지만, 실은 이게 바로 <일리아스>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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