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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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1920년에 태어나서 2012년에 타계한 SF, 판타지 작가다. 최근까지 살아 있었던 셈. 2012년에 이 작가가 타계했을 때,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추도사를 하기도 했다고. 오바마 역시 레이 브래드버리의 팬이었던 셈. 



레이 브래드버리는 대개 'SF 작가’라 불리긴 하는데,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과학 소설(Science Fiction)로서 SF를 쓴 작가는 아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들은 환상(판타지)적 색채, 동화적 색채가 짙다. 


SF를 썼지만 과학적 사실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 나가는 식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문장과 이미지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 같은 작가는 레이 브래드버리를 ‘시인’이라 불렸다고. 또 미스터리, 공포(horror)에 해당하는 작품도 많이 썼기 때문에 ‘에드거 앨런 포의 후예’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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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들에는 ‘인간이 만든 어떤 것’(=새로운 발명품)이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안개 고동>에서는 거대한 등대와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동, <날틀>에서는 날틀(=비행기), <저 너머의 드넓은 세계>에서는 (편지를 쓸 수 있는) ‘문자’, <태양의 황금 사과>에서는 ‘태양 탐사 우주선’이 발명품에 해당한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로켓', ‘발전소’, '인공 태양', ‘테마 파크’, ‘타임 머신’, 심지어 ‘운동화’ 등이 발명품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인간은 무언가 새로운 것, 훌륭한 것을 만드는 존재다. 훌륭한 발명품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인간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모시킨다. 그런데 그는 이 새로운 발명품을 갖고 어떤 편리함이나 물질적 이득, 과학의 발전과 연관시키며 소설을 쓴 게 아니라 ‘감정’과 연관을 시킨다. 이게 이 작가의 특별한 점이다. 게다가 이때 ‘감정’이 꼭 인간의 감정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개 고동>에서는 거대한 등대와 고동이라는 발명품과 심해 괴물의 ‘기다림’과 ‘외로움’이 서로 연관되어 다뤄진다. 그는 감정이란 게 오직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들의 것이라고 본다. 이 세상, 이 지구와 우주가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오직 이 점에서 보더라도 레이 브래드버리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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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고동>은 미국 교과서에도 실린 소설이라고 한다. 거대한 등대가 있고,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동이 있다.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이 고동 소리를 듣고 심해 괴물이 해안을 방문한다, 는 이야기. 이 심해 괴물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아마도 공룡의 일종이 아닐까, 라고 막연히 추측을 하고 있는 상황. 작가는 이 막연함을 막연함 그대로 내버려둔다. 괴물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는 데는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괴물을 잡아다가 해부를 한다거나 유전자를 채취한다거나 하는 실험 계획 같은 건 소설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에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대화를 통해 이 괴물이 만약 멸종한 공룡 중 살아남은 한 마리라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점에 관심을 쏟는다. 이게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심이고 관점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공룡과 인간을, 그리고 그 두 생명체가 모두 존재했던 이 지구의 역사를 바라본다.


<안개 고동>은 모든 동료(?) 공룡들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심해에 100만년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커다란 고동 소리를 듣고 그게 다른 공룡의 소리인 줄 알고 물 위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인간이 만든 고동의 소리였다… 라고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되게 허무한 이야기고, 별 다른 스토리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심해 괴물의 ‘100만년 동안의 기다림’을 ‘인류  역사(호모 사피엔스부터 계산해도 겨우 1만년)’ 와 비교하는 비교적 관점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 표면으로 자연스레 부상(emerge)하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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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은 그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기다렸다. 모든 서늘함과 흰색과 반갑고 상쾌한 날씨를 한데 그러모아, 마음속에 떠오른 단어를 입 밖에 내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눈에, 선장이 입안에서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굴리듯 그 단어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는 방향은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빛에서 도망쳐 빠르게 차가운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에서, 그들은 기다렸다. 


“북으로.” 선장이 중얼거렸다. “북으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웃었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 <태양의 황금 사과>, 247.



단편 <태양의 황금 사과>의 마지막 장면이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서술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태양의 황금 사과>도 겉보기엔 되게 허무맹랑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다. 미래의 어느 시점, 태양 탐사선을 타고 일군의 탐사 대원들이 미션을 수행하러 태양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미션 내용은 태양을 한 컵 퍼내는 것.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점원들이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퍼내는데, 마치 그런 느낌으로 태양을 한 컵 퍼내서 갖고 오는 것—이것이 바로 태양 탐사 미션의 내용이다. 



왜 이런 미션을 수행하는 걸까?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태양이며 태양에만 그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에. 게다가 재밌기도 하고. 여기까지 와서 술래잡기를 하며, 태양을 한 대 때리고 도망갈 수 있는 기회니까.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작은 벌레 같은 인간들이 헛된 자존심 때문에, 사자의 콧등을 쏜 다음 그 입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기네가 해냈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게 말이지! (<태양의 황금 사과>, 현대문학, 243-244) 



요컨대 재밌기 때문에, 태양을 한 대 때리고 도망갈 수 있는 기회니까, 라는 것. 별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며, '해냈다'라고 한 마디 말할 수 있는 성취감 때문이다. 



온도조절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대원 한 명이 죽지만 태양 성분을 한 컵 퍼내는 데 성공한 후,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부하들은 선장의 말을 기다린다. 임무에 성공했으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고. 



선장은 곧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입안에서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굴리듯” 단어 하나를 만들어내어 중얼거린다. "북으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웃는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끝. 이게 전부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발사하기도 하고, 거대한 등대나 비행기를 발명하기도 하며, 문자를 쓸 줄 아느냐 모르냐를 두고 서로를 질투하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성벽을 쌓고 전쟁을 일으켜 이웃 마을을 정복하기도 하며, 8일 간의 수명을 11일로 연장시키기 위해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 모든 인간의 활동은 따지고 보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헛된 일 하나를 함께 수행하고 마친 후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그 상쾌한 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지난 여름의 폭염과 헬조선에서의 이 팍팍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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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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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가피한 해명

— 나 죽고 난 다음에야 무슨 일이 있건 말건Apres moi le deluge


어제 아침에 우리 집에 공작이 왔다 갔다. 요컨대 나보고 자기 집에 와 있으라는 설득이었다. 나는 그가 반드시 이런 얘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확신했던 바였지만, 그는 별장에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라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했다. […] 나는 그에게 ‘나무’이야기는 난데없이 왜 하느냐고 물었다. 왜 그가 ‘나무’라는 단어를 끄집어 냈을까? […] 내가 나무 밑에서 죽든, 창밖의 벽돌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며 생명이 2주일밖에 남지 않은 내가 격식을 따질 처지냐고 공작에게 말하자, 공작은 즉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푸른 숲과 깨끗한 공기는 나에게 어떤 육체적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동요와 ‘나의 꿈들’이 어쩌면 호전될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면서 그가 꼭 유물론자처럼 말한다고 한마디했다. […]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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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쟁이 이폴리트의 ‘해명’. 

살 날이 2주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설정이다. 


사실 ‘유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폴리트 자신은 굳이 ‘해명’이라고 부른다. (간혹 ‘고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폐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이폴리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위의 ‘해명’은 자신의 자살 결심이 어째서 정당하고 필연적인지를 사람들 앞에서 해명한 것. 뭐 간단한 얘기다. 어차피 죽을 거 미리 죽겠다는 것. 다른 방도는 없다는 것. 근데 이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수십 페이지를 거뜬히 채워넣는다. 원고 깡패! 


폐병에 걸린 이폴리트가 집에 누워 있으면 창밖으로 이웃집 돌벽이 보인다는 설정이다. 이웃집이 메이예로프 씨네 집이어서 ‘메이예로프의 담장’이라고도 불린다. 괜히 멋져 보이는 네이밍이어서 평론가들이 작품 해설이나 평문에 (you know?__다들 알지?__의 느낌으로) 종종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은 이런 단순한 의미인 것. (메이예로프 씨는 소설 등장 인물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몰라도 된다. 돌벽으로 충분.)


근데 도스토옙스키는 이 ‘돌벽’ 상징을 꽤 자주 사용한다. '돌벽'을 넘어서는 게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 등장 인물 갖는 핵심 과업인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돌벽에 대한 인물의 태도가 어떤지를 잘 살피면서 읽어야 한다. '돌벽' 상징은 항상 ‘돌벽’의 형태로만 제시되는 건 아니고, 수정궁, 철도, 2x2=4라는 수학 공식, 기계장치로서의 자연 등의 형태로 변주되어 제시된다. 


<백치>에서 이폴리트는 집에 누워서 돌벽을 보고 죽겠다며, 이 돌벽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며 옹졸하게 고집을 부린다. 


그런 이폴리트에게 ‘백치 성자’ 미쉬낀 공작이 제안한다.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이폴리트는 당연히 이 제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차피 죽을 건데 나무 밑에서 죽든, 돌벽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이 제안이 기억에 남았던 것인지 자신의 유서(=해명) 첫머리를 이 돌벽과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그는 공작이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니 그보다 자기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어준 게 실은 무척 반갑고 고마웠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고맙단 말은 절대 안 하고 틱틱거리며 시비를 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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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엔가 오랜만에 동네 천변 카페에서 된장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나무들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들과 사람들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반가웠고 동시에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읽고 있던 카프카의 편지글을 덮어두고 한참창밖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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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작품에는 나무가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난데없이'의 느낌으로 등장한다. 자작나무, 소나무, 보리수, 버드나무 등이...... 나무들이 사람을 막 비웃기도 하고 그런다. 체호프는 나무가 있는 풍경을 소설 속에 자주 제시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무는 가끔 등장한다. 그리고 내 기억에... 카프카 작품에는 나무가 거의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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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지닌 카페는(집은 말할 것도 없고) 무척 드문 것 같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동네에서는 오래된 단독 주택을 허물고 4-5층짜리 빌라를 올리는 공사가 계속, 쉼 없이 진행 중이다. 엊그제는 철거 직후의 모습을 봤는데, 5-6미터 정도 되는 나무 두 그루가 뿌리째 뽑혀 잔해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집 앞 집은 반지하층이 있는 다세대주택인데, 그 반지하층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거의 매일 1층 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곤 한다. 할머니가 없을 때 그 앉은 자리에서 뭐가 보이는지를 시험해봤다. 돌벽이 보였고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짧은 골목길 끝에는 또 다른 돌벽이 있었다. 그래도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일까? 폐지 줍는 할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간혹 봤다. 가끔 내게도 말을 거신다. ‘아따, 금세 갔다 오네.’ 편의점에 도시락 사러 나갔다 오면 이렇게 한 마디 던지곤 하신다. ‘아, 네. ㅎㅎ’ 민망하고 어색한 짧은 대답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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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있었더라면 나무에 대해서, 또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 몇 마디 더 주고 받는 게 좀더 용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아니 꼭 무슨 대화를 주고 받지 않더라도 그냥 한 동네 이웃이니까 같이 보게 되는 무언가가...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 아니 꼭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더라도 그냥 그 자리에 있으니까 보고 있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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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옛날 소설이나 동화 보면 마을 노인들이 서낭당에 나무 뽑지 말라고 결사 반대하고 그랬던 걸까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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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벽을 보고 죽는 것’과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것.’ 이것은 매한가지가 아니다. 양자의 차이를 깨닫는 게 어쩌면 도시 계획의, 우리 미래 삶의 첩경일지 모른다. 이 차이가 피부에 와닿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지금이 이미 늦었나...) 도시 계획 입안자들에게 <백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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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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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소설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로가 가족이나 친구 이야기를 많이 다루니 말이지만 '아무리 가족이나 친한 친구라고 해도 서로 간의 완전한 이해, 소통,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입장 내지 시선이 먼로의 소설에는 존재한다.

‘분리’라는 단어는 <태워줘서 고마워>의 한 대목에서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그 뒤 몸에 찾아드는 나른함과 한기. 그리고 분리.”(158) 이 소설 남자 주인공의 내적 독백에 해당하는 대목인데, 이 장면에서 남자애는 좀 뜬금없이 라틴어 문장을 떠올린다. 근데 이때 그가 떠올리는 라틴어 문장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 전체 문장은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성교 후에 모든 동물은 쓸쓸해진다)”인데, 남자애의 생각을 따라가는 서술 속에서 ‘포스트 코이툼’은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는 서로 떨어져(=분리되어) 제시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정말 기법적으로 탁월한 서술인 듯하다. 서술 자체가 ‘분리’라는 주제를 강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여자애(로이스)와의 교육 격차를 생각하면 이 라틴어 자체가 그와 그녀 사이 ‘분리’를 암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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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역시 '분리'가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다른 인물과 눈을 못 마주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른 채 순수하고 외곬이어서 '답답한' 마살레스 선생님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무슨 의도를 갖고 그러기 전에 눈이 자동적으로 외면한다.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삶, 노답인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렇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녀의 장애인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른 시선을 취할 수 있을지는 나 역시 자신이 없다. 물론 내가 그런 시선을 받을 때도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정의로운 주체가 구성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짐짓 심각하게 따지면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자(인종, 성, 장애, 계급, 종교)를 차별하는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도 하고, 다름과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하며, (빈부나 지식 수준이나 외모나 그밖의 기타 등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들도 한다. (또 이런 말들을 앞세워 차별에 무감각한 사람, 올바른 삶, 사회 정의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신나게 비난, 풍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말들을 실제 현실에, 매일의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그런 ‘우리들’을 풍자하거나 훈계하면서 환골탈태를 촉구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현실, 우리들의 한계(그건 어쩌면 인간 본연의 한계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단절된 채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런 게 앨리스 먼로의 메시지는 아닐 것 같다.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정리가 꼭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메시지를 (교훈적으로) 요약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써서 귀를 기울일 것’ 뭐 이런 식으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소설을 읽는 중에 우리가 생생하게 느꼈던 것들을 모두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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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마지막은 이렇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399쪽)

이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남의 인생, 남의 가치관을 두고 딱 잘라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심판’할 수 없게 만드는), 남의 삶을 두고 손쉽게 '딱하다'고 재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경험들, 어떤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예술과 문학이 잠깐 동안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순간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 즉 외교상의 공식 문서다. ‘외교상의 공식 문서’를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자명하다. 예를 갖춰야 한다. 카버가 체호프의 죽음 앞에서 '샴페인 마개를 조심스레 주워 챙기는 행동'을 통해 예를 갖추듯, 체호프가 자신의 소설과 희곡들을 통해 세상의 ‘등신들’에게 예를 갖추듯 말이다. 하지만 그 ‘저쪽 나라’가 보잘것없는 나라라면? 별 권력도, 힘도, 존재감도 없는 약소국이라면? 현실 정치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듯, 예를 갖추는 건 정말이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덧) 


작가 앨리스 먼로의 개인사 흥미롭다. 많은 소설들이 자전적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가장 훈훈했던(?) 사실 : 대학 입학한 10대 후반에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 20년 쯤 후 재회하여 결혼(첫 남편과 이혼 후 재혼)하여 평생 같이 산 것. 낭만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유행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부를 수 있을까나... 뭐랄까 체호프의 '사랑'에 대한 입장을 현실에서 실현한 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개인사가 너무 맘에 들어 독서모임 때 멤버들에게 소개했는데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인상적이면서 묘하게 위로가 되었던(이해가 되었던) 사실 : 
1) 평생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2)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오호, 아하, 저런, 흐음~을 반복했다. 

본받고 싶은 점 : 패션 감각이 뛰어나시다고. 

앨리스 먼로 소설은 한국에 3권 번역 출간 되어 있다. 몽땅 추천한다.



#막독 17기 #노답  

세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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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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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위안>이란 소설.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이 소설 뭐랄까 ‘주체적인 삶’의 한 단면을 서늘하게 보여준달까. 왜 흔히들 말하는 그런 삶 있지 않나, 이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성적인 인식에 토대를 둔 삶.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마치 ‘제2의 자연’처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하나의 상. 

주체성에 관한 여러 담론들이 떠돈지도 오래다. 물론 ‘주체성’을 여러 맥락, 여러 층위에서 다룬 난해하고도 정교한 이론들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매우 단순화된 주체성이란 신화/당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책을 읽더라도 ‘주체적인 독서’를 해야 하며, 소비를 하더라도 (광고의 기만술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도. 

삶의 전 과정, 전 국면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이 신화. 이 신화 속에서는 내가 한 모든 판단과 행동의 책임 역시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물론 사회의 책임이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한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의식이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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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위안>에는 굉장히, 뼛속까지 주체적인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학교의 과학 선생이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그가 재직하는 학교가 시골 마을 학교여서 진심으로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창조론 지지자들과는 물론, 창조론도 하나의 설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달라는 온건한 타협안과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그에게 진화론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다. 과학적으로 옳다고 증명된 사실을 부정하는 다른 입장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비이성적이다. 문제는 그가 그런 비이성적인 견해를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피곤하고도 적대적인(그리고 끝이 없는) 논쟁을 기꺼이 감수한다.

종교와 정치, 성차별 논쟁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란 얘기가 있다. 때로 논쟁이 붙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그나마 훈훈한(?) 결말은 ‘그래 뭐 어쨌든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물론 그건 너와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포기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 과학 선생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논쟁한다. 창조론을 믿는 학생 및 학부모와 논쟁하고,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는 교장과 논쟁하고, 가망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게 안쓰러워 그를 달래려는 아내와도 논쟁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나요? 그게[창조론과 진화론 둘 중 무엇이 진리인지 하는 문제]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죠?”라고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와 아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단 논쟁을 하게 되자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둘 사이의 관계는 싸늘하게 식는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논쟁을, 자신의 이성과 과학적 진리를 사랑한다. 그는 창조론을, 그리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진화론과 동등한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라는,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타협안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나아가 인간 이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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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관련한 모든 면에서 주체적인 태도,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관철하고자 했던 과학 교사는 죽음도 그다운 방식으로 죽는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그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실행에 옮긴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신과) 은밀히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태도, 즉 거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어떤 희망을 가지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시종일관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사회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즉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죽는다. 

앨리스 먼로는 그런 남자가 죽은 이후 혼자 남겨진 아내의 모습과 행동을 그린다.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른다.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영혼이 남는다는가 하는 건 모두 기만적인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바탕을 둔 모든 종교적(=비이성적) 의례를 제거하고 이성적이고 유물론적인(?) 절차에 따라 단순하고 깔끔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게 남편의 뜻이다. 아내는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싸늘한 한기를,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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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좀더 이어진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소설의 제목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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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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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상황에 대한 이 솔직하고 깔끔한 태도는 몹시 골리니쉬체프의 마음에 들었다. 안나의 마음씨 착하고 쾌활하며 정력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안나의 남편]도 알고 있던 골리니쉬체프로서는 그녀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5부 7장 / 문학동네 2권 438쪽.


얼마 전에 지인과 체호프의 안나와 톨스토이의 안나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잠깐 나눴다. ('체호프의 안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에 관하여>에 등장한다. 그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확인을 못했다.)

차후 더 디테일한 비교를 위해 일단 내가 파악한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성격을 정리해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simple(솔직하고 깔끔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full of spirit(쾌활하고 정력적인 모습)이다.

'솔직하고 깔끔한'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작가정신), '직설적이고 솔직한'(민음사)라고 번역했다. 영어본에서는 'direct and simple'.

'쾌활하며 정력적인'의 다른 번역은 '유쾌하고 적극적인'(작가정신), '명랑하며 활기찬'(민음사), '명랑하며 열정적인'(펭귄클래식)이다. 영어로는 'spirited gaiety'(혹은 full of spirit).

톨스토이는 이 두 가지 성격적 특성, 즉 '솔직함'과 '열정'을, 개인이 사회적 억압(프레셔)에 맞서 '진정한 삶', '주체적인 삶', 혹은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근데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춰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소설에서 안나는 결국 자살한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볼 일은 아니고, 어째서 그런 결말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어떤 함의가 깃들어 있는지는 따로 또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숱한 문학 작품, 철학서들(그리고 요새는 인문학 강좌들)이 강조하는 게 바로 저 두 가지 자질이고, 사실 저 두 가지를 갖추는 것만해도 무척 힘든 일이거늘, 그걸 다 갖춘 사람도 결국 끝은 자살이라니. 그것도 극심한 신경쇠약에 이은 자살...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체호프가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저 두 가지 자질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인물들에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안나들은 (자신의 욕망/마음에) 솔직하지도 않고 당연히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체호프가 놀라운 것은 이런 주인공 같지도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도(단편이니 가능했겠지만) 거기에 상당한 함의를,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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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 대목(내가 정말 사랑하는 대목이기도 한데)에서 톨스토이의 솜씨도 상당하다. 거장은 거장이다. 인용 대목은 소설 중반, 안나가 불륜의 대가로 모든 걸 잃은 상황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남편을 잃음과 동시에 사회적 평판을 잃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의 욕망/마음을 simple하게 드러낸 대가다. 사실 사교계에서는 모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아무도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쉬쉬한다. 하지만 안나는, 예의 direct and simple한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오늘날 독자 입장에서야 이런 안나가 '존멋'이어서 '걸크러쉬'를 하고픈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안나가 속한 '세상' 입장에서는 괘씸하게도 사교계의 불문율을 어긴 셈이니 그 대가로 자연히 왕따를 당한다. 안나는 고립된다. 당대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거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나는 full of spirit의 태도로 모든 걸 걸고 브론스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자꾸 안나의 사랑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부담스러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떠나 외국으로 간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 위 장면은 외국에 머무는 이 커플을 브론스키의 친구인 골리니쉬체프가 방문하는 장면. 이 사람은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역이고 안나와는 거의 안면도 없다. '빙의의 천재' 톨스토이는 이 '단역의 시각'에서 안나를 바라보게 한다. 친구가 어떤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그 결과 안나의 (객관적) 처지가 어떠할지 잘 아는 상태에서 이들을 방문했을 골리니쉬체프에게는 안나의 현재 모습,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상식적인 기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그 상식을 단번에 깨뜨려버린다. 정말이지 '매력터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독자는 안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인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게 톨스토이의 솜씨다. 그는 인물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며, 그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안다.

그나저나... '한 책 읽기'(한 권의 책을 여러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는 모임이다)에서 조만간 <안나 카레니나>를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이 오길 기다려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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