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선 1
필립 마이어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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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에서 시작해서 루트 66을 타고 건축 대학과 미술관이 있는 주요 도시들을 들러 들러 텍사스까지. 

 

 지난 해,  보름 동안 지루한 사막을 가로질러 알버커키와 산타페를 들러 도달했다가  바로 밑 샌안토니오로 내려와, 멕시칸 국경선과 자주 맞닿은 도로를 타고, 미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들을 들러 뜨거운 여름을 달려 돌아왔던 그 길. 그 길 위에서..

 

 구석 구석 숨어 있는 인디안 자치 구역과 박물관, 그들을 기념하는 자잘한 관광지들을 거치면서 나는 그들이 아직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 초라한 명분인 보존과 전통이라는 것이 한없이 슬펐다. 국가와 자본주의와 밤에도 불빛이 넘치는 도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를 때, 그 때 용감한 전사가 되어 죽고, 면역 없이 수천만년을 살아온 그 땅에 무지막지한 수의 백인 인구가 전파한 전염병들에 의해 죽고, 한 겨울 배반과 능욕으로 얼룩진 땅에서  쫓겨나면서 기아와 추위에 죽어, 그렇게 죽고 또 죽고 계속 죽어, 이제 겨우 100만의 인구수로 명맥만 잇고 있는 그들.  차라리 좀 더 적극적으로 백인들과 동화되고 그들의 개가 되었다면, 그처럼 고립된 채로 스스로 패배자의 상처를 팔아 연민을 구하고 삶을 연명하는 비루한 인생으로서,  자신들 스스로 국가 없이 지켜왔던 수천년 역사의 피날레를 그렇게 슬프게 장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텐데.. 라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자치구역에서 파는 조잡한 액세서리들. 맛없고 비싼 음식들. 80%에 육박하는 높은 실업률과 그들의 삶에 대해 내가 아무 것도 모르더라도 피폐한 그들의 삶의 언저리를 여행 중 어디에서곤 발견할 수 있었다. 숱한 역사 박물관을 거치면서 보았던 개척민들의 인디안 정복의 역사가 실은 전대미문의 인류 학살과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여정의 하나였음이 그것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래서 결국은 즐거움을 찾는 그 과정 중의 하나였음이 불편하였고, 앵글로 색슨의 후예들이 판매하고 또다시 그들이 소비하는 인디안 컨텐츠들이 못마땅했다.

 

 지배자의 반성과 자성의 전시는 씻을 수도 , 돌이킬 수도, 용서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역사는 늘 승리자를 위해 다시 쓰여졌다. 짧은 미국의 역사는 그 시작 자체가 원죄에 가깝다. 그들이 "위대한 개척" 정신으로 포장한 살육과 약탈 행위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어메리칸 인디안들에게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인디언들과도 미국인들과도 평화롭게 섞여지내던, 그곳에서 미국인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서구 문명"을 일구고 커다란 저택과 화려한 가구를 소유하고 이웃이 되어 함께 살아온 멕시코인들의 터전에 잔인하고 몰인정하게 뿌린 피의 댓가도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100 여년 동안의 폭력과 정복의 서사를 다루는 필립 마이어의 두번째 소설 더 선은 석유재벌 매컬로 가문의 연대기를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시점을 통해 재현한다.

 

 19세기 말,  아직 코만치 인디언이 세상 물정을 깨닫기 전, 가족을 몰살한 인디안에게 잡혀간 어린 엘리(대령)의 시선에서 써내려 간, 코만치 인디안들의 생활. 묘사는 치밀하고 섬세하지만 담대하고 서늘하고 거침이 없다.  이렇게 디테일이 담긴 당시 코만치 인디안의 생활과 가치관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 또 있을까. 거의 절반 이상이 당시 코만치들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그러나 그것이 삶이었던, 습격으로 점철된, 배타적이면서도 개방적인 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려져 있다. 엘리는 자신의 가족을 잔혹하게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처음에는 살기 위해 그리고 점점 더 열성적으로 코만치 인디안이 되어 간다. 정체성에 대한 혼동이나 백인으로서의 자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독자의 몫이다. 엘리는 코만치들에게 쉽게 동화되고 인정받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적어도 1편에서까지는.

 

 엘리의 아들 피터는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과 백인이 한 때 이웃이고 사이좋게 지내던 멕시칸 가르시아 가족을 몰살하고 검은 돈으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을 일기장에 쓰고 있다.  피터는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모든 잔인하고 불합리한 과정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사람이다. 양심과 가족의 이익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역시 가족의 일부이고, 그 모든 살육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그로 인한 혜택을 누린 사람이다. 

 

 20세의 나이에 혼자서 살아 남은 피터의 손녀 진은 몇대째 지켜 내려온 그 가족의 거대한 목장을 지키며 석유 재벌이 되는 과정 속에서 가족의 과거를 미화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3인칭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진 앤의 스토리는 1부에서는 그냥 도입과 전개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닥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막대한 땅을 상속받은 채로 고아가 되었고, 그녀의 땅에서 석유를 캐기 위해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2부가 기대된다.

 

 상념이나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건조 하지만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시대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연결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서사의 줄기가 잡히고 책을 덮고 잠시 쉬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독서와 독서 사이 그 여운에서 잡히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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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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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자 긍정심리학의 전파자이기도 한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대학교 졸업생 집단을 포함한 총 세개 집단 총 814명을 대상으로 한 70여년간 전향적 추적 조사를 이어받은 성인발달연구의 총 책임 연구원인 동시에 하버드 집단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성인발달 연구는 성공적인 노화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8백여 명의 인생을 수십년간 추적하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이다.

 

연구의 결과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실은 노화하는 것도 하나의 성장이며 60 이후에도 70, 80 이후에도 인생의 다른 어느 시기 못지 않게 행복하다는 것이다. 조지 베일런트는 노화를 신체적인 쇠퇴의 진행 과정으로서가 아닌 삶의 성장 과정으로 보고 연구했다. 생명이 유지되는 한 노년에도 계속해서 성장과 쇠퇴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50 세에 접어든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얘기가 아닌 실제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있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러나 수십년에 걸친 추적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책에서 주장하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보기에는 조지 베일런트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물론 수십년에 걸친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통계학적인 연구 결과들도 많이 제시되어 있지만, 책의 전반을 지배하는 조지 베일런트의 철학적 가치관은 긍정 심리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의 주된 내용은 연구의 객관성보다는 개별 인물의 사례 중심으로 엮여져 있다. 연구는 "행복"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가장 잘 갖춘 백인 명문 엘리트 하버드대학생들의 집단과,  사회의 가장 밑바닥층에서 평균 아이큐 90을 가진 이너시티 그룹, 그리고 아이큐 150 이상의 여성 그룹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설문과 심리적 상담 건강 체크 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여기에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조지 베일런트 자신이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인물 중 인상깊은 30~40 건에 해당되고, 그 중에서도 하버드 대학교 집단이 수적으로 가장 많이 차지한다.  그가 방문한 사례자들 중 집안 분위기와 표정, 친밀함, 사회적 유대관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본인의 느낌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우리는 이러한 느낌적인 것, 한 사람의 주관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것을 연구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조지 베일런트의 생각일 뿐이다. 특히, 그는, 사회적 유대관계와 긍정성, 쾌활함 같은 것들을 행복과 동일한 것들로 여기는 듯하다. 평소 쾌활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나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가 있고, 행과 불행은 본인만이 알 수 있다.
 

50대 즈음에 있는 힘을 다해 풍부한 사회적 유대 관계를 만들어 보라.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워 질 것이다.

 

생각의 차이는 이거다.  웃지 않는다고,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조금 외롭다고, 친절하지 않다고, 유리창이 깨끗하지 않다고, 벽에 손주들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다고 해서 모두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물질적 풍요나, 교육 정도, 불우한 어린 시절 등이 노년의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조지 베일런트의 결론은 다소 안도할만하다.  

 

수면자 효과(sleeper effect )는 같은 정보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애초의 정보가 지워진다는 심리학 이론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문득 잊었던 사랑이 다시 생각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누구도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그것은 기억력이 주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슬픔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우리를 병들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린 시절의 혹은 젊을 때의 상실감과 상처가 노년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경우이긴 하나, 우리가 흔히 예측할 수 있는 몇 가지 건강 및 유전상의 변수들이  노년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결과도 주목할 만 하다. 이너시티의 경우, 60세 이전에 사망한 경우 조상의 수명이 현저하게 짧았다. 그러나 조상의 수명은 70대가 되어 누리는 건강과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70대의 건강과 행복은 콜레스테롤 수치, 스트레스, 부모의 특성 유년기의 성격 사회적 유대관계 등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성인발달연구를 통해 나타난 성공적 노화를 예측가능한 몇 가지 지표들을 더 들어보면 이렇다. 하버드 집단이 성공적 노화를 예측할  수 있는 50세 때의 지표에는 흡연량 많지않음, 알콜 중독 경험없음, 안정적인 결혼 생활, 규칙적인 운동, 알맞은 체중, 성숙한 방어기제 등이 있다. 이 중 두가지 방어 요소도 찾기 어려웠던 사람은 모두 80세 이전에 사망했다. 이중 네 가지 이상의 방어 기제를 가졌던 사람은 단지 5프로 만이 20 년 내에 사망했다. 불행하고 병약한 노후를 맞이한 사람도 6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연구 대상자 들 중 60세에 '일'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75세에 이르러서는 자기 삶에서 은퇴한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일을 사랑한 사람은 은퇴도 즐겁게 맞이했다. 뇌세포가 가장 많이 감소하는 시기는 50세 무렵이다. 건망성실어증은 30 세부터 이미 시작되며 알츠하이머 병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영적 종교적 믿음이 깊다고 해서 성공적 노년에 이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놀랍게도 우울증에 걸린 비율이 네 배나 높얐다.

 

누구나 다 늙는다. 그 늙고 병들고 우울함의 상징처럼 굳어진 막막한 노후의 이미지를 보다 구체화하고 계획하는 일이 아직 다 늙기 전의 인생에 먹구름처럼 드리운 그림자가 아닌, 죽는 날까지 배우고, 소통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읽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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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
노은주.임형남 지음 / 예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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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서의 소유하는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살기 위한 집을 찾는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내 인생의 어느 부분 가꾸고 사랑하고 영위하는 장소로서 집과 집을 둘러싼 환경. 그것에 대한 어느 소박한 건축가의 사색. 이 건축가는 부부가 함께 건축주를 만나 그들의 소망에 귀 기울이고, 집을 짓게 될 곳을 가서 땅의 목소리를 듣고,  짓게 될 집의 주제와 집 이름을 정하고, 설계에 착수한다. 작고 소박하지만 그들(건축주)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담아줄 집. 존경과 행복의 집, 쾌활하고 재미있는 집, 세상과 연결된 마루가 펼쳐진 작은  고주택.. 그들이 짓는 집들은 그렇게 테마가 있는 집들이다.


의식주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는 달리, 사는 곳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못된다. 빈부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주택이기도 하지만 이제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한 선택이 인간이 취향의 자유를 맘껏 보장 해줄 만한 경지에 이른 현대 사회에서 숨쉬고 먹고 자고 싸는 모든 인간의 기본 활동에 기반이 되는 공간이 삶의 질을 반영한다.


예담에서 나온 [사람을 살리는 집]의 저자 노은주 임형남은 부부 건축가이다.  예쁜 집 사진과 스케치 등의 화보와 잘 어울려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는 이 책은 종이 재질에서부터 디자인 구성까지 비주얼적인 면에서 만족스럽다. 술술 넘어가고 쉽게 읽히는 경어체로 된 친절한 책이다. 전체 1부에서 4부까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나에게 묻는다에서는 약간 에세이적인 느낌을 풍기면서 집과 관련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어린시절의 기억, 현대 사회에서 동네의 삭막함, 살고 싶은 집의 장소, 직접 설계했던 집과 관련된 이야기 등 주택과 관련된 자유로운 사색이 주를 이룬다.  금산주택과 3×3×3 퍼팩트 하우스와 같은 초소형주택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이 흥미를 끌었는데, 화장실과 부얶을 기본으로 하고 거실과 침실 공간을 높낮이와 가변성 을 통해 사용자 요구에 맞춘 퍼펙트 하우스는 개념도만 있어서 사진이 아쉬웠고, 금산주택 역시 내부구조를 스케치한 그림이나 사진 있었으면 하고 아쉬울 뻔했지만 뒤에 다시 나왔다.


2부 나를 살리는 집 편에서는 본격적인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해 아파트를 포함한 현대식 주거 공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특히 거실 공간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은
 

말하자면 거실은 잘못 수입된 과일 같기도 한, 정체성도 없고 한국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결정적으로 죽은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다. 물론 거실에서 많은 생활이 이루어지는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큰 거실 크기와 이를 위한 50~60평형대의 대형 아파트, 거기에 앉아 있는 값비싼 전시용 가구와 실물 사이즈의 화보 사진, 남을 의식한 액세서리 등이 유행처럼 일률적으로 퍼진 한국의 주거 문화에 대한 성찰을 불러 일으킨다. 2부에서 역시 간간히 실려있는 사진이 본문 내용과 조금 더 일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객의 요구에 따라 본인이 설계한 작은 방은 설명이 아름다와서 실제 모습이 궁금하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있는 본체와 시선을 적당히 가리는 얇은 벽을 하나 세웠고, 그냥 아주 작은 방과 그의 딸린 마누를 하나 놓았을 뿐입니다 . 방이 창을 열면 마음이 열리 듯 환해지며 세상의 풍경이 들어오고 창을 닫으면 세상과 단절된 완전한 고독의 순간이 되는 공간.


과연 이런 공간이란 어떻게 생겼을까


3장까지는 전반적으로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공간과 환경에 대한 산문집 같은 느낌이다.  환경으로 서의 집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건축가와 공유하고 건축가의 철학적 사유는 때로 날카롭게 우리의 양심을 찌르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보내기도 한다. 

건축도 자연에 땅에 빚을 집니다. 수십억년 동안 가벼운 바람과 햇빛만을 안고 살았던 땅을 파헤치고 그 자리에 집을 앉히는 것입니다.

 

건축은 모든 것이 만남입니다 땅과 건물의 만남, 하늘과 건물의 만남, 직교하는 두 면의 만남, 바닥과 벽의 만남, 집을 지을 사람들과의 만남, 집을 지어 줄 사람들과의 만남.. 중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남을 거친 후 한 채의 집이 완성 하는 것입니다.


만날수록 새롭고 어려운 만남을 대상은 땅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땅들은 살아 있고 많은 말을 합니다. 

4장 [살리는 집을 그리고 싶다] 편에는 실제 저자가 설계한 설계 도면과 완성된 집의 사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건축주들의 바램과  함께 소개된다. 이제껏 읽은 저자의 건축 철학이 그대로 재현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자기 집에 대한 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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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춤토르 분위기 페터 춤토르
페터 춤토르 지음, 장택수 옮김, 박창현 감수 / 나무생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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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춤토르에게 건축은 감동이어야 한다. 1943년 스위스 태생, 2009년 건축계의 노벨문학상이라 불리우는,  플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이다. 국제적인 공모전이나 대규모 설계를 하지 않아, 그의 건축물을 여행 중 만나보기는 어려운, 건축계의 운둔자이자 장인 정신으로 재료의 배합을 실험하는 거장이라고 한다(월간 디자인 및 위키피디아 참조). 페터 춤토르에게 건축의 질이란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에 따라 좌우된다. 볼 때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답고 존재감을 지닌 대상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 그것을 페터 춤토르는 건물에 들어가서 실내를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르는 감정, 심리적 감성으로 감지하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이 책은  건축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그와 그의 작은 사무실에서 작업하면서 깨닫게 된  아홉 가지 요소와 세 가지 개인적인 추가 요소 에 대해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2003년 6월 독일 문학 음악 축제에서 춤토르가 했던, < 분위기, 건축적 환경, 주변의 사물> 이라는 강연이다.

 

달력 용지처럼 빠닥빠닥 두꺼운 낱장들과 판자 처럼 딱딱한 커버, 표준 사이즈를 넘는 기형적 빤형, 게다가 그 디테일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날 것 같은 작품 사진들은 동양화만큼 넓은 여백을 가진 지면에 대개는 흑백으로 작게 처리한 배짱,  70여 페이지 분량의 짧은 텍스트임에도 간지나는 하드 커버와  2만2천원이라는 오버프라이스가 용서가 되는 건 아마도  페터 촘토르적 건축 컨셉을 반영하지 않았겠냐는 추측과, 그 짧은 텍스트에 녹아 있는 위대한 건축가 페터 촘토르의 사상에 있다.

 

 

1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 세운 성 베네딕트 교회(Saint Benedict Chapel). ⓒ이상준
2 브러더 클라우스 교회 내부 모습. 내부를 지지하던 목재를 3주 동안 태워 없앴다.
3
한 농부를 위해 지은 브러더 클라우스 교회. 이 건축물은 하나의 경건한 조형물에 가깝다. ⓒ이상준

사진 출처(월간 디자인 예술)

 

 그가 하는 말에 가만히 귀기울이면 미학은 어려운 게 아니고, 예술은, 적어도 건축이나 음악과 같이 우리 주위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예술은 우리의 삶, 우리의 가치가 되고,  우리의 기억이 되고, 그리고 우리의 사랑 속에 머문다. 그는 무슨주의니 무슨 기법이니 하는, 의식과 사상을 압축하는 미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하는 단어를 이용해서 말하지만, 그의 철학은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진다.

 

건물은 비율과 재료에 따라 고요함 속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p31

그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재질이 일상의 소리들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까지 고민한다. 부엌에서 나는 쨍그랑 물건 부딪치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이런것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은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어린 아이에게는 엄마가 집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분위기있는 건축을 디자인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아홉개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건축은 조형 예술인 동시에 시간 예술이다. 건축 경험은 한순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시간 예술이다. 41

시간과 함께 그 건축물을 사용하면서 용도에 따라, 그 속에 있는 사물들과 사람들에 따라, 재료의 부식이나 낡아감에 따라 음악처럼 다채롭게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 페터춤토르에겐 그것이 건축의 요소이다.  또한 사물을 비추는 빛과 조명, 공간의 온도,  주변의 사물, 환경으로서의 건축, 일관성, 내부와 외부의 긴장 등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축은 지구의 일부분을 선택하여 작은 박스를 세운다. 그 순간 실내와 실외가 생긴다. 우리는 안에 있거나 밖에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뿐이 아니다. 문지방, 통로, 작은 문, 내부와 외부의 미묘한 전환, 놀라운 장소의 느낌, 우리가 다수이든 개인이든 무언가가 우리를 감싸고 모으며 보호하는 듯한 느낌, 무언가에 둘러싸였을 때 느껴지는 집중감, 개인을 위한 공간과 공공을 위한 공간,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 건축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적절히 이용한다. 나는 성을 소유하고 있다. 성은 내가 사는 곳이다. 외부 세계에 공개된 파사드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주나 건축가가 건물을 세울 때 무엇을 원했는지 나는 그들이 기대한 대로 존재하며 그들의 기대를 달성할 수 있으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파사드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당신에게 모두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안에도 많은 것이 있다. 당신은 가서 일이나 하라."

페터춤토르가 생각하는 내부와 외부와의 긴장이다.  빛을 다루는 그의 장인 정신은 이렇다. 

처음부터 조명을 염두에 둔다. 첫 번 째 생각은 건물을 그림자로 구성된 하나의 매스라고 생각하고 빛을 설치하면서 어둠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빛을 하나의 새로운 매스로 끼워 넣는다. 두 번째 생각은 빛을 내는 물질들과 표면을 체게적으로 살펴보고 빛이 반사되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빛을 반사하는 방식에 따라 재료를 선정하고 그 방식하에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

건물에 갖는 용적 미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의 작은 건물에 감동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건물이 사용되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찬사이다. 중략. 모든 사물은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찾아간다. 각자 자기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 있고 그 모습에 도달한다. 결국 건축은 우리의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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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두번째 이야기 -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여행자의 독서 2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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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가 책 속에 있다. 작가는 책 속의 배경 혹은 그 책과 심리적으로건 추억으로건 어떻게든 엮여진 장소에 책을 찾아 들고 간다. 낯설고도 친숙한 여행지에서 가져 온 책 속 문장을 음미하고 책의 작가와 교감하고 책 속 주인공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색의 풍경을 사진에 담고 기록한다. 그렇게 모아진 사진과 글들이 엮여져 다시 또 하나의 책이 되었다.

 

책이란 그렇게 추억의 주체가 되기도 대상이 되기도 한다. 후딱 읽어 치우기 보다는 그냥 거실 탁자나 속파 한켠에 두고 아무때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다가 또 그렇게 접어서 두면 좋을 책이다. 책을 읽다 생각나는, 순수한 감성을 조금 남겨둔, 지인이 있다면 뜬금없이 건네 주며 네 생각이 나서 샀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추억을 찾아 떠나지 마라. 희망을 찾아 떠나지 마라. 낙원을 찾아 떠나지마라. 낭만을 찾아 떠나지 마라. 이 책은 이렇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이자, 테마이다. 추억을 찾아 떠난 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떤 것은 배신하고 어떤 것은 변함없이 있어줘 고맙다. 그런저런 마음도 없이 우리는 떠나는 마음을 백지처럼 비워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작가는 스스로 답을 구한다.  희망을 찾아 떠난 곳. 막상 두브로브니크를 만나자 환상 속 마법의 성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작가는 마법의 성을 잃고 매혹의 바다를 만났다.

 

무너진 마법의 폐허를 뒤로 하고 하는 수 없이 건너편 성에 가서 수영을 했다. 그런데 아 너무나 훌륭한 바다다.

 

낙원의 땅을 찾은 그는 생각했다.

 

흐르고 섞여야 마땅한 시대에 단일함을 억지로 지켜가는 망상에 파시즘은 고개를 든다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맞는 것은 섞임과 공존, 받아들임의 미덕이었다.

 

낭만을 찾아 로키로 떠난 그는 고독했고, 울었다.

 

숲속 호스텔에서 누추하게 잠을 해결하고 마트에서 사온 허접한 음식들로 주린 배를 채우고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졸고 아름다운 설경 앞에 혼자 울었다.

 

작가의 문학적인 감수성에 매료되어 어느덧 책에서 언급하는 책마다 읽을 책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책을 읽을 수록 읽어야 할 책이 점점 더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소설과 여행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작가는 왜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책을 챙겼으며 책을 읽고 싶을 때마다 여행을 했을까? 여행 중 작가가 읽은 책들은 거의 소설류이다. 소설은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이 배경들은 그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자 이야기의 원천이다. 소설의 범위 안에 있는 장소 안에서 그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그 소설이 가진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훨씬 더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소설 속 장소를 방문한다면 시대의 아픔과 자연의 변덕을 묵묵히 지켜 내고 그 곳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하나 스러져가는 외딴집 하나라도 책 속의 등장 인물들과 함께 무수히 웃고 울고 정들던 뜻깊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제게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스며드는 시처럼, 가슴에 번지는 음악처럼, 진짜 여행은 유쾌하고 들뜬 것이라기보다 슬퍼야 제 맛이라는 듯이, 여행지의 어느 민둥산에 피어난 들꽃을 쳐다보는 일도 슬픈 일이고, 전쟁이 할퀴고 간 마을 콘크리트 벽에 탄흔을 바라보는 일도 슬픈 일이며, 관광객들을 위해 인형처럼 미소짓는 산골마을 소녀의 춤을 바라보는 일도 슬픈 일입니다. 마르코폴로도 현장법사도 해초도 연암 선생도 틀림없이 슬픈 여행자들이었을 꺼라 믿습니다. 슬픈 여행이야 말로 정갈한 기쁨, 맑은 가르침이 숨겨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의 말이다. 책을 펼쳐 작가의 말 첫 문장을 읽었을때 벌써 작가가 궁금해졌다. 대개는 어느 정도 보다가 작가가 궁금해지는데.. 본업은 카피라이터(였다)라고 표지 뒷 장에서 밝힌다. 감수성 깊은 시선과 포근하고 섬세한 글솜씨. 겨우 책 한 쪽을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이 좋아졌고 두번째 장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전편인 여행자의 독서 첫번째 편마저 소유하고 싶어졌다. 언제고 아무때고 책장에서 빼보고 싶어서. 

가오싱젠의 [영혼의산]이 어떤 책인지 설명 하기 란 쉽지 않다. (중략) 엉터리로 한데 모아 소설이라 부르다니 하며 소설 속 평론가 입을 통해 본 작품을 자괴하는 메타 픽션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스스로 극심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이런 대목은 존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 나 우리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이런 파격적인 기법은 중국 현대 소설에서는 좀처럼 드문 것으로..

중국 쑹판 대초원 지대를 지나며 읽고 있던 [영혼의 산]에서처럼 어딘가에 있을 신비롭고 영험한 산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을 책에 고스란히 적었다.


태국의 카오산로드가 그에게 각별한 이유는 곳곳에 자리 잡은 헌책방들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카오산로드의 헌책방에서 간절이 원서로 찾았던 책이 있었는데 그것이 당시 그에게 최고의 책이었던 카버의 단편집들 때문이다.

 

한 소설가는 카바는 번역하는 순간 맛이 사라지는 묘한 소설인데다가 영어가 짧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했다.(중략)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있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랑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카바는 그렇듯 사람들 사이의 떨림, 그래도 사랑해 할 인간들, 그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잔잔하고 미니멀한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의미있는 물음을 던진다. 카바는 젊은날 밤을 지새우게 만든 책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설레는 시간을 선사해준 작가다.

결국 작가는 그 첫 태국 여행에서 간절히 찾아다닌 카바의 원서는 만나지 못했고, 훗날 파리의 제4대학  부근의 책방에서 극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한다. 
 

이책은 참 우직하게 쓰여졌다. 작가 스스로 명함을 내밀기 부끄럽지만 사진을 찍는다고 했고 사진에 관한 책 도 출판했으니, 책 표지를 장식할만한 뽀대나는 사진 한장 쯤으로 잠재적 구매자들을 현혹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표지는 오히려 마치 텍스트만 있을 것처럼 얌전하고 존재감이 없다. 매우 서정적인 느낌의 책 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 많이 있었을 법한 화려한 여행담이나 신변잡기적인 서술을 생략하고 그 곳 그 자리와 연관된 예술 작품들(주로 영화 소설 희곡 등)에 집중한다. 그래서 책의 많은 지면에 사진이 할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도가 높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흔한 허영이 없다. 마치 다큐 사진 작가의 작품집을 보는 것 같다.  컬러 사진을 포함한 책의 분량은 427 쪽에 달하고, 정가는 만오천원선 300 페이지 안쪽 분량의 일반 재생용지를 사용한 흑백 텍스트 서적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 페이지에 새카맣게 그을리고 앙상하지만 뼈마디 굵은 손들이 무언가를 한창 하고 있는 장면이 크게 클로즈업된 사진 세 장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 시처럼 이 손을 향한 작가의 시선과 상념이 있다. 해변에는 손들이 넘실거린다. 살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퀴퀴한 비린내를 묻혀야하리라. 남루 하고 비루하더라도 삶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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