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독서 두번째 이야기 -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여행자의 독서 2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어떤 장소가 책 속에 있다. 작가는 책 속의 배경 혹은 그 책과 심리적으로건 추억으로건 어떻게든 엮여진 장소에 책을 찾아 들고 간다. 낯설고도 친숙한 여행지에서 가져 온 책 속 문장을 음미하고 책의 작가와 교감하고 책 속 주인공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색의 풍경을 사진에 담고 기록한다. 그렇게 모아진 사진과 글들이 엮여져 다시 또 하나의 책이 되었다.

 

책이란 그렇게 추억의 주체가 되기도 대상이 되기도 한다. 후딱 읽어 치우기 보다는 그냥 거실 탁자나 속파 한켠에 두고 아무때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다가 또 그렇게 접어서 두면 좋을 책이다. 책을 읽다 생각나는, 순수한 감성을 조금 남겨둔, 지인이 있다면 뜬금없이 건네 주며 네 생각이 나서 샀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추억을 찾아 떠나지 마라. 희망을 찾아 떠나지 마라. 낙원을 찾아 떠나지마라. 낭만을 찾아 떠나지 마라. 이 책은 이렇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이자, 테마이다. 추억을 찾아 떠난 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떤 것은 배신하고 어떤 것은 변함없이 있어줘 고맙다. 그런저런 마음도 없이 우리는 떠나는 마음을 백지처럼 비워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작가는 스스로 답을 구한다.  희망을 찾아 떠난 곳. 막상 두브로브니크를 만나자 환상 속 마법의 성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작가는 마법의 성을 잃고 매혹의 바다를 만났다.

 

무너진 마법의 폐허를 뒤로 하고 하는 수 없이 건너편 성에 가서 수영을 했다. 그런데 아 너무나 훌륭한 바다다.

 

낙원의 땅을 찾은 그는 생각했다.

 

흐르고 섞여야 마땅한 시대에 단일함을 억지로 지켜가는 망상에 파시즘은 고개를 든다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맞는 것은 섞임과 공존, 받아들임의 미덕이었다.

 

낭만을 찾아 로키로 떠난 그는 고독했고, 울었다.

 

숲속 호스텔에서 누추하게 잠을 해결하고 마트에서 사온 허접한 음식들로 주린 배를 채우고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졸고 아름다운 설경 앞에 혼자 울었다.

 

작가의 문학적인 감수성에 매료되어 어느덧 책에서 언급하는 책마다 읽을 책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책을 읽을 수록 읽어야 할 책이 점점 더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소설과 여행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작가는 왜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책을 챙겼으며 책을 읽고 싶을 때마다 여행을 했을까? 여행 중 작가가 읽은 책들은 거의 소설류이다. 소설은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이 배경들은 그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자 이야기의 원천이다. 소설의 범위 안에 있는 장소 안에서 그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그 소설이 가진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훨씬 더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소설 속 장소를 방문한다면 시대의 아픔과 자연의 변덕을 묵묵히 지켜 내고 그 곳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하나 스러져가는 외딴집 하나라도 책 속의 등장 인물들과 함께 무수히 웃고 울고 정들던 뜻깊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제게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스며드는 시처럼, 가슴에 번지는 음악처럼, 진짜 여행은 유쾌하고 들뜬 것이라기보다 슬퍼야 제 맛이라는 듯이, 여행지의 어느 민둥산에 피어난 들꽃을 쳐다보는 일도 슬픈 일이고, 전쟁이 할퀴고 간 마을 콘크리트 벽에 탄흔을 바라보는 일도 슬픈 일이며, 관광객들을 위해 인형처럼 미소짓는 산골마을 소녀의 춤을 바라보는 일도 슬픈 일입니다. 마르코폴로도 현장법사도 해초도 연암 선생도 틀림없이 슬픈 여행자들이었을 꺼라 믿습니다. 슬픈 여행이야 말로 정갈한 기쁨, 맑은 가르침이 숨겨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의 말이다. 책을 펼쳐 작가의 말 첫 문장을 읽었을때 벌써 작가가 궁금해졌다. 대개는 어느 정도 보다가 작가가 궁금해지는데.. 본업은 카피라이터(였다)라고 표지 뒷 장에서 밝힌다. 감수성 깊은 시선과 포근하고 섬세한 글솜씨. 겨우 책 한 쪽을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이 좋아졌고 두번째 장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전편인 여행자의 독서 첫번째 편마저 소유하고 싶어졌다. 언제고 아무때고 책장에서 빼보고 싶어서. 

가오싱젠의 [영혼의산]이 어떤 책인지 설명 하기 란 쉽지 않다. (중략) 엉터리로 한데 모아 소설이라 부르다니 하며 소설 속 평론가 입을 통해 본 작품을 자괴하는 메타 픽션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스스로 극심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이런 대목은 존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 나 우리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이런 파격적인 기법은 중국 현대 소설에서는 좀처럼 드문 것으로..

중국 쑹판 대초원 지대를 지나며 읽고 있던 [영혼의 산]에서처럼 어딘가에 있을 신비롭고 영험한 산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을 책에 고스란히 적었다.


태국의 카오산로드가 그에게 각별한 이유는 곳곳에 자리 잡은 헌책방들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카오산로드의 헌책방에서 간절이 원서로 찾았던 책이 있었는데 그것이 당시 그에게 최고의 책이었던 카버의 단편집들 때문이다.

 

한 소설가는 카바는 번역하는 순간 맛이 사라지는 묘한 소설인데다가 영어가 짧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했다.(중략)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있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랑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카바는 그렇듯 사람들 사이의 떨림, 그래도 사랑해 할 인간들, 그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잔잔하고 미니멀한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의미있는 물음을 던진다. 카바는 젊은날 밤을 지새우게 만든 책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설레는 시간을 선사해준 작가다.

결국 작가는 그 첫 태국 여행에서 간절히 찾아다닌 카바의 원서는 만나지 못했고, 훗날 파리의 제4대학  부근의 책방에서 극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한다. 
 

이책은 참 우직하게 쓰여졌다. 작가 스스로 명함을 내밀기 부끄럽지만 사진을 찍는다고 했고 사진에 관한 책 도 출판했으니, 책 표지를 장식할만한 뽀대나는 사진 한장 쯤으로 잠재적 구매자들을 현혹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표지는 오히려 마치 텍스트만 있을 것처럼 얌전하고 존재감이 없다. 매우 서정적인 느낌의 책 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 많이 있었을 법한 화려한 여행담이나 신변잡기적인 서술을 생략하고 그 곳 그 자리와 연관된 예술 작품들(주로 영화 소설 희곡 등)에 집중한다. 그래서 책의 많은 지면에 사진이 할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도가 높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흔한 허영이 없다. 마치 다큐 사진 작가의 작품집을 보는 것 같다.  컬러 사진을 포함한 책의 분량은 427 쪽에 달하고, 정가는 만오천원선 300 페이지 안쪽 분량의 일반 재생용지를 사용한 흑백 텍스트 서적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 페이지에 새카맣게 그을리고 앙상하지만 뼈마디 굵은 손들이 무언가를 한창 하고 있는 장면이 크게 클로즈업된 사진 세 장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 시처럼 이 손을 향한 작가의 시선과 상념이 있다. 해변에는 손들이 넘실거린다. 살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퀴퀴한 비린내를 묻혀야하리라. 남루 하고 비루하더라도 삶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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